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살면서 주연으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조연으로 성공하는 것은 주연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배우 임현식님은 그런 배우이시다. 오랜 무명기간 동안에도 연기를 위해 애쓰고 목축업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고 노력하셨다는 것을 보며 인생의 선배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명생활이 5년여 정도하셨다고 하는데 말이 5년이지 그 기간 다른 조연들도 얼마나 많았을까?
그것을 버티면서 단역으로 적은 출연료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고 인간미로 버티며 결국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아낸 분이다. 이제 송추에서 세딸들과 사위들, 손주들과 지내신다.
나누는 삶을 살고 계신다고 한다. 수많은 조연역활로 살아오시면서도 나누는 삶에는 주연으로 사신다.
나의 삶도 어쩌면 주연보다는조연일지 모른다. 공부하며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노력 가운데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기회를 잡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즐겁다.
내 연기와 인생의 진정한 스승은 ‘어머니’ – MD저널 12/28/2015
탤런트 겸 배우 임현식(70)은 47년째 국민들을 즐겁게 해준 ‘연기의 장인’이다. 1969년 2월 MBC 1기 공채탤런트로 데뷔,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 아빠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감초연기자이자 인기연예인이다. 털털한 인상에 맘씨 좋은 이웃집 동네아저씨 같은 풋풋한 연기로 사람냄새가 물씬 난다. 지난 10월 3일 방송된 MBC TV프로그램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연기장인 임현식의 한 지붕 세 가족편)에서 그의 일상생활이 공개돼 눈길을 모았다. 방송, 영화 등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탤런트’ 임현식을 서울교대역 부근 한국전립선관리협회(회장 권성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임현식을 처음 만난 기자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를 잘 봤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서동자, 향년 53세)에 대해 그리운 마음을 드러냈다. “2004년 9월 29일 오후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사였던 아내는 힘겨운 투병 중에도 소아암 환아(患兒)들을 보살폈습니다.”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방송에서 임현식은 딸들과 함께 아내가 잠든 묘를 찾았다. 그는 TV드라마 ‘대장금’을 찍을 때 중간 중간 짬을 내어 병석의 아내에게 갔다 오곤 했다. 그는 “아내가 암센터에서 머리를 깎고 누워있는데 매주 나가 연기할 건 해야 했다. 연기는 다 되더라. 내가 무당인가 싶었다”고 미안해했다.
임현식은 딸 셋(임남실, 쌍둥이인 임금실?임은실)을 뒀다. 배우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떠나보낸 그는 혼자서 세 딸을 잘 키워 모두 결혼시켰다. 설, 추석 등 아내의 빈자리로 쓸쓸하게 느껴지려고 할 때면 딸과 사위, 손주(5명)들이 그의 송추 집으로 모인다.
아내가 남겨준 ‘선물 같은 가족’들이 있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교수인 첫딸은 세 아들의 엄마다. 둘째 딸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석사학위를 땄다. 큰 사위는 교수며 둘째사위는 미국식품회사 한국지사, 셋째사위는 LG전자에 다닌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송추 한옥에 홀로 남은 임현식은 2013년부터 둘째 딸 가족과 살고 있다. 요즘은 미운(?) 7살짜리 손자(주환)는 임현식을 미소 짓게 하는 꽃이자 짝꿍이다. 그는 넓은 마당이 딸린 고풍스러운 한옥에 살고 있다. 푸른 나무들로 뒤덮여있어 자연친화적 분위기가 난다.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전원주택생활을 즐긴다.
지금의 한옥은 어머니(배안순 권사, 1922년 6월 4일 전남 벌교 태생, 전남여고 졸업)를 모시기 위해 1999년 지었다.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지내시라고 마련했지만 어머니는 한옥에서 2년 반밖에 지내지 못하고 2002년 9월 9일 뇌졸중(향년 81세)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 임현식 위해 헌신한 어머니
지금의 ‘국민탤런트 임현식’이 되기까지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외아들을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어머니가 원군이자 큰 힘이 돼준 것이다.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임병하)가 6?25전쟁 때 33살의 나이로 실종되면서 26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였다. 음악선생님이어서 아들에게 음악공부를 많이 시켰다.
어려운 살림에도 비싼 일제전축을 사줄 만큼 아들을 위했다. 외가인 광주시에서 초·중·고를 다닌 임현식은 학창시절 바이올린을 배워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어머니를 따라 영화관에도 자주 드나든 그는 고교시절 연극반활동을 했다. 그가 연기자를 꿈꾼 건 자연스러웠다.
