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과학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IT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지금 우리는 과거 왕들도 누릴 수 없었던 장수 (長壽), 대학/대학원 플랫폼, 편리한 교통, Health Clubs 그리고 SNS (Social Network System) 등 다양한 편의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는 N잡러가 가능해지고 Digital Nomad라고 해서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세상과 쉽게 소통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문명의 이기 (利器) 를 잘 이용하고 활용하면 우리 부모님 세대가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활력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적어도 한 세대 (30년) 정도가 더 생기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일하는 시간도 예전 보다 늘려야 하고 공부하는 시간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를 정할 때, 문과를 가서 법대를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는데요 아버지의 반대로 저는 이과에 진학을 했고 그 결과로 이렇게 과학자로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수성가를 하려면 이과에 가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 낫다는 아버지의 깊은 뜻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어렸을 때의 일일 뿐이고 제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의 나는 나의 꿈대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과는 문사철 (문학, 사학, 철학)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이 중에서 문학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미 철학박사 (Ph.D. – Doctor of Philosophy) 인 이유도 있고요. ㅎㅎ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찌저찌해서 일본에서 이미 한 세대 전에 이런 것을 해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토 도미오 (佐藤富雄)
은퇴 할 나이인 57세에 사토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경제학 학사를 받고 경영학 석사 (MBA)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60대에는 의학박사, 이학박사, 농학박사의 세가지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진학과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사진에 대해 공부하게 됩니다. 몇권의 책을 내고 사토 도미오는 70대에 강연을 다녔고 80대에는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갑니다.
이번에 등록된 등록문화재 제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 박용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민족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1917년 7월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에게 작성한 한글과 한문으로 된 문서이다. 독립기념관이 1985년경 도산 안창호의 딸인 안수산에게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다.
위의 두 편의 논문을 보고 그 이전 논문들을 인용한 내용을 보니 사실 저의 궁금증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이 발표된 것은 아주 최근이었습니다. 그 뜻은 아직도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동단결선언>에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병합으로 황제권이 포기했고 대한민국 국민주권이 발생한 날로 보고 있습니다.
“융희황제가 3보(토지.인민.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들 동지가 3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이 때 순간도 멈추거나 쉼이 없음이라. 우리들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그(융희)의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종의 하루는 즉 신한국 최초의 하루이니, 어찌 연관 없겠는가. 우리의 한은 처음부터 한인의 한이오, 비한인의 한이 아니라.한인간의 주권수수는 역사상 불문법(명실상부의 뜻)의 국헌이오.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요, 한국민성(한국민의 성정)의 절대 불허하는 바이라, 고로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는 즉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권위를 양도함)이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3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1917년에 제정된 <대동단결선언>의 글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주권은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주권포기와 함께 전제군주제가 포기되었고 ‘민주공화제’로 상속된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3.1 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제가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보니까 그 이전부터 미국 민주공화제, 중국 신해혁명 그리고 러시아의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등으로 전제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로의 자연스러운 의식 전환이 있었고 그러한 결과가 바로 2017년 <대동단결선언>으로 나타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19년 3.1 독립운동으로 부터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민주공화제가 다시 한번 명시되었고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헌번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된 것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해 주신 두분의 교수님들과 도산 안창호 선생님 가족들 그리고 선열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71세 김광성 씨는 13년 차 대학생이다. 한국감정원(현 한국부동산원)에서 32년간 근무하고 58세에 정년퇴직했다. 그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방송대) 문화교양학과 2011학번이 됐다.
4년 뒤 순조롭게 대학 졸업장을 받았지만 공부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곧바로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고, 같은 식으로 미디어영상학과를 거쳐 지금은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공고를 나와 정년까지 일만 해온 그에게 ‘공부’는 평생 키워온 갈증이자 언젠가를 위해 아껴둔 달콤한 즐거움이었다.
“퇴직할 즈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남아 있는 많은 시간, 뭘 하고 보낼지가 발등의 불이었어요. 주변을 둘러봐도 먹고사는 것은 웬만하면 해결되는데, 오히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할지가 심각한 고민이 됩니다. 사실 자식 농사 끝나고 나면 큰돈 쓸 일은 별로 없지요. 그때 생각해 낸 게 평생 공부입니다. 심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도 공부를 해야겠다… 가족도 적극 찬성해줬습니다.”
은퇴자의 대학 도전이 쉽기만 했던 건 아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지요. 대학에 입학한 첫해부터 틈날 때마다 도보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였지요.”
전국의 해안선을 따라 약 1600km를 5년간 시간나는대로 혼자 걸었다. 한 번에 3~4일, 혹은 일주일씩. 총 40일 걸렸으니 하루 약 40km를 주파한 셈이다.
그는 노년의 공부는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찾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인생을 위한 공부라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장점으로 젊어지는 효과를 꼽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탈(脫) 꼰대’ 효과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며 젊은 세대와 접촉하다 보면 시대의 조류를 알고 세상과 좋은 접점을 유지하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는 방송대 홍보단에 들어가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고 스터디나 동아리 활동, 신입생과 다문화 학우들의 멘토 역할 등에 적극 참여하며 뒤늦은 대학 생활을 만끽했다. 부동산 자산관리 강의나 글쓰기 강좌를 열어 재능기부를 하기도 했다.
