한국과학기술역사 (1) – 김감불과 김검동의 연은분리술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에 대해 새롭게 메뉴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국과학기술자들이 이룬 중요한 과학적 업적들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아직은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자세히 연구하고 쓸 수 없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면 제 스스로 한국과학기술 연구자가 되어 좀더 학술적인 의미의 연구를 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의: 참고로 제가 지금부터 쓰는 것은 제가 나름 인터넷에 의존한 자료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향후 추가 연구에 의해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검증하여 최대한 사료에 맞는 내용으로 수정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 – 두분의 과학기술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사람 중 김감불은 양인이었고 김검동은 노비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분은 조선시대 연산군 때의 사람입니다. 시대가 이미 얄궂습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이었으니까요. 연산군이 폐위된 후 연산군 때에 있었던 모든 것들은 반란의 적폐가 되고 말았죠. 여기에서 불행의 씨앗이 시작이 됩니다.

이 두분의 이야기는 연산군 일기 연산군9년 (1503년) 5월 18일편에 짧게 나온다고 합니다.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종 김검동이, 납[鉛鐵]으로 은을 불리어 바치며 말하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猛灰]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속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시험해 보라 하였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납 (연)으로 은을 순수하게 정제할 수 있는 (불릴수 있는 으로 표현) 기술 – 그래서 “연은분리술“이라고 합니다.

이 기술은 현대 과학기술로 말하면 “녹는점 차이를 이용한 물리화학적 비철금속정제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납은 원자기호가 Pb인데 녹는점이 섭씨 327.5 도입니다.
  • 은은 원자기호가 Ag인데 녹는점이 섭씨 961.8 도 입니다.

녹는점 차이가 3배나 차이가 나죠?

보통 광석에는 납이 함량이 주로이고 은은 적습니다. 납의 녹는점이 은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납의 녹는점 이상 – 즉, 섭씨 327.5도 이상의 고온 – 으로 광석에 열을 주면 납은 서서히 녹아 나오게 되고 순수한 은만 남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요 조선 중기 당시 기술로 섭씨 327.5 도 이상의 고온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은이 되었는지 아직 납 뿐만 아니라 다른 금속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정말 순수한 은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녹임이 아닌 여러 단계의 정제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나름 정교한 공정개발을 한 셈이에요.

김감불과 김검동, 두분의 과학기술자는 이 기술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에게 알리기 전에 수많은 반복실험과 공정최적화 실험을 해서 정말로 순수한 은을 만들 수 있는 연은분리술 (회취법) 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연산군 앞에서 한 실험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총애하던 장녹수의 가문이 이 기술을 이용해서 은을 분리하는 광산을 만들어 큰 부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저의 연구가 아니므로 가설로 남깁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이 광산은 폐쇄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고 난 뒤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증거가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9일)

일본 시네마현에 있는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은 세계적인 은광 유적으로 유명하고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526년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가 조선에서 경수(慶寿)와 종단(宗丹)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연은분리법을 습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일본의 은광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어 한 때 전세계 은화의 1/3을 일본 은광에서 재련한 은이 사용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일본의 이러한 비약적인 은광산업의 결과 일본의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고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주류입니다.

김감불과 김검둥이라는 두분은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양인과 노비로 천한 계급이었지만 이분은 우리 역사상 중요한 화학기술자였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면 후배 화학자로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고문헌

유성운의 역사정치 재주는 조선이 넘고 돈은 일본이 벌었다…통한의 ‘연은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13526#home

동북아역사넷 연은분리술 (회취법)의 탄생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4_0020_0010_0010#self

2022년 12월 18일 추가된 글: 조선 연은법의 기록

1503년 5월 18일: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다(銀可足用)”며 흡족해하고 닷새 뒤에는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는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캐도록 지시한다. 또한 공조판서 정미수 (1456-1512, 56세)가 민간에 채굴을 허용 하는 대신 세금을 내게하는 채은납세제(採銀納稅制)와 행장을 발급하라고 건의했으며 연산군은 이를 시행한다. 당시 납부 금액은 채굴하는 한 사람 당 1일에 은 1냥이었다.

연은분리법이 고안되기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은을 얻는 방법은 (1) 중국에서 구리와 은을 분리하는 방법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2) 다른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광석을 태운 다음 재에서 은을 걸러내는 원시적인 방법이 주를 이뤘고, 따라서 은의 생산량은 미진한 상태였다. 연은분리법은 이전에 중국에서 사용하던 회취법보다도 더 효율적이었으며, 더 많은 은을 산출할 수 있었고,  명나라의 실용서 <천공개물> 등에 소개되면서 널리 퍼졌다.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가고 중종이 즉위한 1506년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은광 채굴을 금지시킨다.