“어머니는 동네 철길에서 가요, 가곡, 이탈리아 민요 등을 곧잘 부르곤 했어요. 내가 탤런트가 된 것도 어머니의 후광으로 그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고교 3학년 때 그의 대학진학 목표는 연예인이 많이 나온 한양대 연극영화과였다. 하지만 성적이 중간정도라 어머니의 걱정이 컸다. 어머니는 한양대 교수를 찾아가 “아들의 전망이 어떻겠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 입시경쟁률은 20대 1이었다. 그는 “차범석, 김정옥 등 당시 쟁쟁했던 유명극작가들의 추천도 받아 여러모로 유리했다”고 회고했다.
임현식은 제대 후 연극 단역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힘들거나 흔들릴 때 마다 서울 자취집으로 꾸준히 보내준 어머니의 편지가 큰 힘이 됐다. “나는 너의 밑거름이 되겠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노력중이다. 부디 네가 가는 길을 훌륭히 걸어가라”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격려 글에 흔들리지 않고 연기자 길을 꿋꿋하게 걸어올 수 있었다. 임현식은 “어머니는 내 인생, 연기의 스승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런 어머니가 광주에 있는 땅까지 정리하고 상경했다. 무명연기자인 아들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임현식은 그때 드라마출연으로 시골장면을 촬영할 때 지금 사는 지역을 수시로 다녔다. 서울서 1시간 거리라 어머니와 함께 둘러봤는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6611㎡의 땅을 사고 어머니와 살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3년이다. 그는 젖소를 키우고 싶었다. 어머니가 동물을 좋아한 이유도 있었다. 암송아지 5마리를 샀다.
그리고 어머니가 목부(牧夫) 1명을 두고 낙농을 시작했다. 그도 ‘낙농개론’ 책을 구해 읽으며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는 빈 땅만 있으면 소에게 먹인다고 옥수수를 심을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 그렇게 한 3년쯤 지나자 젖소도 늘고 형편이 나아졌다.
힘들었던 무명시절…1978년 연속극 ‘당신’에서 빛 봐
임현식의 무명시절은 무척 힘들었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3학년 2학기 때 ‘극단 광장’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1년 반 동안 단역, 엑스트라로 활동하다 MBC 공채탤런트 합격 후 일주일이 지나 ‘수양산맥’이란 드라마의 포졸로 처음 출연했다.
그마저 A도, B도 아닌 ‘포졸F’였다. 수십 명이 입었던 포졸 옷에다 수염도 달아주지 않았다. 그 때 첫 대사는 “네!”란 한 마디였다. 게다가 가슴을 찌르는 말까지 들어야했다.
“대충 서 있어라!”였다.
그는 ‘그래도 하란 대로 해야지’라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눈물이 났다. 그 뒤 ‘수사반장’에서도 도둑 같은 단역이나 맡는 등 안 풀려도 너무도 안 풀렸다.
출연료를 몇 푼 받으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나는 왜 이럴까” 한탄하기가 일쑤였다. 처음 5년간은 무명연기자로 고생했고 부업으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실하고 싹싹했던 임현식은 연예계 선배나 PD 등으로부터 동정표(?)를 많이 얻었다. 드라마배역으로 활동하던 중 기회를 잡았다.
1978년 김수현 작가의 일일연속극 ‘당신’에 출연하게 돼 끼를 발휘, MBC 연기대상 조연상을 받고 자신감을 얻었다. ‘한 지붕 세 가족’도 만났다. 1986년부터 순돌 아빠로 출연, 평범한 서민가장의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광고모델섭외도 줄을 이었다. 원래 방영계획은 1년이었지만 높은 인기로 7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순돌 아빠 역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SBS가 1992년 개국했다. 그는 SBS드라마 출연을 위해 MBC소속에서 벗어나 자유 신분(프리)이 되려고 했다. MBC가 반대했다. 결국 미움을 사 MBC를 떠났고 방영 중이던 ‘한 지붕 세 가족’에서도 이사 가는 걸로 퇴출당했다.
그럼에도 임현식은 매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MBC는 물론 KBS에도 출연하게 됐다. 명품조연으로 이름난 그는 ‘한 지붕 세 가족’, ‘허준’, ‘대장금’, ‘모래시계’, ‘약속’, ‘영웅일기’, ‘임꺽정’, ‘대물’, 영화 ‘튜브’, ‘라이어’, ‘미녀는 괴로워’, ‘유나의 거리’ 등 1000여 편의 드라마와 14평의 영화에서 감칠맛 나는 토종연기를 펼쳐 팬들의 사랑이 대단했다.
