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나의 모더나 이야기 (My Biotech Memoir – Moderna)”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사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일정한 직업 없이 건축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집을 짓고 되팔고를 반복하시는 바람에 저의 집은 어려서 부터 항상 이사를 다녔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한번은 어느날 아버지께서 집을 판 대금을 현금으로 들고 오셔서 온가족이 둘러앉아 그 돈다발을 함께 세고 큰 돈 단위로 돈묶음을 해서 전체 받은 금액을 함께 오랜 시간 센 기억이 있습니다. 그 날은 모두들 그 많은 돈에 신기해 하고 약간의 흥분 속에서 돈다발을 즐겁게 세었는데 그 일이 있고 몇일 후에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이 팔렸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항상 이사를 다니다 보니 오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어느 정도 가까워질 무렵이 되면 우리집은 또다시 이사를 해야했기에 결국 인사도 못하고 친구와 헤어지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는 이사하는 일과 친구를 사귀고 헤어지고 하는 일이 친구 좋아할 어린 나이의 소년이 겪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이사를 많이 한 덕분(?)인지 몰라도 저는 어느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모험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건축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차를 운전해서 가끔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계곡이나 산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차를 운전하실 때에는 좋아하시는 이탈리아 가곡을 큰 소리로 멋지게 불러주셔서 우리들은 잦은 이사를 하는 어려운 과정 중에도 가족들 간에는 화목함을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쾌활한 성격이셨지만 자신이 4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께서 벌어놓으신 돈을 주식투자로 다 날리시고 그 충격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려서 부터 아버지 없는 설움과 그 허전함을 느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저희 3남매들에게는 언제나 친구처럼 잘 놀아주시고 TV에 나오는 만화영화도 우리와 꼭 함께 보시면서 함께 어린이처럼 즐거워해 주시는 좋은 친구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한약방을 하시는 외할아버지의 첫째딸이셨는데 성격이 차분하시고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시던 동네가 깡시골이어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충분한 성적이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여자가 무슨 고등학교를 가냐는 핀잔과 반대로 인해 중학교까지만 다니게 되어서 항상 배움에 대한 갈망이 크셨습니다. 특히 어머니는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으로 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셔서 학교를 졸업하신 이후에도 가끔 저희에게 그 때 배우셨던 영어실력을 보여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저는 어려서부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고 언어 습득도 빠른 편이었습니다. 특히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어민 영어테이프를 선물받아서 원어민의 발음대로 듣고 읽는 습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저의 발음이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하게 된 계기가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건축일이 워낙 부침이 심하고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도 부족한 살림을 채우시기 위해서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다만 중졸 학력으로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어서 화장품 장사를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시면서 주위 아주머니들의 비위를 맞추시거나 야쿠르트 아줌마 일을 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저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해서 친구의 집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못본채하고 숨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어리석은 아들이었던 것이 확실하죠.
그렇게 이사가 잦다 보니 교회도 계속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저희 집안은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죽으셨다가 기도를 몇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크리스찬이 되셨고 그 이후에 제가 4대째 크리스찬인 오랜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으로 저의 아버지는 신학대학교를 나오셨는데 목회에 큰 뜻이 없으시고 오히려 정치에 관심이 많으셔서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망도 있으셨지만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장사를 주로 하시고 계셨던 것이죠. 제가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희들의 교육을 위해 이제 더이상 이사를 다니면 안되겠다고 결정을 하시고 강남8학군이 있는 선릉역 부근에 28평형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방이 3개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는 안방을 쓰시고 막내 여동생이 방 하나를 혼자 쓰고 나머지 한방은 저와 제 남동생이 함께 쓰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2층침대에서 저는 2층에서 자고 동생은 1층에서 잤는데 처음에는 2층에서 자다가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서 처음 몇일간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금새 익숙해져서 몇일 지나지 않아 잠을 아주 쿨쿨 잘 잘 수 있게 되었죠.
