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얼마 전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심포지엄 4회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강연 중에서 손유경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의 ‘노년의 시간과 견딤의 감각’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발표 중에서 “노년이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며 견디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 왔습니다.
손유경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노년의 시간과 ‘견딤’의 감각]
손유경 교수님의 논문 중 “죽음을 너무 많이 목격하고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노년의 삶이다”이라는 부분은 어쩌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저의 고등학교 친구들 중 몇명이 함께 대학을 다녔던 어떤 친구의 병문안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의리 있는 이 친구들이 함께 사진을 찍은 맨 끝에 마치 배경처럼 환자복을 입고 주사액을 넣는 관을 손에 낀 채로 V자를 그어 보이며 환우의 얼굴을 보여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얼굴이 검어지고 야위어 져서 이 친구가 누군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댓글을 단 친구들은 마치 모두 그 친구를 안다는 듯이 이름을 얘기하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더욱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가족들이 아직 이 환자 친구에게 병 상태를 얘기하지 않았다는 병문안을 다녀온 친구의 전언이었습니다. 환자복을 입은 친구가 사진을 찍기 위해 특별히 애쓴 것인지는 몰라도 사진 상으로는 그리 큰 병에 든 것 같지 않고 오히려 퇴원을 해도 될 것 같은 모습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친구는 말기암으로 이미 의료진이 가족들에게는 더 이상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들은 정작 환자 본인에게는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그 사실을 모르는 환자는 퇴원을 시켜 주지 않는다며 툴툴거렸다고 합니다.
이름이 궁금했지만 저는 이름을 굳이 묻지는 않았습니다. 괜스리 한국에 있는 고교친구들에게 외국 사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였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있고 몇일이 지나지 않아서 동기 카카오톡 방에 부고가 올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고장을 보고서야 마침내 이 친구의 이름을 알 수 있었고 저와 절친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입니다. 코로나가 있기 전에 수소문 끝에 저와 가장 친했던 초등학교 친구를 어렵게 찾아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다니는 은행에 이 친구도 다닌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를 따로 찾아가서 만났죠. 아마 30여분 정도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참 반가웠고 어렸을 때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저와 이 친구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야 말았군요.
부고가 올라온 후 친구의 장례식과 관련한 메시지들이 오고 갔습니다. 7명의 친구들이 운구를 위해 자원했다는 것, 장례식장에 다녀온 친구들의 사진들 등등
이제 한줌의 재가 된 친구의 유골함이 떠오릅니다.
내가 오늘 사는 이 날은 어떤 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
저는 오늘도 먼저 떠나간 친구의 내일을 살아내며 견디며 그 친구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반가웠다 그리고 편안하길 바래. 종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