소탈하고 능청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그는 “그 같은 성공도 자식이 좋은 배우가 될 것으로 믿고 꾸준히 밀어준 어머니 덕분”이라며 “오직 저만을 위해 살다 가셨다”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나눔과 베푸는 삶, 사랑실천에선 ‘으뜸주연’
명품조연으로 유명한 임현식은 베푸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나눔과 이웃을 향한 사랑실천에선 ‘으뜸주연’이다. 올 3월 2일 화순전남대학교병원을 찾아 소아암 환아들을 위해 써달라며 1000만원을 기부했다. 화순전남대병원의 초대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2007년에도 1000만원을 기탁한 바 있다.
소문난 애처가였던 그는 2004년 9월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치료받았던 국립암센터(경기도 고양시)에도 1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욕심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70인생을 살면서 드라마 일에만 신경 썼다. 더러 좋은 배역을 맡지 못하면 섭섭하기도 했고….그러나 이젠 그런 것에서 벗어나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그리운 사람, 좋을 일들을 되돌아보고 싶어요. ‘외로움도 즐거움’이란 말이 있듯 마음을 비우고 많이 생각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임현식, 건강관리 이렇게 한다!>
지난해 50년 가까지 피웠던 담배 끊고 몸 챙겨
집 부근 텃밭 가꾸며 산책…무리한 운동은 삼가
탤런트 임현식은 지난해 9월 15일 심근경색 진단 후 20살 때부터 50년 가까이 피워온 담배를 끊고 금연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그는 지난해 허리디스크와 급성심근경색으로 방송활동을 멈췄을 정도로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드라마출연 등 거듭되는 방송 일에다 수시로 바뀌는 촬영일정, 여기저기서 부르고 만나자는 사람들이 많아 운동을 규칙적으로 할 수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허리디스크로 잘 움직이지 못하고 스트레스까지 겹쳐 합병증으로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8개월여의 약물치료 끝에 완쾌됐지만 그는 요즘 건강에 아주 신경 쓴다.
집 부근 텃밭을 가꾸고 가벼운 산책도 하며 몸을 추스른다. 될 수 있는 대로 심한 운동을 삼간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한다.
“병을 고치기 힘든 이들을 돕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연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돈도,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의사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습니다.”
2000년 경희대로부터 한의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012년 봄 사과나무 60그루를 심었다. 잘 길러서 상품(上品)은 조합원으로 가입한 장흥농협을 통해 팔고 나머지는 지인들과 나눠먹을 꿈을 꿨으나 올해 농사는 실패했다.
벌레에다 산비둘기, 까치들이 쪼아 먹어 과실을 망쳤다. 하지만 내년엔 꼭 성공시킬 각오다.
[임현식 주요 약력]
*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출생(1945년 12월 31일)
* 광주광역시 살레시오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1964학번), 경희대학교 한의학 명예박사(2000년)
* 1969년 2월 MBC 1기 공채탤런트로 연예계 데뷔
* ‘한 지붕 세 가족’, ‘허준’, ‘대장금’, ‘멋진 친구들’, ‘모래시계’, ‘올인’, ‘타짜’ 등 1000여 편의 드라마 및 ‘라이어’, ‘미녀는 괴로워’, ‘올드미스 다이어리’ 등 영화 출연
*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1990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1991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2004년) 등 수상
* 호남대학교 다매체영상학과 겸임교수, 중국 후난(湖南)대 겸임교수 역임(2006년 8월~)
* 서울 신설동 남서울예술종합학교 부학장 겸 연기예술학과 교수 역임
* 국민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 소소심(소화기?소화전?심폐소생술) 홍보대사, 착한운전 홍보대사, 양주시 홍보대사
[조연의 품격] 빛나는 조연, 애드리브의 달인 배우 임현식 – 월간조선 2017년 10월
“옛날 국립극장 연습실 벽에 ‘먼저 인간이 돼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어.
당시엔 아주 책임감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게 맞는 말이었어.
그 말이 나를 사람 냄새 맡을 줄 아는 배우로 만들었어요”
⊙ MBC 공채 1기 탤런트 출신…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고 뻔뻔한 조연
⊙ “애드리브? 극 중 상황에 적합한 ‘딱 한 줄’이 생각날 때 하는 거지”
⊙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보다 ‘제값 못하는 배우’ 소리를 듣는 게 더 무서워”
⊙ 〈춘향전〉 〈별주부전〉 등의 판소리 가사 구해 읽고 자신만의 해학적 스타일 창조
⊙ “대충 눈치로 연기하면 비겁한 것밖에 안 되고, 남의 것 모방하는 것밖에 안 돼”
배우 임현식(林玄植·71)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해 본다.
