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8월 15일은 한국의 광복절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한국 (조선)은 광복을 맞게 되었고 내년은 광복 80주년이 됩니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수많은 분들이 우리의 마음에 계시죠. 상해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조당 조만식, 몽양 여운형 그리고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등 너무나 많이 계시죠.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조선을 완전히 말살시키려고 했죠. 그 선봉에 선 곳이 지금의 서울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교 였습니다. 경성제국대학교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이를 위해 조선의 정체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앞선 곳이 경성제국대학교 경제학부이고 시카타 히로시(四方博)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많은 통계와 자료를 수집하고 이론화 하는 일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경성제국대학의 이런 논리에 맞서서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과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 상학부에서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교수들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인 교수들을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서 한국독립을 위한 경제 이론을 위해 애썼고 흥업구락부나 조선어학회 등에도 관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좋은 연구 자료가 있습니다.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상과대학 교수들이 어떻게 경성제대 경제학 교수들의 논리에 맞서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논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경성제국대학교 법학부의 일본인 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가 조선인 항일운동가를 사택에 숨겨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 한국교육신문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0/7/2019
식민 지배의 최전선에서 일제의 식민정책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그로서 교사의 최정점에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집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1926년 개교 당시 25명에 불과했던 이들은 일제 말기까지도 법문학부 60명을 포함해 200명에 못 미치는 소수였지만 ‘국가수요(國家須要)의 학술’을 표방한 이들은 식민 기획의 이념을 창출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그와 명운을 함께 했다.
식민지 조선의 최고학부인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신분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혁명운동에 가담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는 이러한 점에서 주목된다.
그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교수로 부임한 것은 1927년 4월이었다. 이 대학에서 그는 법문학부 2회인 이강국(李康國)과 박문규(朴文奎), 최용달(崔容達) 등 조선인 학생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유물사관과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친 그는 이들이 만든 마르크스 사회과학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이처럼 반제운동과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에서 열렬한 활동을 하던 미야케는 당시 유명한 혁명운동가인 이재유를 자신의 동숭동 교수 관사 지하에 토굴을 파 37일 동안 숨겨준 일을 계기로 1934년 5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검찰에 송국돼 예심이 시작된 직후인 1934년 6월 그는 대학으로부터 휴직 처분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35년 1월 면직됐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및 범인 은닉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의 아내인 히데도 이재유를 숨겨준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같은 해 5월 24일에 취조를 받고 기소유예에 처해졌다. 석방된 이후에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일제 경찰의 지속적인 내사에 시달렸다.
미야케가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경성제대 졸업생으로 미야케의 제자인 최용달 등의 도움으로 쌍림동(당시 병목정)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34년 11월에는 조선인 운동자인 김윤회의 배려로 명동(당시 명치정 2정목)에서 ‘가메야(龜屋)’라는 고서점을 열었다. 그런가 하면 전술한 이종률도 그의 아내에게 2000원의 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형태로 적극 후원했다.
출옥 이후에 그는 아내가 경영하던 고서점을 정리하고 1937년 1월에 일본으로 돌아가 고물상(자동차 해체업)과 신문판매점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는데 특고(特高)의 감시는 패전까지 계속됐다.
‘사상사건’으로 투옥된 유일의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 그것도 대학교수라는 지위에 있던 인물이 사상사건과 관계해 투옥된 희유의 사건”이었다.
조선에서 그가 보낸 시간이 10년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대가와 지배 블록의 보복은 어둡고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실상,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의 일로 다른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들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국의 식민지 현실이 암담했으면 총독부 산하의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마저 도움을 주려 했고 또 그런 도움으로 이 가족이 평생 힘들게 살아야 했을까요?
그리고 일본인 교수마저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다면 당시 조선인의 고통은 더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우리 선열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