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저의 부모님 두분이 모두 돌아가셨는데요 80세가 연로하시는 고비인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75세에 너무 일찍 돌아가신 느낌이 나고 아버지는 87세에 돌아가셨는데 운동을 하셔서 마지막까지 건강하셨지만 그래도 자식된 도리로서 항상 보살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생각을 완전히 깨는 분이 계셔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래 영상을 본 이후 부터인데요.
[사람과 사람들] “산에 나를 버렸더니 산이 나를 살렸다.” 88세 청년의 독립선언 KBS 151104 방송

박상설님은 60대에 쓰러지셔서 죽으실 뻔 했는데 다행히 살아 나셨고 그 후로 홀로 여행을 다니며 사셨다고 합니다. 위의 방송은 박상설님이 88세때 영상인데 몸에 항상 시신기증유언서와 20만원을 지참하고 다니시고 가족들에게도 걷다가 죽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 방송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94세가 되었을 때 인문학 강의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강의 영상을 보면 94세라고는 느낄 수 없는 힘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그리고 생각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상설님은 COVID-19에 걸리셔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집은 가짜라고 여기던 자연전도사 박상설 선생 – 서울신문 12/31/2021
굳이 속세의 직업을 간추리면 칼럼니스트, 자연과 삶의 전문기자, 기계기술사 등이 명함에 적혀 있었다. 강원도 춘천에서 법무사를 부친으로 태어나 유복했던 유년을 보내며 책과 텐트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전쟁이 터져 육군 공병으로 입대, 총 대신 길을 냈다. 군인 생활 중 가장 좋았던 일을 텐트 생활로 꼽았다.
196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제대한 뒤 설계회사에서 일하며 학원 강사로도 일했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 부지를 외상으로 구입해 15평짜리 주택 10채를 지어 큰 수입이 생기자 경기 가평의 임야 30만평을 매입해 캠핑과 인문학 강의를 함께 했다. 37세 때였다.
‘캠프나비’란 이름의 농장은 지금은 강원도 홍천에 있다. 2000평이나 되는 농장에는 들국화도 피어나고 워크숍과 인문학 세미나가 열리는데 번듯한 건물은 없다. 비닐하우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와 어른이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고 도시형 캠핑을 거부하고 농장 곳곳에 텐트를 친다. 품는다.
세상을 뜨기 얼마 전까지도 산을 찾아 한뎃잠을 청했다. 자녀들에게 손가락질이 돌아갈 것을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홀로 살아간 지 40년이 다 됐다. 자녀들과 손주들과도 이메일로만 만났다.
환갑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의술이 아니라 자연과 벗한 것이 그의 목숨을 되살렸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고, 그러자 움직이지 않던 몸의 근력과 생기가 살아났다.
82세에 집을 떠나 길을 걷다 가난한 시골 기차역장 집에서 폐렴으로 누운 지 열흘 만에 저세상으로 떠난 레흐 톨스토이를 닮고자 했다. 아들딸들도 걷다가 죽고자 하는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해 늘 여정을 떠날 때마다 시신기증등록증과 돈 20만원정도를 목에 걸고 다녔다.
어느날 딸이 “아빠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 물었다며 “길을 걷다가 들국화가 눈에 띄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스쳐가듯 가끔씩 생각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캠핑은 인생에서 우러나와야만 제대로 발현되는 정서 운동입니다. 일평생 하고도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캠핑”이라고 답했던 그다.
그리고 이 분에 대한 글이 있는데요 돌아가시기 전에 박상설님과 근거리에서 뵐 수 있었던 최은자님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아, 박상설②] “시시한 이야기는 하지마!”···그 순간 무지개가
[아, 박상설④] 깐돌이 평생 꿈 ‘행동하는인문학살롱’ 드디어 태동

[아, 박상설⑤] 인문학밥상머리에 쏟아진 위대한 질문들
[아, 박상설⑥] ‘인형의 집’ 탈출해 조나단의 꿈으로 비상할 터
“지식을 얻으려면 독서를 하고, 지혜를 얻으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며, 더 큰 자유를 위해서는 자연에서 뒹굴어야 한다”
[아, 박상설⑦] “내 삶의 감독도 배우도, 나 은방울꽃임을 깨닫다”
[아, 박상설⑧] 소행성에서의 1박2일, 그리고 그는 떠났다
박상설님은 아메리카 대륙을 혼자 여행하고 유럽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아흔살 청춘’ 박상설의 유언장 “내 죽음 알리지 마라”···장례식 없이 해부학교실로
박상설님은 품 속에 항상 10가지 유언장을 품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박상설의 유언장
1. 사망 즉시 연세대 의대 해부학교실에 의학 연구용으로 시체를 기증한다.
2. 장례의식은 일체 하지 않는다.
3. 모든 사람에게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는다.
4. 조의, 금품 등 일체를 받지 않는다.
5. 의과대학에서 해부실습 후 의대의 관례에 따라 1년 후에 유골을 화장 처리하여 분말로 산포한다. 이때 가족이나 지인이 참석하지 않는다.
6. 무덤, 유골함, 수목장 등의 흔적을 일체 남기지 않는다.
7. 제사와 위령제 등을 하지 않는다.
8. ‘죽은 자 박상설’을 기리려면 가을, 들국화 언저리에 억새풀 나부끼는 산길을 걸으며 ‘그렇게도 산을 좋아했던 산사람 깐돌이’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9. ‘망자?박상설’이 생전에 치열하게 몸을 굴려 쓴 글 모음과 행적을 대표할 등산화, 배낭, 텐트, 호미, 영정사진 각 1점만을 그가 흙과 뒹굴던 샘골농원에 보존한다.
10. 시신 기증 등록증(등록번호: 10-344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과 02-2228-1663)
박상설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인생을 사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