해방둥이(1945년 12월 31일생), 음대 지망생(학창시절 바이올린을 켰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65학번(1년 재수를 했다), MBC 공채 1기 탤런트(당시 7차 면접까지 경쟁이 치열했다), 일일 연속극 〈당신〉에서 김수미의 남편(1978년 MBC 연기대상에서 조연상을 탔다), 순진한 생계형 잡범(드라마 〈수사반장〉), 이병훈 PD와 김종학 PD, 포교 갑봉이(드라마 〈암행어사〉), 무려 7년을 연기한 순돌이 아빠(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능청스런 애드리브의 병부잡이 임오근(드라마 〈허준〉), 홍춘이(최란)~, 갈 곳 없던 장금이를 받아준 수라간 남자숙수 강덕구(드라마 〈대장금〉)까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셀 수 없이 많다.
아차! 한 가지 더. SBS 드라마 〈타짜〉에서 전설의 평경장 역은 또 어떤가. 아귀와 짝귀가 2세대 타짜라면, 평경장은 전설의 1세대다. 그가 극 중 읊은 대사를 잠깐 옮겨본다.
“일월 솔 외로운 내 마음, 이월 매화에 매어놓고, 삼월 벚꽃 스산한 내 신세, 사월 흑싸리 축 늘어져 있네. 오월 난초에 날아든 저 흰나비는 유월 목단에 웬 초상인가. 칠월 홍돼지 홀로 누워, 팔월 공산 허송할 제, 구월 국진 굳은 내 마음, 시월 단풍에 우수수~ 지네. 동지 외동에 오신단 님은, 섣달 장맛비에 갇혀만 있구려.”
임현식은 코미디언보다 더 웃기는,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고 엉뚱하며 뻔뻔하기까지 한, 그리고 주연을 빛나게 하는, 주연보다 더 인기 많은 조연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송추계곡 근처)에 한옥을 지었지만 여전히 서울을 바라보며 캐스팅을 기다리고 있다.
“요즘 노인네가 볼 프로그램이 없잖아. 예능 계통으로 나오는 애들이 반복적으로 일주일 내내 5~6개 프로(그램)씩은 하는 모양이야. 60 넘어 퇴직해서 2~3년 지나봐요. 진짜 별 볼 일 없어져. 손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볼 수 있는 사람 내 나는 이야기(프로그램)가 없어요. 요즘 노인네들 다닐 수 있는 곳이 지하철밖에 없다잖아. 그런 사람 위한 프로를 했으면 좋겠어. 노인 80% 이상이 허송세월하며 늙어 죽길 기다리면서 짜증만 내고 있다고….”
― 선생님은 꾸준히 활동하시잖아요.
“나도 요즘은 캐스팅이 안 돼. 작년부터 날 안 써줘. 우리 또래 (캐스팅이) 되는 사람은 이순재씨, 박근형씨 하고 그 누구야, ‘네가 게맛을 알아?’ 하던….
― 신구 선생님?
“그래 신구씨. 겨우 그런 분들이지. 60 넘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지면 갑자기 일들이 없어지니까….”
― 연극 쪽으론 어떠신가요.
“하자고 제의는 오는데, 매일 나가 연습하고 싶지 않아. 연극은 팀워크가 중요하니까,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잖아요. 선배라고 안 나가고, 역할이 적다고 안 할 수 없고…. 젊었을 때는 TV 때문에 거의 연극을 못했어. 40년 가까이 무대에는 못 올라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글쎄… 뮤지컬 같은 것은 하고 싶지.”
― 영화는요.
“작년에 한 편 찍었어요. 제목이 〈삐빠빠 룰라〉라고 박인환·신구씨 하고 셋이서 찍었어. 내용이 뭐냐고? 노년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인데 저예산 영화야. 지난봄에 개봉하려다 못하고, 올 추석쯤 개봉될 거라고 해. 얼마 전에 보충 촬영도 다시 하고….”
그러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영화를 찍은 지가 1년이 넘었는데 개봉도 안 하고…”라고 했다.
그에게 “왠지 결혼 주례 부탁을 많이 받으실 것 같다”고 했더니 “거절을 못하겠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음… 조연출이나 조명, 카메라 담당하는 후배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더라고. 최소 10년은 넘게 같이 일한 사이니까. 지금까지 그럭저럭 100번 정도 주례를 섰지, 아마? 그래서 양주 100병이 생기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하하. 덕분에 주말과 휴일,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없었지.”
그는 대학시절인 1966년 연극무대에 처음 올랐고 69년 MBC 1기 공채 탤런트가 되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다. 연기경력이 햇수로 따지면 50년이 넘는다.
