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어제와 오늘 인도에 있는 CDMO와 이틀간 JSC를 했습니다. 인도시간과 미국시간을 맞추어서 동부시간 아침 6:30-8:30까지 두시간씩 해서 이틀간을 하고 나니 정말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슴에 감사하며 또 하루를 감사하게 지나게 됩니다. 몇일전에 배우 김우빈님께서 유퀴즈 온더 블럭에 나오신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김우빈님이 갑자기 암세포가 발견되셔서 수술과 항암, 방사선 등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다시 나으셔서 드라마와 영화 등을 다시 하시며 일을 하시는데 감사일기를 쓰신다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특별한 일에 대한 감사일기를 쓰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너무나 당연하고 사소한 내용이 자신의 감사일기 제목이 되더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제가 매일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게 왔지만 가능하면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과도 인사도 하고 얘기도 하면서 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미팅도 많이 했고요.
지난번에 이어서 2017년의 기억들을 좀 회고해 보고자 합니다.
2017년은 제 인생에서 힘들었던 해 중의 하나로 기억됩니다. 미국에서 오랜기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2014년에 회사를 떠나 다시 직장을 찾고 적응을 하는 등 계속 수년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금방 몇년이 휙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방문한 것도 이미 4-5년간 시간을 내지 못해 가끔씩 아버지께 돈을 부치고 전화드리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화도 하지 못했고 특히 아버지와 통화를 한참 하고나면 어머니와는 통화할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아서 몇마디 인사만 하거나 그것도 하지 않고 마쳐지는 시간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70대에 접어든 어머니께서 언제부턴가 나라에서 주관하는 아파트 청소용역일을 시작하신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어머니께서 자신을 위해서 돈이 좀 필요하신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했을 뿐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나다가 한국에 있는 동생들로 부터 전화를 받게 된 것이 4월 즈음입니다. 어머니가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에 가셔서 검사를 받으셨는데 사진 상으로 암세포는 보이지 않지만 말기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희한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건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데 무슨 말기암이라니…말이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에 동생들과 통화하며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 보는게 좋겠다고…아무리 생각해도 오진인 것 같다고….그리고 어머니께도 전화 상으로 아마 의사가 경험이 부족해서 잘못 진단을 한 것 같다고….이런 얘기를 하고 또 한달 정도를 보낸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회사 일에 묻혀 지내고 혼자 하는 프로젝트여서 특별히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2016년말에 마지막 단계 중간체 중 하나의 지방물질에 약산을 이용해서 아주 순수한 고체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이 기술을 CRO 회사에 이전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했던 결과와 달리 CRO 회사에서는 그다지 높지 않은 순도만 얻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두번째 CRO 회사에 같은 기술을 이전한 결과 이 두번째 회사는 저의 결과를 아주 잘 재현해서 다행히 Kg Scale-up까지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회사의 결과와 제 결과를 데이터로 분석하면서 그 원인도 차츰 알게 되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연구는 회사 내에서 큰 뉴스가 되어서 사장님도 저를 격려해 주실 정도였고 Chromatography step을 줄이면서 전체 공정을 대량생산에서 혁신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직원을 뽑기 위해 4월부터 시작해서 6월에 첫 대졸신입사원을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입직원을 교육시키면서 새로운 화합물의 공정개발을 진행하게 되었고 이러다 보니 어느덧 여름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동생들은 어머니를 다시 큰병원으로 모셔서 검사를 받았는데 이 병원에서도 결국 말기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그 암명칭은 CUPS (Cancer of Unknown Primary Source, 원발부위불명암)이라고 즉, 어떤 암인지 알 수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5월말 즈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부터 어머니의 복수가 차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병원에 가서 복수를 빼고 돌아 오셨다가 또 일주일 정도 지나면 복수가 다시 차서 다시 복수를 빼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수가 차오르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어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빼던 것이 며칠에 한번씩 자주 빼야 하는 상황이셨습니다.
바이오텍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런 암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서 동생들에게도 수술뿐만 아니라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가 모두 소용없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역만리 미국에서 한가하게 하는 조언이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습니다. 특히 막내여동생은 엄마를 이렇게 일찍 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시중에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막내여동생이 복강경으로 하는 항암요법인 온열화학요법에 대해서 물어왔습니다. 이 온열화학요법은 복강경으로 복막에 있는 암세포에 직접 항암제를 주입하고 열을 가해서 암세포를 죽이는 시술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큰 병원보다는 중형병원이 하고 있었는데 안양샘병원에 있는 어느 의사분이 이 시술을 잘한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논문 검색등을 한 결과 일본에서 이 치료를 하는 예를 볼 수 있었고 미국에서도 흔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치료법은 국부적으로 복막에만 항암제를 맞추는 것이고 복강경이어서 어머니께서 받아보시면 혹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머니를 사시는 곳인 분당에서 먼 안양까지 모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절대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기도원에 가시겠다고 해서 너무나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다행히 안양샘병원의 담당의사께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셔서 어머니를 설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의사선생님께서도 간곡히 정성껏 설득을 하신 끝에 시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교인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고 회사에서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와 신입사원 교육 등으로 바쁘게 보내는 동안 어머니의 수술이 진행되었고 초기 예후는 다행히 좋아 보였습니다. 