새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이제 교회도 정하게 되었어요. 처음에 가본 교회는 좀 신기했습니다. 교회가 압구정이라는 무슨 밭 사이에 있었는데 큰 허허벌판에 엄청 큰 천막이 크게 쳐진 그런 천막교회였습니다. 그전에도 천막교회나 비닐하우스 교회는 많이 다녀봤지만 그렇게 큰 천막교회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그 천막교회까지 가는 버스는 딱 한대 뿐이었는데 천막교회 주위에는 진흙탕 가득한 밭을 고르고 그 위에 고층아파트가 올라가는 중이었어요.
그 천막교회는 지금의 광림교회가 되었고 그 때 올라가던 고층아파트는 현대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모님의 훌륭한 결단과 헌신 덕분에 소위 잘 나가는 강남8학군에서 질 좋은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도 멀지 않았고 훌륭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나름대로 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본래 신앙이 없는 상태로 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니는 광림교회를 통해서 신앙을 가지게 되셨고 점차 어머니의 신앙은 깊어져 갔습니다. 반면 아버지는 새로 시작한 화공약품사업을 배우고 성장시키느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는데 그러는 중에 평소 하지 않던 술, 담배, 골프 등에 빠지기 시작했고 어느 시기 부터 이에 대해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기 시작해서 급기야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환경은 좋은 곳으로 옮겨졌지만 그와는 반대로 가족의 화목은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죠. 가정 폭력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갔고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는 날에는 나는 두동생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근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소리를 밤새 듣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밤 늦게 나타나서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시는데 이전과는 달리 내 마음속에 가만히 보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를 때리시는 술에 취한 아버지와 정면으로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고등학생이 되어 키도 아버지보다 커지고 몸도 좋았기 때문에 몇번 아버지를 밀치고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게 저항하니 아버지도 결국 포기하고 앉은 채로 몇마디 하신 후 더이상의 폭력없이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이후로는 더이상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끔 일이 바쁘신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아지고 뭔지 모를 위험신호는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라며 저와 동생들은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고3이 되던 해 1월 우리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사업이 크게 부도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집과 친척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고 어느날에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상심해 계시고 집에 있는 모든 가구와 집기들에는 빨간 딱지가 여기저기 붙여진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에도 오지 못하시고 경찰에 쫓기는 상태가 되어서 어수선한 상태여서 저는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장남인 저로서는 불안해 하는 동생들을 안심시키는 것과 함께 낙담하시고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하는데 온통 정신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다행히 어머니는 교회에서 기도하시는 생활을 통해 이 어려운 상황을 신앙심으로 극복하고 계셨고 많은 주위의 믿는 분들이 때로는 음식을 보내주시기도 하고 돈을 보태 주시기도 하시는 등 어려워진 우리 가정을 돌봐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어머니께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시려고 노력해 오신 것이 이 어려운 때에 도움의 손길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대입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날 그날은 늦가을 날씨가 정말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월 이후로 집에 한번도 오시지 못하고 도망을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저녁 늦은 시간에 잠깐 집에 들르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의 당당했던 그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고 너무나 야위고 의기소침한 거의 노숙자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살도 많이 빠지시고 목소리에는 전혀 기운이 없으셨어요. 그래도 그나마 그날만큼은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우리 온 가족은 차분한 마음이 되어서 어머니께서 준비하시는 맛있는 저녁식사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리고 아파트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두명의 건장한 사복경찰이 현관문으로 막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몇일동안 사복경찰들이 우리 아파트 앞에서 잠복해서 아버지가 나타나기만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경찰들이 갑자기 들이 닥친 것이죠. 저는 그 순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크게 벌리고 아파트 현관을 막아섰고 아파트의 문이 열린 상태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크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수색영장이 없이는 당신들은 한발짝도 이 집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집으로 들어오려던 사복경찰들은 순간 당황한 듯 멈칫하는 기색이었죠. 당연히 수색영장이든 어떤 영장이든 가져왔을리가 없으니까요. 몇차례 집으로 들어오려는 경찰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어디서 나에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이렇게 모든 식구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순순히 경찰의 손에 넘겨줄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몇분간 대치하는데 어머니께서 음식 준비를 하시다가 급히 나오셔서 두분의 사복경찰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시고는
“동네 사람들에게 소란을 끼치면 민폐가 되니 잠시 잠깐 저와 함께 나가시죠.”