“주로 TV 드라마 연기를 했는데 언제나 극 중 역할과 함께 살았어요. 매주 대본이 나오면 ‘이런 식으로 연기해야지’ 하면서 살았어. 자동차 속에서나 길을 걸을 때도 연기 생각을 했어. 어떨 때는 자기 역할에 대해 꿈도 꿔. 배우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아요. 그래야 돼. (연기와) 같이 살아야 돼.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연기를 했어. 그래도 기가 막히게 연기를 해냈다고.”
임현식의 애드리브 연기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다. 독특한 개성이 없으면 나올 수 없다. 리액션이 좋아야 하고 상대가 당황하지 않게 너무 튀어서도 곤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의 긴장감을 확 푸는, 재미와 위트를 주어야 제맛이다.
“애드리브? 극 중 상황에 적합한 ‘딱 한 줄’이 생각날 때 하는 거지. 재미있고 상대가 당황하지 않아야 해. 당황하면 NG지 뭐. 애드리브를 할 때 감독 입에서 OK가 안 나오면 썰렁한 거지. 애드리브를 한다고 해서 다 OK 사인이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입속에 침이 도는 것처럼 해보는데, 선택이 안 되고 (감독이) ‘있는 대로나 잘 합시다’ 그러면 섭섭하지.
고(故) 김종학 감독이 내 애드리브를 무지 좋아했어요. 내 대본에 빨간 볼펜으로 수정한 흔적이 있으면 좋아했지. 대본이 깨끗하면 ‘형! 어제 술 먹었구먼’ 그래. 이병훈 감독도 날 그렇게 좋아했어. 내가 애드리브를 하면 다 하게 했어. 그래서 드라마 〈허준〉에서 병부잡이 임오근이란 역할도 만들어 낼 수 있었어.”
― 임오근 대사 중 상당 부분이 애드리브인 거죠.
“많이 했지. 이병훈이 어떤 감독입니까. 철저한 감독인데 임오근 역할에 재미를 주려고 무지하게 애썼어. 나보다 한 살 나이가 많은데 서울대 농대를 나왔어. ‘산림과나 임업과에 다니지 왜 방송국에 왔냐’고 내가 면박을 줬어. 하하하.”
그는 〈허준〉의 임오근 캐릭터가 마음에 드는지 이야기를 또 꺼냈다.
“임오근 역할은 아직도 사랑스러워. 나하고 최완규 작가, 이병훈 감독, 셋의 합작품이랄까. 내가 키워 먹은 역할이랄 수 있지.”
― 허준은 시종 진지하지만 임오근은 극 중 긴장을 푸는 역할이지요.
“사실 임오근의 수명은 허준이 궁궐에 들어가면서 끝이야. 원래 대본에 그렇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내의원 시험에서 허준더러 ‘답안지를 쓸 때 겨드랑이를 들고 써주게’ 해서 커닝을 통해 궁에 들어간 거지. 말이 돼요, 그게? 하하하.”
― 대본엔 임오근이 내의원에 들어갈 운명이 아니었던 거네요.
“원래는 없었지. 진지하게 살아가는 허준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아니, 균형미까지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역할 비중이) 괜찮았어.”
― 배우 김주혁씨가 허준으로 나온 〈구암 허준〉도 봤는데 재미가 예전만 못하더라고요.
“이병훈 PD가 〈허준〉을 잘 만들었어. 조경환 같은 조연들도 좋았고….”
당시 조경환은 어의(御醫) 양예수로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이순재)와 불꽃 튀는 연기대결을 보여주었다.
“(조경환은) 한양대 연극영화과 1년 후배였는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어. 좋은 친구였어….”
― 주연 연기와 조연 연기의 차이가 있나요.
“주인공은 프로그램을 지켜나가는 주춧돌 같은 존재지. 정글이나 뻘밭(개펄)을 헤쳐 나가는 힘이 있어야 하고 또 배우로서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해야지.
반면 조연은 주연을 뒷받침하면서 반전의 브리지(bridge)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 시청자(관객)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들고 ‘저렇게 되려고 이렇게 했구나’ 하는 느낌도 주면서 극을 죽 끌고 나가는 존재지. 조연 연기로 인해 주인공의 힘을 약하게 만들면 안 돼. 드라마 〈타짜〉에서 평경장 역을 맡았는데 내가 너무 튄 거야. 내가 나오는 장면이 너무 많았어. 왜냐, 재미있게 연기하니까. 조연에게 관심이 너무 쏠리면 안 되거든. 〈타짜〉가 5, 6회를 넘어서면서 비중을 줄였어.”