어머니도 좀 힘을 내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나으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몇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불 수 없는 상황이어서 동생들 둘이 바쁜 일 중에 서로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간호했는데 이미 몇달째 어머니를 간호하다 보니 지쳐가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더 이상은 미국에서 전화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보스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는데 다행히도 이민자인 저의 현실을 잘 이해해 주고 들어주었고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 걱정하지 말고 시간도 염려하지 말고 마음껏 휴가를 사용하면서 어머니 간호에만 매진하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저의 일과 신입사원 교육은 같은 보스에게 보고하던 헝가리 출신 디렉터에게 맡겨졌습니다. 헝가리 디렉터도 몇년 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헝가리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저를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3주 혹은 4주 정도의 휴가를 얻고 마침내 7월 초에 인천 공항으로 입국을 했습니다. 입국한 당일날 분당 처가에 가서 짐을 풀고 다음날 바로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이 그동안 고생했기 때문에 나 혼자 간호를 할테니 좀 쉬라고 하고 그 때부터 어머니를 간호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한지 얼마되지 않아 조금 괜찮아 지셔서 퇴원을 하고 분당 집으로 다시 모시고 갔고 어머니와 주일 예배도 가고 수요일 예배도 가고 동네 산책도 했습니다. 집이 엘레베이터가 없는 빌라 4층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거의 안아 올리듯이 해서 올려드려야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나아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갑자기 안 좋아지셨고 119를 불러서 급히 안양샘병원에 가는 일이 한두차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패혈증 증상이 있으셔서 거의 돌아가실 뻔 했는데 다행히 밤 늦게 안양샘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살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증상은 복강경 수술을 한 이후에 감염에 의한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특히 박테리아가 내성균주여서 약이 듣지 않았고 이런 면역이 좋지 않은 환자를 보호하기에 이 병원의 시설과 시스템은 열악해 보였습니다. 복수가 다시 차 오르고 어머니는 눈에 띌 정도로 수척해 지셔서 등뼈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여서 바로 누우실 수 없었습니다. 암세포는 점점 커져서 장을 막기 시작했고 장폐색 증상이 시작되고 암이 폐까지 진행되어 한쪽 폐는 이미 못 쓰게 되고 나머지 한쪽 폐도 절반은 물이 차고 나머지 절반으로만 가까스로 호흡을 하시는 어려운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의사가 인공항문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어머니께서는 절대 인공항문은 달지 않으시겠다고 완강히 반대하셔서 결국 이것은 하지 않기로 하고 수액으로만 식사를 드렸습니다.
이러는 기간동안 제가 알던 창투사 대표와 회사 설립을 하는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전화통화를 해야 했는데 이것도 너무나 병원에서 할 곳이 없어서 병원 복도 끝에서 해도 전체가 다 들을 정도로 방음이 되지 않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갔고 저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 친구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했는데 고맙게도 몇몇 친구는 병원까지 저를 찾아와 위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약속한 3주가 되는 7월말이 되어 미국에 돌아갈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좋은 상태는 아니셨지만 돌아가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누워계신 어머니를 안으며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또 올게요” 이렇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 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뉴욕을 거쳐서 보스턴으로 돌아 왔습니다.
예상과 달리 어머니와 이별의 시간은 금새 다가왔습니다. 내가 돌아오고 얼마되지 않아 어머니는 중환자실에 들어가셔야 했는데 동생들 말이 어머니께서 중환자실에서 꺼내 달라고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일을 중환자실에서 어머니께서 견디셨고 동생들에게 의사에게 돌아가셔도 좋으니 혈압, 산소포화도 등 수치를 어떻게든 맞추어서 일반 병실로 옮기도록 조언을 했고 담당 주치의도 그 뜻을 받아들여서 다음날 일인실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일인실에서 아마도 동생들이 찬송가를 틀고 어머니께서 다시 신앙심을 회복하실 수 있게 준비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말이 하루를 넘기기 힘드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인어른도 3년째 혈액암 투병 중이셔서 아내와 아이들이 아직 한국에 있었는데 다행인지 아내를 통해 밤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카카오톡 메시지에 뜨는 문자를 받으며 자정을 넘겨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새벽 5시 즈음 다시 눈을 떠보니 남동생으로 부터 문자 하나가 오고 있었습니다.
“형, 지금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가고 계셔...”
이렇게 하면서 어머니의 혈압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 지더니 조금 있다가 마지막으로 운명하셨다는 동생의 메시지가 떴습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참았던 울음이 와락 통곡이 되어 꺼억꺼억 울었고 그렇게 울다가 정신이 들 즈음 이제 다시 한국행 비행기 표를 구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 보스에게도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습니다.
갑작스런 비행기표 마련은 쉽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보스턴에서 뉴욕 JFK 공항까지 3시간반을 내리 새벽부터 달려야 했습니다. 어떻게 갔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운전하는 시간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쉬지 않고 달려서 결국 JFK공항에 도착했고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빨리 갔어도 이미 어머니는 염을 하신 상태였고 저는 서둘러 상주복을 입은채로 어머니와의 마지막 밤을 장례식장에서 보내고 다음날 새벽 어머니를 모시고 화장터와 납골당으로 모셨습니다. 그 뜨거운 어머니의 유골을 모시고 가면서 그리고 유족대표로 마지막까지 함께 하신 친척분들께 인사를 드리면서 그렇게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절차를 마치고 다시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 우리 모두는 옷을 갈아 입고 잠시 쉰 다음 저녁을 함께 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어머니 없이 맞는 가족식사였지만 저와 동생들 누구라 할 것 없이 너무 침울해 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신 어머니를 믿는 마음으로 그래도 가능한한 기쁘게 시간을 보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장례식을 하는 중 미국에서 보스로 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승진되었네. 승진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참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요? 저는 어머니의 장례식 가장 힘든 날, 승진이라는 경력상의 축하를 동시에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문자 메시지를 받으며 이것은 어머니께서 천국에 가셔서 저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7년은 이렇게 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잃은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