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전에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1939년생 덕수가 1.4 후퇴 때 간신히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살게 되면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가족들을 지켜냈는가?에 대한 얘기들이 나옵니다. 황정민 배우가 연기한 덕수는 자녀들에게 어떻게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생명의 위험까지 불사하여 다리에 장애까지 갖게 되지만 정작 그런 혜택을 받고 자라 어엿이 자리를 잡은 자녀들은 아버지 덕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가시게 여기는 듯한 모습마저 보이곤 합니다. 그 자녀들은 영화를 본 우리들과 달리 아버지 덕수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니까요.
올해는 아버지께서 하나님 나라로 가신 지 2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도 이제 중년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드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저는 좋은 시절에 살아왔지만 저의 아버지가 사시던 시절은 전혀 지금과 같은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1936년생으로 일제시대에 충남논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3살때인 1939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9살이 되던 초등학교 2학년때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이던 14살때 (1950년) 부터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중학교 3학년때 17살 (1953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까닭에 전쟁에 나가지는 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1학년과 2학년을 논산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카톨릭계 고등학교인 대건고등학교에서 공부하시다가 3학년 때 대전에 있는 명문고였던 대전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셨다고 합니다. 대건고등학교에서는 항상 1등을 하셔서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셨는데 명문고였던 대전고등학교로 전학을 가니 성적이 크게 떨어져서 아주 어려웠다고 회상하시곤 했습니다.
1954년-1956년까지 한국 전쟁이 막 끝난 폐허 속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교 공부를 하는 것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힘들었을텐데 또 전혀 다른 수준의 학교로 그것도 고3때 전학까지 가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에 마음 한켠이 아려옵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년 되지 않은 1956년도에 처음으로 대학입시를 치르셨는데 당시에 형인 큰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서울대 화공과에 지원하셨다가 낙방하시고 재수하셔서 다음해에는 다시 큰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학과를 바꾸어 서울대 상경대에 지원해서 다시 고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기로 서울신학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때의 대학과 학과를 결정할 때 할아버지와 같은 어른이 계셨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자신의 실력에 전혀 맞지 않는 결정을 하지 말고 자신의 실력에 맞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이끌어 주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때가 이승만 정부 시절입니다. 당시에 아버지의 큰 누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이면서 서울시장이셨던 분의 며느리여서 큰아버지는 그 덕에 한국전력에 입사를 하셨고 아버지도 그런 혜택(?)을 누리실 걸 기대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전 해인 1960년에 4.19로 정권이 바뀌면서 아버지의 인생은 어려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96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부산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시면서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사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집안에서 세운 논산에 있는 교회에 사역자가 없다고 도와 달라고 해서 잠시 거기에 전도사로 가셨다가 어머니를 만나게 되어 31살때인 1967년에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삶을 연도별로 열거해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정말 어려운 시기에 아버지께서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아둥바둥 노력을 해야 했을지 그려지곤 합니다. 한국은 1960년대 말까지 식량이 부족한 보릿고개라는 시기를 겪었습니다. 1964년부터 베트남전에 파병을 시작해서 1973년까지 기간동안 한국이 비로소 소위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해 가기 시작했으니까 우리 3남매가 어렸을 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힘들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본인이 제대로 혜택을 받지 못한 이유로 논산이라는 시골에 살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논산과 대전도 이렇게 다른데 서울에서 공부를 시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우리 3남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장 최고의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으셔서 정말로 무리를 해서 강남 8학군에 우리를 정착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 덕택에 우리는 아버지와 달리 좋은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리를 한 탓에 우리들이 느끼기에는 항상 결핍이 있는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또 제가 고3이 되던 해인 1985년에 부도를 맞게 되면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49세부터 87세의 일기로 돌아가시는 38년의 긴 시간 동안 항상 쪼들리고 빚에 허덕이는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색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우리 자녀들에게 그런 어려움을 겪게 한 것을 항상 미안해 하셨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탓하기가 쉬웠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본다면 또 그만한 애로와 말 못할 사정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가장이 되고서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다보니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특히 그래도 아버지가 우리를 강남8학군에서 공부시키려고 고생을 많이 하셨구나 라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항상 부르는데 정작 내 아버지에게는 왜 이렇게 밖에 못할까?‘ 그래서 미국에서 전화로 “아버지 저희들을 강남8학군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듣고 기뻐하셨다는 말씀을 어머니로 부터 나중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많이 외로우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방문을 했을 때 평소대로 아버지께서 혼자 산책을 하시곤 했는데 한두번 따라 나선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같이 나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우셔서 말씀이 많아지곤 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신지 이제 2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병실에서 성경을 읽고 또 읽으셨습니다. 이제 천국에서 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기쁘게 사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오늘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녀와 손주와 며느리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 4절 말씀 (현대어 성경)
-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옳은 일입니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말씀은 약속이 보장된 첫째 계명입니다.
- 그 약속은 계명대로 사는 사람이 복을 받고 오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
시편 20편 말씀 (현대어 성경)
-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네가 환난을 당할 때 여호와께서 네 기도에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시며
- 성소에서 너를 도우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기 원한다.
- 그가 너의 모든 예물을 기억하시고 너의 모든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며
-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너의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 바라노라.
- 네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가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깃발을 높이 쳐들리라. 여호와께서 너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기 원한다.
- 여호와께서 자기가 택하여 세운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알았으니 그가 하늘 높은 곳에서 저에게 응답하시고 그의 능력으로 저에게 큰 승리를 주시리라.
- 어떤 나라들은 군대와 그 무기를 자랑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노라.
- 그들은 비틀거리고 넘어지나 우리는 일어나 든든히 서리라.
- 여호와여, 왕에게 승리를 주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