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13일 (월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Winston Churchil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 국사를 배운 바 있지만 여전히 새롭게 배워야 할 잊혀진 역사와 영웅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 배우게 됩니다. 오늘 소개할 분은 김경천 (1888-1942) 장군이라는 분입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 알게 된 건 고작 어제입니다. 이렇게 무지한 제자신을 느낄 때에는 정말이지 한심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당 이회영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40만원 (지금 돈으로 약 650억원에서 2000억원 상당)의 거금을 만들어 최초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가문입니다. 이 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신흥강습소를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훈련생들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하게 되는데 당시 남만삼천이라는 세분의 교관이 계셔서 신동천 (본명 신팔균), 지청천 (본명 지석규) 그리고 김경천 (본명 김광서)의 3분이십니다. 신동천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2기 졸업생이었고 김경천 장군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3회 졸업생이자 기병 중위였으며 지청천 장군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6회 졸업생이자 보병 중위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에 “뛰는 김좌진, 남만삼천이면 산천초목도 두려워 떤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광주고려인마을, 김경천 장군 세미나에 ‘남만산천’ 후손 한자리에 – 남도일보 9/5/2023
김경천 장군께서는 1888년 대한제국
김경천 장군님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영상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KBS에서 2012년 방영한 역사스페셜 –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의 영상입니다.
2012년 영상을 찍을 당시 김경천 장군님의 막내 따님이신 김지희님이 생존해 계셨고 증손녀인 김올가님께서 할머니의 말씀 “네가 러시아어도 할 수 있고 한국어도 할 수 있으니 김경천 장군님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해 주길 바란다”라는 것을 듣고 김경천 장군님이 묻히신 카자흐스탄의 장소를 찾는 이야기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분의 유해는 수많은 다른사람들과 함께 묻힌 상태여서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영상은 김경천 장군의 증손녀인 김올가님이 국회방송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신 우당 이회영 박사님의 손자이신 이종찬 회장님이 김올가님을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김올가님의 바램이 나오는데요 하나는 김경천 장군님의 백마탄 동상을 만들어서 제막하고 싶다는 것이고 영화제작이나 만화제작 등을 통해서 김경천 장군님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뉴스를 보니 김올가님께서 심장 수술을 받으셔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시네요.
‘백마탄 김경천 장군’ 증손녀, 생활고에 투병까지… 도움의 손길 절실 – 경북도민일보 7/7/2025
김올가님이 2019년에 증조할아버지인 김경천 장군님께 쓰신 편지가 있어서 전문 링크와 함께 일부를 나눕니다.
옛 소련땅서 독립운동 김경천 장군님께 증손녀 김올가 올림 – AsiaN 6/15/2019
할아버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어요. 그 모진 세월, “백마를 타고 일제 침략자들을 무찌르던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을까요. 2005년 할아버지의 일기가 발견됐어요.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피눈물로 쓰신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었어요.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동서양에 전쟁이 전개되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3성과 시베리아에 자연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백만의 우리 민족으로 세계에 대해서는 정의와 인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능히 혈전을 벌여 열강의 호의를 얻을 것이며, 독립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직전인 1919년 3월 1일에 쓴 일기였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멀리 내다보셨다니!
1919년에 이미 2차세계대전과 독립의 가능성을 이미 예견하고 계셨고 이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뛰어들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다. 동아일보도 1923년 7월 23일 확인 보도 – 교육N시민 2/3/2021
1983년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항일투쟁의 영웅 진짜 김일성 장군(1888~1925년 실종)의 이름은 김경천(金擎天) 이며, 본명은 金光瑞(김광서), 일명 金日成(김일성)으로 밝혀졌다. 그는 1910년 일본 육사(제23기 기병과)를 졸업하고 기병중위(기마부대)로 근무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1919년 6월 6일 청산리전투의 명장 지청천(池靑天: 일명 지석규, 당시 일본군 중위)장군과 함께 근무지인 서울(당시 京城)을 탈출, 평안북도 신의주를 거처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있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1919년 12월 무기획득을 위해 시베리아로 가자, 마침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을 상대로 1922년 10월까지 수많은 전투를 벌인 것으로 인해 항일투쟁의 상징이고 전설적인 독립군 영웅인 ‘김일성 장군’으로 칭송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의 왕실부대인 백군과 연합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항한 러시아 적군과 김경천 장군이 이끄는 고려해방군이 연합하여 많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22년 일본이 러시아에서 물러나게 되고 이 때부터 러시아 적군은 오히려 고려해방군을 해산하고 1925년 이후 김경천 장군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 1942년에 러시아 정부에 스파이 혐의를 쓰고 시베리아 노역형을 받다가 병으로 돌아가신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김경천 장군님이 일본 유학시절부터 1920년까지 쓰신 일기인 경천야일록 (擎天兒日錄)이라는 일기가 발견되어 김경천 장군의 삶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천아일록을 번역하여 출간한 김병학 교수님의 논문이 있어서 링크를 합니다.
