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iotech Memoir – Moderna (5) –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 이제 다섯번째 글을 쓰게 되었네요. 저는 이 글을 저의 신앙간증의 형태를 겸비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KAIST 석사과정을 하는동안에 여러가지 인생을 결정해야 할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이 때에도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저를 위해 예비하신 곳으로 저를 정확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KAIST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첫학기를 지나면서 지도교수님과 연구실을 정하게 됩니다. 연구 주제와 교수님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이었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사뭇 심각했습니다. 특히 졸업 후 진로에 도움이 많이 되는 교수님의 경우에는 더욱 들어가기도 어렵고 교수님의 숫자가 12명에서 과기대 교수님 10분을 포함해서 22명이나 되셨기 때문에 36명이었던 지도 교수님 당 받을 수 있는 석사학생의 수는 2명이 채 못되었습니다. 석사과정 학생은 향후 대부분 박사과정 학생이 되고 박사과정 학생이 많을수록 연구실의 연구실적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모든 교수님이 석사과정 학생들을 가능하면 많이 받으시려고 각 연구실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통해서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올 석사과정 학생들을 미리 수소문하는 등 여러가지 눈치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본래 유기화학에서 유명하신 어떤 교수님의 아래에서 배우고 싶었지만 나중에 알게된 바로는 입학성적으로 학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출신 대학에 따라 결정된다는 실망스러운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의 대학은 상위권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는 원하는 교수님의 아래로 가는 대신 유기화학 교수님 중에서 저를 받아주실 수 있는 교수님 아래로 가야했습니다. 다행히 경희대 선배님 중 한분이 계신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은 저의 입학성적을 아시고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선배님이 계신 연구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놀랍게도 동기 2명과 함께 3명이나 그 교수님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실 내에서도 프로젝트가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정하는 것도 실망스럽게도 출신학교 별로 좋은 학교를 나온 학생이 좋은 프로젝트를 받을 수 있어서 저는 처음 6개월간은 다들 받기 싫어하는 프로젝트를 받게 되어서 유기화학반응연구가 아닌 유기화합물 순수정제분리 연구 프로젝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실험실에 오고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시작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개월이 지난 후 어찌된 일인지 저의 프로젝트는 변경되었고 새로운 유기화학반응연구 프로젝트로 배치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Nucleoside Chemistry라는 프로젝트였는데 DNA, RNA의 골격이 되는 Nucleoside 분자의 구조를 수정함으로써 항바이러스제 (Antiviral Agents) 또는 항암제 (Anticancer Agents)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꺼리는 프로젝트였는데 그 이유는 이 물질이 다루기 어려운 물질적 특성 (Physical Properties)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왠지 이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고 Nucleoside라는 분자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연구도 너무나 잘 되어서 금새 반응에 적응하고 데이타를 일주일만에 뽑게 되었습니다.

Nucleoside (1) – 뉴클레오사이드에 꽂히다

석사1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 성적이 나오고 얼마 후 지도교수님이 저를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군, 자네 1학기 성적이 아주 좋아서 2학기까지만 잘 유지하면 조기박사과정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침내 제가 이태석 박사님이 그러셨듯이 조기박사과정으로 갈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기뻤지만 저에게는 당시 말 못할 큰 고민에 빠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욱 어려워진 저의 가정의 상황이었습니다. 대학1학년때 저희 가족은 아파트에서 집달리들에 의해 온집기가 아파트의 지하실로 옮겨지고 쫓겨나는 일을 겪었고 그 날의 경험으로 저는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돈을 벌어서 다시 이 집을 사고야 말리라!

그리고 우리 온가족은 경기도 하남시의 반지하로 옮겨서 몇년간 월세를 살게 되었고 교회와 너무 멀었던 것 때문에 우리는 다시 잠실에 있는 어느 상가건물에 공동화장실을 쓰는 방한칸인 집으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엌도 없어서 아버지께서 약식으로 건물 밖에 간이부엌을 만드셔서 어머니께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만든 상태였습니다.

주중에는 저만의 기숙사 생활로 저자신은 편하게 지냈지만 주말에 집에 갈 때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되니 제가 편하게 더이상 공부만 하고 있어서는 우리 가족의 어려움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도교수님으로 부터 성적이 좋아서 조기박사과정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즐거워 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죠.

