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고려청자, 이조백자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도자기 기술은 예로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요 기록이 없다보니 할 수 없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가게 된 두 도자기 장인에 대해 소개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위에 사진인 2014년에 일본에 포로로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꽃을 피우신 이삼평 선생님과 심당길 선생님의 전시회가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는 포스터를 옮겨온 것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번의 전쟁을 통해 일본에서는 조선의 도공을 많이 납치해서 일본으로 잡아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분들의 삶이 굉장히 고되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시겠지만 실제로 이 분들을 데려간 일본에서의 대접은 달랐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로 인해 양인에 머물렀지만 일본에서는 장인으로 모셔서 일반인에게 없는 성을 부여하고 또한 지금은 사당까지 만들어서 지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삼평 선생님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의 조선도공(陶工) 납치계획에 따라 사가(佐賀) 나베시마번(鍋島藩)에 의하여 1594년 또는 1596년경에 일본에 끌려가, 처음에는 가라쓰(唐津) 근방에 상륙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이삼평 선생님에 의해서 시작된 가라쓰도자기입니다. 그 뒤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아스미산(泉山)에서 백자광(白磁礦)을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삼평 선생님은 일가족 18명과 함께 이곳에 이사하여 도향(陶鄕)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고, 이후 30여년 안에 이곳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을 이루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리타는 두메산골로 1590년대의 지도에는 지명이 전혀 나와 있지 않던 곳이었으나 1680년대의 지도에는 아리타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삼평과 함께 납치되었던 도공은 155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리타명산(有田皿山)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이곳은 대도향(大陶鄕)으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에도(江戶) 후기로 오면 이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일본 여러 지방의 자기 중 단연 제일로 손꼽히게 발전하였고 이마리항(港)을 통하여 널리 수출되었습니다.
아리타도자기의 특징은 아리타 내산제요(內山諸窯)와 외산제요(外山諸窯)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산의 제요는 이삼평 선생님이 발견한 백자광 아스미산의 도석(陶石)과 시라카와산(白川山)의 유석(釉石)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삼평선생님의 지휘 아래 번청(藩廳)이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주문에 의한 상등품의 제작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주로 개물류(蓋物類), 도발극상(兜鉢極上)의 침향호류(沈香壺類), 회석상(會席床)의 식기류, 세공(細工)의 향로류(香爐類)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초기 이마리는 단순한 조선식 백자이며, 고(古)이마리는 아리타 백자로 바뀐 일본 최초의 백자였습니다. 또, 아리타 외산제요는 지주나 상인들의 일상 식기류를 주로 구웠고, 제품의 대부분은 청자·청화백자·백자 등으로 서민적입니다. 또한 대발류(大鉢類)로부터 유합(油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을 가진 것으로 초문(草文) 등을 그린 자유분방한 작품이 많습니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기계화의 근대화된 기법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현재 크고작은 백수십 개의 가마가 설치되어 최대의 도향으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도조(陶祖) 이삼평 선생님의 기념비는 아리타마을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의 뒷산에 위치하여 아리타도업(有田陶業)의 장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심당길 님의 후손은 지금도 “심수관 (沈壽官)“이라는 이름으로 15대째 일본의 도기 장인 집안을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심당길선생님은 정유재란 때 시마즈요시히로(島津義弘)에 의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가셨고 일본 사스마도기(薩摩燒)를 개창하셨습니다.
1598년 12월, 시마즈요시히로에 의해 남원 등지에서 심당길과 박평의를 비롯하여 40여인이 피랍되어 가고시마현 구시기노시마하라(串木野島平)에 상륙하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심당길(沈當吉)은 청송 심씨로 남원근교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족은 1603년 구시기노(串木野)로부터 현재의 히오키군 히가시 이치키죠 미야마(日置郡 東市 來町 美山) 나에시로가(苗代川)에 이주하여 나에시로가와(苗代川燒)를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 심당길은 박평의와 함께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白土)를 발굴하여 오늘날의 사쓰마도기를 개창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흙은 조선의 흙과 달라서 이 백토를 발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쓰마번주는 이들을 사무라이급(士班)으로 예우를 하였으며, 이들이 구워낸 도자기에 사쓰마의 번명(藩名)을 붙여 “사쓰마도기(薩摩燒)”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후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가면서, 조선도자기의 흐름과 기예를 계승·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873년 제12대 심수관은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쌍을 출품하여 서구세계에 사쓰마도기의 수출이 시작되어 ‘사쓰마웨어’라는 이름은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가 될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제14대 심수관은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遠太郞)가 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1988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조선 도공과 포로를 귀국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조선에 돌아가면 여러 어려움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급의 대접을 받고 있어서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도자기 기술은 무기화학재료를 이용한 중요한 기술이며 이 도자기에서 사용한 화로는 나중에 제철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도공들도 기록이 있으면 좋겠지만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