1507년 4월: 연은분리법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후 몇몇 대신들은 재정 부양을 위해서 민간에 은 채굴을 다시 허용하자고 요청해 민간에 은광 채굴이 일시 허용된다.

1508년: 단천에서 은이 많이 나는데 이걸 군민들이 무단으로 캐서 통사(通事)에게 팔고 통사가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지고 가는 일이 있다며, 즉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고 있으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자 중종은 이를 단속할 강직한 사람을 보내 관리 감독하게 하고 단천의 은은 1년간 나라에서 사용할 분량만큼만 캐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한다.(중종실록 7권)

1521년 8월: “금물(禁物)을 교역한 자는 김형석만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천(端川)에서 생산되는 연광(鉛鑛)을 취련(吹鍊)하여 은을 만들기 때문에 은 값이 매우 저렴하였는데 지금은 전보다 점차 비싸졌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북경으로 가는 통사(通事)들이 많이 갖고 가서 중국에 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은을 생산하는 곳이 있을지라도 실로 우리 나라의 이익은 아닌 것입니다. 단천에 은(銀)이 생산되는 곳은 관(官)이 지정한 곳뿐이 아니고 곳곳에 있습니다. 선왕(先王)의 제도에 산림천택(山林川擇)을 비록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였으나, 또한 엄금(嚴禁)하여 씀씀이를 절약하였으니 아마 생산에 한계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은을 산출(産出)하는 각처의 공천(公賤)으로 하여금 채취(採取)해서 공(貢)으로 바치게 하여 불시(不時)의 수요(需要)에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항상 이 일을 계청(啓請)하고자 하였으나, 말하는 사람이 재리(財利)를 말한다고 비난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감히 주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관원을 보내서 감독하여 채취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국용(國用)에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종실록 42권, 중종 18년(1521년) 8월 27일 병오 1조]

1523년 8월 11일: 통사(通事)들이 법금(法禁)을 어기고 단천(端川)의 은(銀)을 가져가므로 중국 사람들이 다 ‘단천의 은이 아니면 안된다.’ 하니, 만일 중국에서 공납(貢納)을 요구하면 그 폐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사사로 가져가는 금은(金銀)·주옥(珠玉)에 대해서는 본디 그 법금이 있으니, 이제 다시 더욱 밝혀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사신도 아울러 다스리소서. 또 공무역(公貿易)은 긴요하게 관계되는 물건이 아니니 수량을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행차에 있어서 법금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더욱 밝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신도 아울러 죄주도록 하라. 공무역도 적당히 줄이도록 승전(承傳)을 바치라.” 하였다.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8월 11일 무신 1조]

1523년 9월: 신이 전에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서 단천(端川)에서 은(銀)을 캐는 일을 보았습니다. 은을 캐는 구멍은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이 깊고 또 그 구멍이 매우 좁아서 겨우 세 사람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은을 캘 때에는 벌거벗고 코를 막고 목구멍을 가리고 횃불을 밝히고서 들어가니, 구멍 안에 오래 들어가 있지 못하고 곧 다시 나오는데, 형색(形色)이 죄다 변하여 산 기색이 아주 없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각 고을에 사는 공천(公賤)을 시켜 그 신역(身役)을 갈음하여 캐게 하므로 민폐가 없을 듯하나, 캐는 것은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사람을 사서 대신하니, 단천 백성이 홀로 그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은 항산(恒産)이 없어 산전(山田)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므로 가난하기가 다른 도(道)보다 갑절 심한데, 봄·가을로 은을 캐면 백성의 힘이 다하여 유리(流離)하게 될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한 두해쯤 걸러서 캐게 하여 힘을 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9월 12일 기묘 1조]

1526년: 일본의 긴잔큐키(銀山日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1526년 히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慶寿, 게이주)와 종단(宗丹, 소탄)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하여,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에 관한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은광석에 납이 다량으로 섞여 있던 이와미 은광에서 이 연은분리법 전래는 일본의 은 생산을 대량으로 증가시킨다. [이와미 은광의 역사]