임현식은 “미니시리즈나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주인공을 하긴 했지만, 주연이든 조연이든 내 역할에 대해 ‘출연료 아깝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현식, 뭐 필요 있겠어?’ 하는 작품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살아오면서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보다 제값 못하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게 더 무섭다는 신념으로 살았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하지만 쉽게, 잘 만들어진 인절미처럼 먹기 좋게’라는 의미처럼 시청자들 앞에 서려고 애썼지요.”
― 후배 배우를 볼 때, ‘싹수 있는’ 배우의 특징은.
“자기가 연기를 잘하고 인기가 있으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싸가지 없는’ 친구 중에 잘된 배우는 없어요. 잘되고도 망한 배우 많잖아.
배우는 캐스팅을 잘 받아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아. 물론 연기도 잘해야겠지. 이 계통에서 캐스팅을 잘 받으려면 우선 인간이 돼야 해. 겸손하고 붙임성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내가 학교 다닐 때 화학, 수학, 영어는 못했지만 나머지 과목은 다 잘했어. 책 읽기를 그렇게 좋아했고. 대학시절에는 일주일에 희곡 한 편씩은 꼭 읽었거든. 1년이면 40~50편씩을 읽었어. 지루하고 어려운 희곡집도 계속 읽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져요.
배우는 아는 게 진짜 많아야 돼. 그래야만 (연기를) 풀어낼 수 있는 순발력이 생겨요. 대충 눈치로 하면 비겁한 것밖에 안 되고, 남의 것 모방하는 것밖에 안 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기를 하려면 책을 읽는 수밖에 없어요. 그땐 책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볼 것이 많잖아.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섭렵해야 해요.”
이 대목에서 배우 임현식의 연기철학이 묻어 나왔다.
“배우는 새로운 것을 빨리 섭렵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있어야 돼요. 성품도 좋아야 하고 눈치도 빨라야 해요. ‘이런 상황에선 저런 것은 피해야 하는구나’ ‘저 감독은 이런 성격이네. 그러니 이렇게 해야겠네’ 하고 말이지. 그래야 캐스팅이 잘돼. 조금이라도 싸가지가 없이 행동하거나 자기보다 덜 유명한 배우를 하찮게 여기면 안 돼. 사랑이라는 것도 우러나서 하는 것도 있지만 연습을 통해 되는 것도 있어.
옛날 국립극장 연습실 벽에 ‘먼저 인간이 돼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어. 당시엔 아주 책임감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게 맞는 말이었어. 그 말이 나를 사람 냄새 맡을 줄 아는 배우로 만들었어요.”
“《셜록홈즈》를 읽고 자극받곤 했어”
배우 임현식은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다. 해방둥이 중에는 기자 조갑제, 작가 고 최인호, 가수 조영남, 영화감독 이장호, 정치인 이재오, 배우 김을동·선우용녀·박인환·김기현·최주봉·장용·남성훈 등 성공한 이가 많다.
그는 전북 순창에서 자라나 전라도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4년 광주 살레시오고를 졸업한 뒤 1년 재수를 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해방둥이? 말뿐이지, 그냥 열심히 살았어. 경쟁이 치열했고, (연기로) 데뷔조차 어려운 시절이었어. 내 자식은 죽으나 사나, 똥밭을 구르더라도 서울에서 성공시키려고 교육열이 높았지. 해방둥이 중에 자수성가한 이도 있지만, 별 볼 일 없이 몰락한 사람도 많아.
난 학창시절 끼가 있었어. 대립관계에 있던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 도처에 파벌이 있었지만 이쪽하고 친하고, 저쪽에서도 어울렸어.
남달랐다면 독서를 좋아해서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며 ‘아, 이럴 땐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각색도 했어요. 어떨 때는 그런 상상을 하며 잠을 설쳤어. 탐정소설인 《셜록홈즈》를 읽고 자극받곤 했어. 홈즈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고 최소한 왓슨 같은 조연 연기를 해도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하하하.”
― 재수를 해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갔다지요.
“대입에 떨어질 때는 연세대 정외과를 가고 싶었어. 그땐 정외과가 의대 성적하고 비슷했어. 이듬해 마음을 고쳐 먹고 연극영화과에 갔는데 당시 한양대 외에도 중앙대, 서라벌예대에 연영과가 있었어. 중앙대는 뭐랄까 좀 ‘시크’한 맛이 없어서 한양대를 갔어. 그땐 한양대 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막상 연영과에 갔지만 제대로 된 교재가 있나, 배울 게 없었어. 그때 연기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고 러시아 출신 연출가인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i·1863~1938)의 책을 일본에서 구해 번역해 읽었어. 어머니(故 裵安順)가 스타니슬랍스키 일본판 이론서를 1년간 번역하셔서 내 책꽂이에 꽂아주셨어. 어머니가 일제시대 때 소학교 교사여서 일본어에 능하셨거든.
