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조선시대 과학사를 얘기할 때 장영실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천민이었다가 공직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어서 그 스토리 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데요 장영실을 세종대왕이 발탁한 것으로 모두 알고 있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장영실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왕은 태종입니다. 장영실은 과학자라기 보다는 천민이었기 때문에 기술자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을 전체적인 과학적 계획을 짜고 이론을 전개한 두사람이 더 있습니다. 바로 이순지와 이천이라는 분인데요 이 두분이 지금으로 말하면 과학자에 더 가깝습니다.
- 이천 (1376-1451, 75세): 무신이고 행정가이고 과학자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연구소장이라고 할 수 있죠.
- 이순지 (1406-1465, 59세): 문신이고 천문학자입니다. 이론적인 기초를 다졌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천문학 박사라고 할 수 있죠.
- 장영실 (1389?-1443? 54세?): 기술자이고 발명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술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죠.
먼저 이천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태종 (1367-1422, 55세)이 왕으로 즉위한지 두번째 해인 1402년에 무과에 급제했고 대마도 정벌을 한 무관입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왜구의 출몰이 많았기 때문에 태종은 무기의 개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천의 과학적 능력을 보고 세종을 수렴청정하던 1418년에 공조참판이 되어 금속활자의 주조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1420년에는 세종의 명으로 경자자라는 새로운 활자를 만들게 됩니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활자가 여러번 개발됩니다. 이천이 그 중 하나의 중요한 획을 그은 것이죠.1422년에는 저울을 개조하고 사륜차를 만들었습니다.
1433년에는 혼천의를 발명하여 세종에게 올렸고요. 1434년에는 금속활자의 “갑인자“를 새로 만들어서 인쇄발달에 기여를 했습니다.1437년에는 여진족을 정벌했고요
이천의 업적으로는 호조판서로서 오랜 연구 끝에 천문학 기구인 대간의, 소간의, 혼의, 앙부일구, 자격루 등을 만들었고, 그 밖에 화포를 만드는 등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나라에서 건축하거나 개축하는 공사에서 대부분 주관하는 관청의 재조를 맡아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자인 장영실을 알아보고 적극추천한 것도 이천입니다.
이순지는 이천에 비해 30세가 어립니다. 1427년 (세종 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세종대왕이 한양의 위도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유일하게 답을 한 사람이 이순지입니다. 이순지는 이 일로 발탁이 되어 천문학 이론을 정립하는데 많은 업적을 쌓게 됩니다. 조선의 천문역법을 정비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1433년부터 1442년까지 9년간 조선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국 명나라에 의존해서 천문역법을 계산하지 않고 조선 고유의 방법으로 천문역법을 계산하게 됩니다.
장영실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승진을 거듭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군 (지금의 부산)의 관노비였습니다. 발명가로서의 재주를 알아보고 태종이 발탁을 했고 세종대왕이 특히 아꼈다고 합니다.
세종은 장영실이 나이 약 32세 때인 1421년 (세종 4년)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장영실을 중국에 보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습니다. 귀국 후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노비에서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됩니다. 1424년(세종6년), 세종은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물시계를 만들라고 명합니다.
1432년부터 1438년까지 6년간은 이천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이때 물의 힘으로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 자격루(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대간의, 소간의를 비롯해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나침반인 정남일구, 혜정교와 종묘에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 규표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의 관직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모두 이천의 책임하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습니다. 장영실은 노년에 세종의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지게 됩니다.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천의 책임하에서 발명이 가능했던 것이고 이순지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발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물론 1421년부터 2년여간 중국에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지금은 신분사회가 아니지만 세종대왕 시절에는 국민의 거의 절반이 천민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엄격한 조선 초기의 신분 사회에서 이천의 과학적 책임과 이순지의 과학적 이론 정립이 없었다면 장영실의 발명은 있을 수도 없었고 설사 있더라도 그 빛을 발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종과 세종대왕의 시기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과학적 투자의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후기에는 이런 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이천-이순지-장영실 과학기술팀의 협력과 오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영실은 아마 1389년경에 출생해서 1445년경에 사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세종의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1442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아마 그 일로 곤장 80대를 맞고 쫓겨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조선 초기에는 과학기술적 업적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임금, 좋은 관료 그리고 좋은 발명기술자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