1529년 7월: 형조(刑曹)가 아뢰기를, “김감불(金甘佛)과 홍의강(洪義江)의 일은 본도(本道) 【평안도(平安道).】 의 계본(啓本)에 의거 예조(禮曹)에서 추고, 결안(結案)을 올리고 본조로 하여금 조율(照律)하게 하였습니다. 김감불 【김동난(金同難)의 사촌이다.】 은 마필(馬匹)만 훔쳐 중국 사람에게 주었고, 자신은 아직 우리 나라에 있으니 사죄(死罪)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발꿈치를 자르고 얼굴에 자자(刺字)하여 전가(全家)를 먼 섬에 영속(永屬)시켜 노예로 삼는다는 율(律)로 조율하였습니다. 홍의강은 뇌물을 받고 김동난(金同難)을 고의로 놓아준 것으로 공초(供招)을 받았었으나, 결안할 때에는 범연(泛然)히 공초를 받은 탓으로 뇌물을 받고 고의로 놓아주었다는 말이 없어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다시 추고하여 귀일시킨 다음 결안을 고쳐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김감불의 일은, 당초 김동난을 추문하면 자기가 말을 훔친 일이 탄로날까 우려되었기 때문에 먼저 놓아보내고 싶어서 홍의강에게 청하여 놓아보낸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홍의강은 뇌물을 받고 고의로 놓아주었다 하여 일죄(一罪)로 조율하였다. 감불은 먼저 의견을 내어 고의로 놓아보낸 사람인데도 도리어 홍의강의 죄보다 낮다. 몰래 금물(禁物)을 매각한 죄 또한 무거운 것인 바, 지금 이 조율은 온당치 못한 것 같다. 공사(公事)에 의거하여 조처하고 또 삼공에게 의논하라.” [중종실록 65권, 중종 24년 (1529년) 7월 7일 경자 2번째기사]

1533년 6월: 한효원은 아뢰기를, “신이 전에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보았는데, 은을 캐는 일은 과연 상의 분부처럼 압사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은이 난다는 말을 듣고 그 근처 사람들을 추문(推問)하였으나 굳게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신(刑訊)까지 하면서 철저히 추문한 뒤에야 사실대로 공초(供招)하였고 캐어 보니 과연 은이 있었습니다. 전에 캔 곳보다 더 많았습니다만, 많은 백성들이 몰래 캐어 가므로 지금은 바닥이 났다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은이 나는 곳이 한 곳뿐이 아닙니다. 단, 국금(國禁)이 이와 같기 때문에 캐지 못하는 것이지, 백성에게 캐서 팔게 한다면 캐기는 쉬울 것입니다.” 하고, 장순손은 아뢰기를, “국금이 비록 빈틈이 없다지만 부경하는 사신 일행 중에 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자가 없어서 함경도로 들어가는 부상대가(富商大賈)는 모두가 은 캐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합니다. 신들은 생재의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1533년) 6월 24일 을미 1조]

단천에서 나는 품질 좋은 은 때문에 여러 폐단들이 나타났는데 은을 캐기 위해 깊게 파고 들어가다 구멍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압사하는 사고도 꽤나 많았다. 또 단천 현지에서는 납을 은으로 잘 정제해 보냈는데 이것이 덩어리의 형태로 가공될 때 일부 장인들이 그 안에 다른 것을 넣고 은을 겉에 씌워 유통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어차피 무게를 따지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말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게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은이 단천에서만 나는 것은 아닐텐데 단천에서만 채굴하다보니 폐단이 크고 그곳의 백성들만 고통받고 있으니 다른 곳에서도 채굴 시험을 해보라는 명이 나오기도 한다.

1537년 7월: 은광 개발을 하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사례가 나온다. 그 중 하나인 중종실록에는 종4품 판관으로 있었던 유서종(柳緖宗)이라는 사람이 일본인을 끌어들여 연은분리법을 유출했다는 내용이다. 유서종이 실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의주 판관(義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일가가 패란된 일이 많아 조관에 합당치 않으니 개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1537년) 7월 16일 계사 1조]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은 유서종 일가가 모반에 관여된 일이 있으므로 조관(朝官, 조정의 관직)에 임명하기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조정에서 이 유서종이라는 사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539년 7월: 그리고 이어 2년 뒤 유서종이 왜인과 접선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헌부가 유서종의 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여 왕에게 고한 내용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주 판관(全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김해(金海)에 있을 때 사인(私人)을 거느리고 바다 밖의 가덕도(加德島)에서 수렵하다가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모(金某)에게 체포된 일이 있었고 또한 서울 부상(富商)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접주(接主)시키는 한편, 왜노(倭奴)를 끌어들여 우리 나라 복장으로 갈아 입히고 매매(買賣)를 하도록 한 후에 병사(兵使) 김순고(金舜皐) 에게 청하기를, 나에게 공문(公文)을 준다면 가덕도에 들어가서 왜병을 포착해 올 수 있다고 하였으나 병사가 들어주지 않고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유서종의 계획은 자기 집에 왕래하는 왜인을 죽여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변방에 말썽을 일으켰으니 이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조옥에 내려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윤7월 1일 병신 2조]

“유서종이라는 관리는 가덕도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으로 동래 현령에게 걸린 전과가 있으며,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을 접대한 적도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일본 사람을 위장전입시켜 거짓된 공을 쌓고자 했으니 중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고 보고한 것이다. 정확한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지만 끝에 일본인을 죽이려다 어떻게 이야기가 샌 모양이다.