번역된 원고를 등사기로 프린트해서 친구들과 나눠 읽었어요. 배울 것이 없었고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고, 학교 다닐 때 불만이 많았어. 어머니는 내 장래가 걱정이 되어 한복을 얌전히 차려입고 한양대의 그 높던 ‘150개 계단’을 올라 주임교수를 ‘인터뷰’하셨지. 아주 유명한 일화야. ‘우리 아들이 졸업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얼마나 아들이 시원찮았으면….”
―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모양이네요. 장남이신가요.
“나에 대한 기대가 컸고 헌신적이셨어. 어머니는 나 하나를 낳으시고… 아버지(故 林炳夏)는 6·25 당시 《세계일보》 기자셨어. 일본 니혼대 정치학과를 나온 지식인이셨고. 8년간 기자생활을 하시다가 어머니와 스물일곱 때 결혼하셨어. 내가 여섯 살 때 6·25가 발발했는데 동료 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러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어.
어머니는 일주일 후 돌아온다던 사람이 안 오니까, 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평생의 역할이었어요. 마치 소녀처럼 스물아홉부터 수절하셨어요.”
1969년 MBC 1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뽑혔지만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무명 연기자로 지내다 생활고 해결을 위해 양주 장흥면으로 이사를 했다.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농사와 목축업에 손을 댔다.
“양주 송추에 온 지가 1973년 6월에 왔으니까 44년쯤 됐어요. 서울에서 부질없이 집만 갖고 살면 뭣 하느냐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그래서 이곳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젖소도 키웠는데 다섯 마리로 시작해서 11년간 소를 길렀어요. 우유를 짜서 서울우유에 납품도 했어요. 어머니랑 나랑 둘이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어. 어머니와 같이 일하던 동네 아주머니도 지금은 다 돌아가셨어. 당신도 여든한 살 때 떠나셨어. 너무 부지런하셨어. 죄송한 마음뿐이지.”
다시 연기 얘기로 돌아가 보자. ‘신인배우’ 임현식은 당시 잘나가던 배우 신성일을 꿈꾸며 연기를 시작했다. 사실 모든 배우가 주인공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
“젊었을 때 나도 잘생겼어.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볼 때 7차까지 시험을 쳤는데, 마지막 관문이 사장 면접이야. 사장이 내게 그래요. ‘얼굴이 밋밋하지 않아?’ 하고. 사실 그렇게 평범했어요.
배우는 주연 같은 ‘이도령 과(科)’가 있고 조연 같은 ‘방자 과’가 있다고 생각해. 기왕에 탤런트가 됐으니 이도령 같은 주인공이 되길 바랐지.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탤런트에 합격하기 전까지 나를 사람으로 안 봤어. ‘저거는 큰아버지 계신 순창으로 내려가 정미소 일이나 하지, 배우가 뭐냐’ 그랬어. 몇 년간 무명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물론 나도 ‘이도령’ 같은 주인공 연기를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 표준말로 대사를 또박또박 말하고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할 수는 있지만 매력이 없었을 거야. 그러나 방자(조연) 역할로 선회하면서 내 끼를 발휘할 수 있었어.”
― 배우를 꿈꿀 때 롤모델이 있었나요.
“배우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신성일을 꿈꿨지. 나도 대학 다닐 때 신성일 영화는 빼놓지 않고 봤어요. 신성일처럼 젊고 힘이 넘치는 청춘의 심벌이 되고 싶었어. 난 언제 저렇게 될까… 하고 맹(멍)하게 있었다면 아무것도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정미소에서 쌀이나 빻고 살았겠지.”
― 이도령 대신 방자 역할을 잘 택했네요.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연기를 못했을 겁니다. 누가 뽑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 어머니는 아들이 방자 역할을 하는 데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어머니는 내게 ‘의젓하고 차분하게 (연기)하라’고 하셨어. 목소리도 착 내려 깔고 중후하게 하라셨어요. 어쩌면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내게서 ‘방자’가 아닌 ‘이도령’이나 ‘신성일’을 기대하셨는지 몰라요. 당시 그렇게 인기 있던 〈허준〉을 보시면서도 ‘저런 걸 보고, 뭘 잘했다고 사람들이 상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어. 하하하.”
그는 어머니 얘기에 신이 났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어머니도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좋아하시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몇 번이나 보셨는지 몰라. 아침 10시에 영화관에 들어가 밤 10시에 나오시는 분이니까.”