오히려 저의 상황을 교수님께 설명을 드려봤자 교수님이 하실 말씀이야 참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저는 어리석게도 2학기 성적을 반대로 깔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역시 2학기 성적은 좋지가 않았고 당연히 지도교수님의 핀잔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에게 이미 지도교수님의 핀잔이나 박사학위 등에 대한 것은 이미 사치 그 자체였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빨리 취직을 해서 우리 가족의 열악한 경제상황에 도움을 주고 새로운 집도 얻게 할 것인가에 저의 생각은 온통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저의 동기 나머지 2명도 박사과정으로 가지 않고 석사로 졸업하고 취직하기로 결정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저는 지도교수님의 박사과정 진학을 하라는 종용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상당기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결심이 확고하고 가정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신 교수님의 포기가 있으셨고 우리 대신 졸업생 중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할 선배 2분을 찾으신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KAIST 석사들은 대기업에서 모셔가는 분위기여서 한 사람 당 2-3개 회사의 오퍼를 쉽게 쥘 수 있었고 이 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 (?)을 제시하는 곳으로 골라서 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조건이라면 대부분 박사학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어떤 회사는 2년 입사 후 바로 박사과정을 보내주는 조건도 있었고 해외 박사과정 유학을 조건으로 내거는 회사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2군데 정도의 오퍼를 이미 받은 상태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 보다는 나의 지도박사과정 선배를 통해 알게된 대기업에 있는 어떤 박사님이 Nucleoside 신약개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회사는 우리학교에 리쿠르터를 보내지 않아서 공채를 통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5년간 회사가 투자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회사의 실적도 좋지 않았고 당연히 월급도 다른 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좋은 회사는 이와 정반대의 회사였습니다. 소위 가장 좋은 회사는…

  • 월급이 많은 회사, 보너스도 많은 회사
  • 일은 상대적으로 적은 회사
  • 대기업
  • 박사학위 등등 소위 조건이 좋은 회사

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저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특히 저의 상황이 큰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회사는 타이어 회사로 고분자화학연구를 하는 회사였는데 조건은 놀랍게도 1년 입사 후 박사과정 진학이었고 월급도 가장 높았습니다.

결정을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저는 갑자기 하나님께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까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마음만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요일에 KAIST안에 있는 과학원교회에서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예배에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 예배는 졸업할 학생들을 위한 “졸업예배“였습니다.

이 졸업예배의 목사님의 설교제목은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 이셨고 골로새서 3장 22절-24절 말씀으로 제가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4절 말씀: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날 목사님의 말씀은 세상의 기준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대략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하나님이 여러분을 교육시키시고 훈련시켰음을 기억하십시오.
  • 자신의 전공에 맞는 회사가 중소기업이거나 월급이 적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회사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 회사가 고용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용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박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가야할 회사가 곧바로 명확하게 정해져서 다가왔습니다.

바로 Nucleoside를 하는 박사님이 계신 대기업 – SK Chemicals 였던 것이죠. 바로 이 회사가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회사라는 것이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제가 한 연구가 Nucleoside 연구였고 이 회사는 당연히 일은 많고 월급이 적은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그 회사 인사과에 연락을 해서 면접 일정을 잡았고 아무런 조건이 없는 이 회사에 저는 조건없이 공채를 통해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Nucleoside 박사님이 저를 받아주셔서 저는 그 연구실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고 5년간이나 다닐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제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이사의 교체가 있었고 그 이후 제가 근무한 5년간 회사는 그동안의 나쁜 실적을 만회하고도 남는 우수한 실적으로 회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얼마간의 저축은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를 아버지께 드려서 아버지가 그 이후 사업을 다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에 다닌지 3년만에 모은 돈과 회사를 통해 얻은 대출을 합쳐서 우리는 사당동에 방3개가 있고 화장실도 별도로 모든 것이 잘 정돈된 빌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좋았던 것은 회사에 다닌지 몇년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가 아버지가 신학대학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목회의 길로 가지 않고 사업의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어머니는 아버지나 우리들 중에 목회자가 나오게 해 달라고 오랜동안 기도하고 계셨는데 아무도 목회에는 가지 않게 되어서 고민을 하시고 계셨는데 그러던 중 어머니 자신이 목회를 하라는 말씀을 받으셨다고 하시면 어떤 여성목회신학원 원서를 가지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집까지 이사하게 되시니 감사의 마음이 너무나 크신 것이었죠.

먼저 아버지께 이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셨지만 아버지는 이미 상황 때문에 안된다는 거절을 당하신 상태였는데 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공부에 대한 좌절을 항상 마음에 걸려하던 터라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저는 어머니께 제가 등록금을 내어 드리겠으니 하시라고 하고 첫번째 등록금을 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첫학기를 즐겁게 하셨는데 그 중에 그 소식을 들으신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이 제안하셔서 어머니께서 교회의 전도사로 일을 하실 수 있게 되고 그 월급을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하실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해 전 말기암으로 3-4개월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병상을 지키며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이런 저런 과거 얘기를 하던 중에 어머니께서 이 신학원 공부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머니의 납골당에는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신학대학원 졸업사진”과 학사모 사진과 학위증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우리 어머니는 중졸이시라고 얘기하는데 제 아내가 고쳐 말하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어머니, 대학원 졸업이셔!”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고용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여러가지로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의 삶이 점차 나아짐을 통해서 분명히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

이 말씀은 저의 삶의 모토가 되었고 독일과 미국에 살게 될 때에도 지역과 고용주의 변화와 무관하게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

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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