1539년 8월: 이 사건에서 연은분리법이 관여된 것은 다음 기록에 나온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유서종(柳緖宗)은 잘못이 많으니 죽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刑訊)하라. 다만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일이 증거가 없으니 지적할 수는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이 죄를 법에 비추어보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 다만 상인(商人)을 불러 접주(接主)시킨 것과 ‘나에게 공문(公文)을 달라고 한 일’로 조율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을 따지지 않고 수없이 형신하여 끝까지 추문해야 하겠는가? 삼공에게 하문하라. 윤은보가 의논한 유서종이 범한 죄는, 당초에 대간이 아뢴 것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든 죽을 죄는 예(列)로 보아 반드시 먼저 증거를 조사해서 그 단서를 얻은 뒤에 비로소 본인을 국문하는 법인데, 서종이 범한 죄는 사간(事干)을 조사하지도 않고 먼저 본인을 조사하여 신문(訊問)을 두 차례나 하였으니, 중한 죄수를 조사하여 국문하는 예(列)에 어긋나는 것 같다. 서종이 만일 시골 집에서 쇠를 불려 은을 만들고 심지어 왜노(倭奴)에게 그 방법을 전습시켰다면 이웃집에서 반드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니, 서종의 집에서 가까운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실증(實證)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홍언필이 의논한 유서종을 국문하자는 일은, 처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조정의 관원으로서 심지어 납을 불려 은을 만들어서 마치 장사꾼과 같이 했으니 여러번 형신을 받더라도 죄가 남을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잘못 형벌이나 신문을 받아서 죽게 한다면 이는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다만 법사(法司)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요 또 죄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으니, 우선 국문만 하다가 일이 장차 밝혀진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 (1539년) 8월 19일 계미 1번째기사]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한 고급 기술이었는데, 이를 일본에 유출한 것은 큰 문제가 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민간에 많이 있었다.

1540년 9월: “이제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계본(啓本)을 보니 ‘진상하는 은(銀)의 수량을 항상 1천여 냥으로 표준삼아 왔는데, 올해는 여러 곳에서 연철(鉛鐵)을 캔 수량이 전례(前例)에 비하여 5분의 1도 안 되므로 정해진 기한까지 앞으로 한 달 동안 일을 하더라도 수량을 채울 수 없으며, 단천(端川)의 은을 채취해 오던 곳은 연맥(鉛脤)이 이미 끊어졌다.’고 하였다. 만약 예년의 수량대로 채취하라고 한다면 민폐가 적지 않을 것이니 예년의 수량에 구애되지 말고 현재 채취한 수량만으로 제련하여 올려보내라고 공조에 이르라.” [중종실록 93권, 중종 35년(1540년) 9월 10일 무술 1조]

이 시점에서는 단천의 은도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단천의 은을 채굴하지 말라는 명까지 내려진다.

1542년 6월: “근래 왜인들이 잇달아 은을 가지고 와서 나라에서 무역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국용(國用)이 부족하지 않다. 단천(端川)에서 은을 캐는 폐단이 많다고 하니, 5년을 한도로 하여 캐지 못하도록 하라. 민간에서 만약 몰래 채굴한다면 나라의 법이 엄중하지 않게 되니 엄히 금지하라.” [중종실록 98권, 중종 37년(1542년) 6월 9일 무자 1조]

일본의 은광 역사

조선의 기술자들이 전래한 연은분리법은 이와미 은광에서 크게 성공하여,

1533년에 이미 인근의 다른 은광들에까지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1562년에는 모리(毛利) 가에 의해 은광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은광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은광은 다이묘들의 전략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로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관백(關白)이 되어 은광을 모리 가와 공동 관리하게 되었으며 도요토미 사후에는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 권리가 넘어갔다.

에도 막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은광에서 주로 행해졌던 수은-아말감 공정(Amalgamation process)을 도입하여 생산량을 더욱 늘리려 했다. 수은-아말감 공정은 은광석을 부순 뒤 바닷물과 수은을 섞어 아말감을 침전시킨 뒤에 수은을 증발시켜 은만 남기는 방법이다. 이는 일본에 ‘수은 흘려보내기(水銀流し; 스이긴나가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일부 광산에서 채용되었으나, 결정적으로 일본에서는 수은 산출이 적어 값이 매우 비쌌고, 이 시점에는 이미 연은분리법이 각지에 뿌리내리고 있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17세기에 이르러 이와미 은광의 은 산출량은 연 수십 톤에 달했으며, 일본 내 본격적으로 은본위제도가 확립되었고 조선 및 청나라와의 교역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덕분에 일본은 17세기 초 세계 3위의 은 생산국가로써 은 본위제 체제의 큰 손으로 떠올랐으며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촉진시키는 커다란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첫번째 글로벌 무역금융 네트워크 – 은(silver) 무역을 중심으로 (4) https://m.blog.naver.com/bobhang/1009808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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