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화학을 전공한 이유로 일단 화학자들에 대해 먼저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위에 보이는 빛바랜 사진은 이태규 교수님께서 KAIST 화학과 석좌교수로 88세 생신 기념으로 출간한 이태규 박사전기 (1990년)에 있는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우장춘 박사님, 이태규 교수님, 리승기 교수님이십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인에게 과학, 공학을 가르치는 것은 극히 규제를 하고 있어서 당시 제대로 대학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대학에서는 주로 사범대학이 있었을 뿐 4년제 대학으로 정식 대학교육은 아직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세분은 일본 교토에서 함께 계셨는데요. 당시에 이태규 교수님은 교토제국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시고 나중에 프린스턴 대학교에 양자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다시 도미하셨습니다. 해방후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로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태규 교수님은 초대 문리대 학장으로 부임하셔서 젊은 교수님들을 유치하셨는데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 문제로 큰 파동을 겪게 되고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사직하거나 월북을 하게 됩니다. 이태규 교수님께서 이 때 크게 좌절하시고 미국 유타대학교로 오셔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KAIST (당시는 한국과학원 KAIS) 설립을 위해 귀국하셔서 KAIST 화학과를 만드셨습니다. 이태규 교수님은 Eyring-Lee Theory라는 새로운 양자물리화학 이론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리승기 교수님은 교토제국대학교 공업화학과에서 고분자화학을 전공하시고 그동안 비날론 (Vinalon – Vinylon이라고도 함)이라는 새로운 수용성 고분자를 개발하셔서 이 공로로 교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리승기 교수님도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으로 부임하셨으나 이태규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설치안 문제로 파동을 겪으셨고 한국전쟁 때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김일성의 친서에 설득당해서 북한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1950년대 남한에는 변변한 화학공업시설이 없었던 반면에 북한에는 함경남도 흥남에 일본자본에 의해 설립된 화학공장이 있어서 여기에서 합성섬유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날론 공장이 아직도 북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어 생산된다고 합니다.
남북 분단이라는 민족비극에 의해 비록 이태규 교수님은 남한으로 리승기 교수님은 북한으로 가시게 되었지만 두 분 모두 해방 초기 유년기에 있던 남북한의 화학 인재를 양성하고 산업화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신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분과 함께 우장춘 교수님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신 관계로 일본어를 사용하시고 일본식 습관을 사용하는 것이 초기에 많은 오해를 불러온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대학교 설치안 파동을 겪을 때 이태규 교수님과 리승기 교수님 모두그런 문제로 동료 교수들 (사실 젊은 교수들) 로 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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