경천아일록은 1888년 김경천이 출생한 때부터 1919년 만주 망명까지는 수기형식으로, 1920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일기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연해주 지역 항일운동가 김경천 장군이 1920년대에 기록한 경천아일록은 2005년 무렵에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주에 거주하는 김경천 장군의 막내딸 지희씨를 비롯한 유가족이 까라간다 정보국 문서보관소에 찾아가 김경천의 유품을 일부라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자 그 기관에서 서류뭉치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김경천 장군이 쓴 일기 경천아일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경천 장군님의 유가족들이 오랜기간 수차례에 걸쳐 김경천 장군님의 유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 일기 경천아일록이 발견된 것입니다.
1919년 초여름 망명에 성공한 이후부터 1922년 여름 빨치산 전투를 끝낼 때까지 3년간의 기록은 항일투쟁사에 대단히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고도로 훈련된 군인답게 그는 극한적인 체험까지도 절제된 언어를 사용해 간결하게 표현하고 전투요도까지 그려 넣어가면서 당시 연해주 한인 항일빨치산들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허나 그 절제된 언어 속에서는 숨길 수 없는 한인 빨치산 전사들의 피와 눈물과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부하에 대한 김경천의 연민과 애정이 절절히 흘러나온다. 그 외에도 만주와 노령을 넘나들면서 마주치는 세태나 국제정치를 보는 안목, 당시 연해주와 만주에 걸쳐 널리 존재하던 우리 독립단이 처한 환경, 그곳에 산재하는 우리 고시대의 유적들, 우리 유민이 살아가는 모습 등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김경천이 대단히 우려하며 기록해놓은, 소비에트 적위군이 함께 피를 나눈 동료였던 우리 한인빨치산 부대를 몇 차례에 걸쳐 참살한 사건 등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김경천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만한 합리적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 보면 당시 고려인사회가 이와 같은 사건에 빌미를 제공할 만한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2008년 김 예브게니씨가 발급받은 증명서를 토대로 최근에 확인해본 결과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묘소는 김경천 한 사람만 묻힌 무덤이 아니라 당시 그 수용소에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한 죄수들이 집단으로 묻혀있는 공동묘지다. 당국은 시신은 모아두었다가 1주일에 한 번씩 차에 싣고 가서 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경천 장군의 유해만 따로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거자료를 더 찾아 보완하고 세밀하게 확인하여 반드시 유해를 찾아 한국으로 봉환해야 할 것이다.
김병학 교수님 논문 이후로 김경천 장군님의 생애에 대해 좀더 자세히 전반적으로 다룬 논문이 있어서 링크를 올립니다. 전남대학교 윤선자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김경천의 결정에 아버지와 형은 찬성하지 않은 것 같다. 그해 여름 대한제국의 陸軍 副領으로서 도쿄를 방문한 김성은은 동생 김경천의 육군유년학교 입학을 반대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공병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교관으로 근무하였지만, 김성은은 동생의 육군유년학교 입학을 반대하였다. 대한제국의 당시 정세를 보건데 군인은 그다지 희망적인 진로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경천 장군님의 아버지와 형 모두 군인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당시 상황과 일본 정세를 잘 알고 있던 아버지와 형은 모두 군인이 되지 말고 공업을 배우도록 종용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 같습니다.
학교는 일제의 박해와 중국 지방 당국의 압력으로 1919년 11월 폐교하였다. 그러므로 김경천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을 담당할 수 있었던 시간은 길어도 4개월여에 지나지 않았다...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922년 11월 <연해주 고려혁명군과 한인빨치산부대 군사혁명소비에트의 해산과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의 명령 799호>가 내려졌다. 러시아내전 이후 러시아 적군의 후원을 얻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려 했던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연해주의 모든 한인의병대들이 해산되면서 수청의병대도 해산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 시대인 1937년에 벌어진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대한 논문을 하나 남겨 놓으려고 합니다. 김경천 장군님과 그 가족들이 카자흐스탄에 살게 된 이유가 바로 이 고려인 강제이주정책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김경천 장군님의 생가터에 표지석이 만들어 졌는데 이 표지석 제막식에서 증손녀 김올가님이 말씀하시는 영상이 있습니다. 중간에 눈물로 말을 잇지 못하는데 곁에 계시는 이종찬 광복회장님이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 제막식에는 우당 장학회가 참여했습니다.

김올가님의 소원대로 김경천 장군님의 백마탄 동상도 제막되고 영화와 만화 등도 나와서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이 무지하지 않고 김경천 장군님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