― 우리 아들은 그래도 〈허준〉의 주인공인 전광열쯤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아마 전광열처럼 주인공을 해야 우리 어머니, ‘광열이 때문에 우리 아들 밥 해주러 다니느라고 힘이 드네’라고 했을 것인데 하하하. 모임에 나가서 어느 분이 내 연기를 칭찬하면 ‘무엇이 그게 잘하는 것인가?’ 그러셨대.”
― 아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으셨든지, 일부러 그러셨든지….
“그런데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할 때 내 역할을 진지하게 보셨어. 나의 개방적인 연기가 어머니가 보시기에 불안하고 싫게 보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현식이는 철학이 있네’ 그랬어. 그러고 보니 〈한지붕 세가족〉을 7년간 했는데, 그땐 어떻게 해야 남들과 다른 연기를 할까 고민하던 시절이었어. 그것이 지금의 캐릭터를 찾고 살에 살을 붙이고 (캐릭터를) 구상해 나갈 수 있게 했어. 나의 연기방식을 키워나가는 데 자신감을 갖게 한 거지.”
그는 당시 자신만의 연기방식을 찾기 위해 전북 부안, 전주, 순창까지 내려가 〈춘향전〉 〈별주부전〉 등의 판소리 가사를 직접 구해 읽었으며, 자신만의 해학적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고 그 내용이 재미있잖아. 그런 대사를 마음껏 구사하려고 고민했어. ‘방자’는 할 수 있지만 ‘이도령’은 마음껏 대사를 못하잖아요.”
“배우는 너무 잘생겨도 싫어해. 난 평범하니까”
― 배우 중 라이벌은 누군가요.
“내 연기의 라이벌… 임현식이 느끼는 라이벌은 없었어. 나는 자신만만했어, 누구에게든지. 초창기 백일섭씨는 나보다 잘나갔지. 내가 고생할 때 말이야. 그에게 처음에는 (내가) 꿀렸는데 중간에 시들해졌어.”
― 좋아하는 음식은.
“다 좋아하는데 겉절이 김치는 안 좋아해요. 겉절이는 왠지 풀 냄새가 나서…. 아무리 젓갈 넣고 해도 그래. 김장할 때 포기 배추 찢어 입안에 넣어주면 먹긴 해도 별로야.”
제대로 익은 그의 연기처럼 묵은지를 좋아한다는 얘기였다.
― 좋아하는 배우는.
“열심히 하고 능력 있는 배우가 좋아. 20년 전에 송강호를 봤는데 요즘엔 너무 커버려서 완전히 어른 노릇을 하고 있어서 이상하더라고. 연기자로선 좋긴 한데, 음… 아직… 마음으로 안 해. 분위기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모습도 보이고…. 역시 좋아하는 배우는 영화 〈대부〉의 로버트 드니로지.”
몇 달 전 임현식은 알레르기 천식으로 입원했다. ‘호흡 곤란’을 느껴 산소 호흡기를 사용할 정도로 한때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임현식의 입원 사실이 전해지자 건강을 걱정하는 인터넷 댓글들이 넘쳐났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피우던 담배를 아예 끊어 버렸다.
“어렸을 적부터 잘 먹고 잘 까불고 그랬어. 평생 건강을 자신하며 밤낮없이 일하면서 살았어요. 당시엔 나 자신을 아껴가며 연기한다? 그런 배우는 없었어.
담배를 피운다는 것… 뭔가에 집중해 대사를 외거나, 연기 차례를 기다리는 긴장의 순간에, 그렇게 부질없이 담배를 피우고 다른 한 손으론 커피를 마셨어. 니코틴은 중독도 중독이지만 습관이 중독되니까. 허망한 느낌도 있고…. 지금은 금연 홍보대사가 됐어요. 담배 피우면 성교를 한 뒤 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랄까? 담배를 피우면 자신의 기를 죽이게 되는 것이지.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그런 느낌을 절대 가져선 안 돼요. 담배가 인생에서 손해라는 사실을 내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어요.”
― 걱정하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랐어요.
“귀여움을 시청자에게 많이 받았어. 질투를 하거나 날 시뜻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고…. 배우는 너무 잘생겨도 싫어해. 난 평범하니까… 그렇게 해(害) 줄 사람같이 안 보이잖아.”
― 어떤 배우로 기억되길 바라세요.
“동네에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바람처럼 지나가는 아저씨로 기억해 주면 좋겠어. 오래 기억 안 해줘도 괜찮아. 한 시대를 이웃들과 함께 웃고 함께 살았다는 것만 기억해 주면 좋지. 사람이 싸가지 없게, 아는 척도 안 하고 사는 분들이 많잖아.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