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한국의 과학기술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쉬움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생각을 듭니다.
“왜 조선은 신분을 뛰어넘지 못했는가?“
양반, 중인, 평민, 천민 중에서 과학기술자들이 어느 위치일까요?
의사나 통역관은 중인입니다. 그리고 도자기공과 장인은 천민입니다.
서양은 상황이 다릅니다. 귀족들이 과학을 연구했습니다. 유명한 라브와지에가 프랑스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고요. 대부분이 귀족들이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일을 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한 분파였던 퀘이커교도들이 과학기술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서 퀘이커교도들도 과학기술에 많이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가 잘 아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밑에 있을 때 한 일이 총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토요토미가 총 만드는 기술자였다는 것이 아니라 총을 만드는 것을 담당했다는 것이죠. 일본은 전쟁을 워낙 많이 했는데 조총을 가진 오다노부나가의 밑에 있던 토요토미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은 전통적으로 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도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서재필 박사 (Dr. Philip Jaisohn, 1864-1951, 87세)“님입니다. 서재필 박사님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이시고 병리학자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과학기술역사에 대해 쓰면서 이 분 애기를 하는 것입니다. 서재필 박사님은 실학자인 박규수의 제자입니다. 박규수의 제자들이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됩니다. 이 당시 서재필 박사님은 가장 막내였고 사관생도였습니다. 그래서 수구파를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청나라의 간섭으로 3일천하로 끝나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모든 가족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중에 서재필 박사님이 미국인 신분으로 고종을 만날 때 꽂꽂이 서서 악수를 했다고 합니다. 화가 안 풀렸던 것이죠.
서재필 박사님이 미국에 망명을 할 때 박영효와 서광범도 함께 갔지만 양반신분으로 천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다시 돌아갑니다. 박영효의 경우는 고종의 매제였고 나중에 한일합방할 때 일본의 작위를 받는 매국노가 됩니다.
서재필 박사님은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죠. 그러다가 교회를 가게 되셨는데 교회에서 어떤 후원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죠. 지금의 조지워싱턴 대학교를 다니셨는데 그 때 가정교사를 하던 중에 부인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부인은 뮤리엘 암스트롱 (Muriel Armstrong)인데 미국대통령 부캐넌의 사촌입니다. 당연히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서재필 박사님은 의대를 다니셨고 인턴도 했지만 당시는 인종차별 때문에 의사로 일을 하기는 어려우셨다고 해요. 그래서 친구와 동업으로 상점을 했는데 그 사업이 아주 잘 되게 됩니다.
구구절절 다 적을 수는 없고요 몇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기려고 합니다.
- 서재필 박사님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셨습니다. 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이 신문의 날이 되었구요. 3면은 한글로 1면은 영어로 낸 최초의 현대신문입니다.
- 서재필 박사님은 유한양행의 전신인 유한주식회사의 초대사장이십니다. 유일한 박사님이 귀국할 때 서재필 박사님의 큰따님이 디자인을 해 준 것이 지금의 유한양행의 로고가 되었습니다.
- 서재필 박사님의 건의로 청나라 사신을 환대하던 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 서재필 박사님은 배재학당 (지금의 배재고등학교)에서 토론수업을 하셨는데요 그것이 만민공동회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등이 나옵니다. 나중에 이 분들이 미국에 유학을 하도록 격려하시죠. 그러니까 독립운동가를 정말 많이 키우셨습니다.
- 서재필 박사님은 3.1운동이 나기 전에는 한국의 독립은 어렵다고 보셨다고 해요. 하지만 3.1운동 이후에 자신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독립자금으로 전재산을 다 투자하시게 됩니다.
- 서재필 박사님이 박사님이 되신 것은 나중에 펜실베니아 의대에서 병리학 박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논문도 5편이 있습니다. 최초의 서양식 과학자인 것이죠.
- 1945년에 해방이 된 이후에 미국의 하지 중장과 이승만 박사의 사이가 틀어지게 됩니다. 이 때 하지 중장이 서재필 박사님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고 하죠. 서재필 박사님이 일거에 거절합니다. 대신 초대 제헌국회에서는 의장으로 역할을 하십니다.
- 서재필 박사님은 독립운동가들 조차도 분열해서 대립하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셨다고 합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등이 항상 수구파 때문에 무산되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죠. 서재필 박사님은 조선의 멸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나중에 왕족과 수구파는 모두 일본의 작위를 받고 친일을 열심히 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 20년 정도 살아보니 서재필 박사님이 한국을 보실 때 어떠셨을지 조금은 짐작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일본 근현대사와 과학사에 대해서도 쓰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일본을 좋아해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한가지 깨달을 것이 일본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고 그래서 공부를 했어요. 우리는 일본에 대해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그리고 삼국시대때 잠깐 말고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하수가 하는 일입니다.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조곤조곤 반박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돌려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많이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윽박지르기 밖에 안되더라구요.
일본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쓰기로 하고요.
서재필 박사님은 미국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딸이 있었는데 두 따님이 살아계실 때와 그 손자가 살아계실 때에는 서재필 박사님의 유해 봉환이 안되었습니다. 과거 조선왕조와의 악연을 아는 자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손자가 돌아가신 후에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한국에서 갑신정변 때 처절하게 죽은 부인 광산 김씨와 합장을 했다고 합니다.
서재필 박사님께서 필라델피아에 사셨는데요 필라델피아에 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계속 서재필 박사님의 뜻을 기리고 이어가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 중 하나입니다. 서재필 박사님이 사신 기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굴곡이 많았던 시기였고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필립 제이슨 박사님께서 평생 미워하는 조국을 위해 사셨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병리학적 업적도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