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역사 (8) – 최무선

최무선 (1325-1395, 70세)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활동한 무관이며 과학자입니다. 최무선은 132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최동순은 지금의 서울시 마포의 호조관청인 장흥창의 관리였습니다. 최무선이 살던 시기에는 일본 왜구들의 출몰이 잦았던 때였고 최무선은 어려서부터 화약무기에 관심이 많아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왜구들을 효과적으로 무찌르기 위해서는 화약과 총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화약제조법에 몰두하게 됩니다. 당시 화약제조법은 중국에서 이미 개발이 되었지만 그 제조법은 극비로 붙여져 있었습니다.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염초: 숯: 유황의 비율이 75%: 15%: 10%의 비율로 필요하고 숯과 유황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반면 가장 중요한 염초는 고려/조선에서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염초는 지금의 화학지식으로는 “질산칼륨 (KNO3, Potassium Nitrate)“으로 폭발력을 내는데 중요한 물질이기 때문에 염초의 제조법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질산광산이 있어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동아시아에는 아직 질산광산이 없었고 따라서 염초제조를 위한 원료확보는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최무선이 살던 시기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였는데 이 때 최무선은 원나라의 이원 (李元)이라는 사람으로 부터 염초를 만드는 몇가지 비법을 전해듣게 됩니다. 집에서 부리던 종 몇명에게 기술을 익히게 해서 시험을 한 결과 화약제조법을 확보하게 된 최무선이 도당에 보고를 했지만 사기꾼 소리만 들었을 뿐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수년간의 끈질긴 설득끝에야 비로소 우왕 3년 (1377년) 즉 최무선이 52세가 되어서야 “화통도감 (지금의 화학약품국)“이 세워지게 됩니다. 화통도감의 제조로서 최무선은 대장군포 · 이장군포 · 삼장군포 · 육화 · 석포 · 화포 · 신포 · 화전 · 화포 · 화통 등의 총포류를 개발하고, 화전 · 철령전 · 피령전 등의 발사용 화기, 질려포 · 철탄자 · 천산오룡전 · 유화 · 주화 · 촉천화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함포를 실을 수 있도록 전함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화기 이용에 대한 교육에도 힘써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 편성되었습니다.

최무선이 55세때인 동왕 6년 (1380년) 왜구 선단 5백 척이 진포에 출몰, 서천과 금강 어구까지 올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임명되어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배편으로 출항, 처음으로 화통 · 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했습니다. 이때 그는 부원수로 최칠석 등을 이끌고 진포에서 고려군을 지휘했습니다. 이때 진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500척을 모두 불살라버렸습니다. 타고 온 배를 잃어 퇴각로가 막힌 왜구는 곧 한반도 내륙을 돌며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았지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거쳐 운봉에 집결한 왜구는 다시 병마도원수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황산에서 궤멸되어 그 세력이 전에 비해 크게 꺾였습니다 (황산대첩). 《태조실록》에 실린 졸기에서 사관은 “이로써 왜구가 차츰 줄고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잇따르며, 바닷가 백성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덕분이라 하나 무선의 공 또한 적지 않았음이다.”라고 최무선의 공적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최무선이 58세인 동왕 9년 (1383년) 왜구가 다시 남해의 관음포에 상륙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정하였고, 이 전투에서도 화기를 써서 왜선을 격침시키는 공을 세웁니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을 정도로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두 번의 해전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 조정은 창왕 1년 (1391)에 왜구의 본거지로 알려진 대마도를 정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 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 등 신흥무관세력에 의해 화통도감이 없어지고 군기시에 통합되고 맙니다.

《태조실록》에 실린 내용에는 최무선이 임종할 당시 책 한 권을 부인에게 주며 아들 최해산 (1380-1443, 63세) 이 다 자라면 줄 것을 당부하였고 그 책은 화약의 제조법과 염초의 채취 방법 등을 기술한 화약수련법, 화포법 등의 저술이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 책을 근거로 최해산은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 화약 및 화포 제작을 하게 됩니다.

문신 정이오의 화약고기라는 책에는 최무선의 업적을 두고 “나라를 위해 마음을 썼으므로 능히 이원의 기술을 얻었으니 그 사려가 깊고 멀다 하겠다. 지금 왜구가 우리 수군과는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겨루려 들지 못하는 데는 앞서 진포에서의 싸움과 뒷날의 남해에서의 승전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최근에 유성고등학교 장미경 선생님과 김준수, 김지훈 학생들이 최무선의 염초제조법에 대한 연구를 현대의 분석기기를 활용하여 발표한 내용이 있습니다.

“흙과 재의 1:1 혼합추출액으로 최대 68% 순도 (Purity)의 염초 (KNO3)를 얻었는데 분별결정법에 의해 순도를 약 14% 향상시켰다. 즉 조상들은 염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물질의 용해도 차이를 이용한 분별결정법으로 정제하였다.”

“염초 (KNO3)와 용해도가 유사하거나 높은 NaNO3 불순물 등이 정제과정을 어렵게 만든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흙에서 염초를 얻었는데 “처마밑 흙, 화장실앞의 흙, 마루밑 흙, 오랜창고 바닥의 흙, 길가의 흙, 사람의 소변,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 등에서 염초를 얻었다고 합니다. 또한 염초를 대량으로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염초제조를 위한 흙을 수집하는 “취토군“이라는 군대가 따로 있었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이집저집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처마밑과 화장실 주변의 흙을 모두 채취하다보니 누구나 취토군을 꺼렸고 반발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화약제조 부흥을 위해 임금이 직접 “특별취토령“을 선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질산칼륨이 중요한 비료이기 때문에 비료회사에서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말 조선초에 질산칼륨인 염초의 원료를 확보하고 정제법을 개발하기 위해 최무선과 그 군대가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One thought on “한국과학기술역사 (8) – 최무선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