라고 하시고는 두분의 경찰들과 함께 잠시 나가셨습니다. 경찰들과 어머니가 나간 후 저는 현관문을 닫고 집안을 둘러보는데 어디로 숨으셨는지 아버지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즈막이 저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날 너무도 초라하게 뚜껑이 덮인 변기위에 앉아 있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말이지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듯이 힘없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들어오시라고 해…”
그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알았노라고 말씀드리고 다시 현관 밖으로 나가서 저으기 멀치감치 떨어져서 아직도 어머니의 사정을 듣고 있는 경찰들에게 다가가 완전한 체념한 상태가 되어 이제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왠일인지 이 사복경찰들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이제 와서 네 아버지를 빼 돌리고 우리를 들어오라고 하는 걸 우리가 모를 것 같으냐? 에이씨!”
이러고 경찰들은 돌아가 버리고 그 날의 상황은 그렇게 종료가 되었습니다.
경찰들이 돌아가고 나서 다시 어머니는 급히 저녁식사를 차리시고 우리 모두는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그날 우리가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특히 저는 경찰들과 짧은 순간 겪었던 초긴장 상황의 극한 대치상황과 이후 다시 경찰들이 돌아와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버지는 이미 집에 계시지 않았고 저와 동생들은 어머니의 독려로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저에게 대학을 간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며 이미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입시 공부에서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미 몇달간 담임선생님이 몇십만원하던 육성회비를 가져와야 학교를 더 다닐 수 있다고 윽박지르고 이미 최종 통첩까지 받은 상태여서 이제 수일 내로 학교에서 내쳐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따라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조용히 교무실로 부르시더니 오늘 친구의 어머니께서 저 대신 육성회비를 주시면서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얘기해 주셨고 선생님이 교사 회의를 통해서 졸업 때까지는 육성회비를 장학금 형태로 주시기로 하셨다는 감사한 말씀을 해 주셔서 저는 다행히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마음속으로 이미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이미 가지 않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의 그런 마음을 모르신채 교회에 가셔서 열심히 저를 위해 매일밤 다른 학부형들과 목사님과 대학입시를 위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터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교과서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교과서는 접어두고 이제 대신 그동안 보지 못한 책을 몇권 읽어볼 요량으로 아버지의 책꽂이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저의 평생의 지침이 되어 준 두권의 철학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책은 함석헌님의 “씨알은 외롭지 않다.“였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씨알”은 저와 같은 민초를 얘기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치열하게 사셨던 함석헌님의 삶과 삶의 철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함석헌님은 군부독재시절 수차례 감옥에 가시게 되셨는데 본인은 그것을 오히려 “대학에 간다”고 표현을 하시더라고요. 감옥 안에서 사색하며 배운 것이 대학을 다니며 배운 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신 것이죠. 함석헌님도 크리스찬입니다. 함석헌님이 치열한 삶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평정심을 찾으시는 모습을 책속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이 책을 통해 저는 저의 현재 어려운 상황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씨알은 외롭지 않다”를 다 읽고 나서 저의 어려운 상황을 이길 힘을 얻은 저는 다른 함석헌님의 책에 손길이 갔습니다. 그 책은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함석헌님의 저항과 투옥을 하게 된 배경 등 그 분의 인생이 다양한 우여곡절과 질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은 한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덤덤하게 쓰신 책이었습니다.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저는 지금의 상황에 흔들리기 보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지 간에 그 상황이나 결과에 흔들림이 없이 내가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올곳이 흔들림 없이 가면 된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꿈을 포기한 어린 저에게 단비와 같은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수년이 지나 나중에 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아버지는 함석헌 선생님을 꽤 존경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이셨는데도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대학교 때 읽은 이후로 함석헌 선생님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아버지의 책장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이 귀한 두권의 책을 통해서 아버지의 부재를 견딜수 있고 이후 저의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견뎌나갈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몇년전 세상을 떠나셨지만 선생님의 힘있는 어조는 저의 삶 속에 여전히 남아 힘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 글도 혹시 어려운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분에게 제가 어려서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통해 힘과 결의를 다졌듯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