방송대 1년 등록금은 약 75만 원(공대는 200여만 원). 성적 상위 7%까지는 전액, 20%까지는 반액 장학금을 수여한다. 그는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다.
첫 졸업 논문인 ‘나는 문화교양을 학습하며 행복해졌는가’는 학과 우수논문으로 선정됐다. 이 논문에 따르면, 그에게 행복은 품격 있는 삶을 위해 지성과 품성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고 문화 교양에 대해 공부하는 나는 행복하다.
“행복은 결론이 아니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소소한 행복, 요즘 말로 ‘소확행’이소중하죠.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 행복을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불행이 닥쳐야 비로소 과거의 작은 행복을 되돌아보지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려면 이성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들어야 해요. 아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부는 공부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7년 전 다시 상근직 일자리를 얻었다. 감정평가법인의 상임고문이자 자회사인 부동산중개법인의 대표를 맡아 9시 출근, 6시 퇴근 생활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다시 직장을 갖게 된 비결도 공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공부를 계속하니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따라갈 수 있었지요. 이 나이에도 다른 세대와 교감할 수 있고 새로운 정보화 문물을 잘 구사할 수 있고요. 제 나이에 컴퓨터 기기 제대로 못 만지는 분들 많잖아요. 취업해서 역할 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지요.”
특히 성 역할이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시각 교정은 그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다. 여느 가장처럼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는 꼰대 스타일이었지만 요리와 살림을 도맡겠다고 나섰다.
“마침 손주가 태어나 아내는 그 수발드느라 바빠진 탓도 있었지요. 30여 년간 아내가 해주는 밥을 받아먹기만 했는데, 그때부터 해도 다 갚지 못할 것 같더군요. ‘앞으로 밥은 내가 해준다’고 선언했습니다.”
“공부를 통해 시대의 조류를 알고 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된 행동 양식을 깨닫고 깨우치는 겁니다. 나이 먹으면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배우는 거예요. 그렇게 배운 삶의 지혜는 바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요. 노년의 공부는 일상을 바꿉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나이 들어 공부할 때 가장 큰 고민이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나이 든 학생에게 가장 좋은 게 방송대 강의입니다. 오프라인 수업이라면 교수님 강의를 놓치면 다시는 못 듣죠. 하지만 저희 학교 강의는 본인이 부지런하다면 언제 어디서건 다시 듣기를 할 수 있어요. 요 작은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교수님을 불러낼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방송대 강의는 한 학기 평균 6과목을 듣는데 과목당 대략 15시간의 강의로 이뤄진다. 단순 계산으로는 한 학기 90시간을 듣는 셈이다. 그는 초기에는 모든 강의를 5번 씩, 요즘도 3번씩은 돌려보며 복습한다고 한다.
“‘공부하는 노년’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제가 해온 여러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타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꼰대죠(웃음). 그냥 저는 그랬다는 거예요.”
시대 변화에 따라 지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낡아간다. 그는 전공에 따라 8년에서 12년이면 지식반감기를 맞는다며 평생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노후 필요 자금에 대해 금융계나 미디어가 너무 공포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살림하며 보니 제 경우 부부 생활비는 월 200만원 정도면 충분하더군요. 연금에 약간의 추가 수입을 확보하면 되는 거죠. 또 하나, 노후에는 있는 재산에 맞춰 사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다 살길이 있어요. 4050 시절에 자산을 뻥튀기해두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공포감은 조성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레프 톨스토이의 말을 꺼내 놓았다.
“톨스토이의 유작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제가 얻는 성찰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영혼에 대한 믿음, 끝없는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 몸을 겸손하게 낮추어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편안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생 별거 있나요. 하루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는 거예요.”
8월 15일은 한국의 광복절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한국 (조선)은 광복을 맞게 되었고 내년은 광복 80주년이 됩니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수많은 분들이 우리의 마음에 계시죠. 상해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조당 조만식, 몽양 여운형 그리고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등 너무나 많이 계시죠.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조선을 완전히 말살시키려고 했죠. 그 선봉에 선 곳이 지금의 서울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교 였습니다. 경성제국대학교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이를 위해 조선의 정체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앞선 곳이 경성제국대학교 경제학부이고 시카타 히로시(四方博)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많은 통계와 자료를 수집하고 이론화 하는 일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경성제국대학의 이런 논리에 맞서서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과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 상학부에서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교수들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인 교수들을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서 한국독립을 위한 경제 이론을 위해 애썼고 흥업구락부나 조선어학회 등에도 관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좋은 연구 자료가 있습니다.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상과대학 교수들이 어떻게 경성제대 경제학 교수들의 논리에 맞서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논문입니다.
식민 지배의 최전선에서 일제의 식민정책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그로서 교사의 최정점에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집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1926년 개교 당시 25명에 불과했던 이들은 일제 말기까지도 법문학부 60명을 포함해 200명에 못 미치는 소수였지만 ‘국가수요(國家須要)의 학술’을 표방한 이들은 식민 기획의 이념을 창출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그와 명운을 함께 했다.
식민지 조선의 최고학부인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신분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혁명운동에 가담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는 이러한 점에서 주목된다.
그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교수로 부임한 것은 1927년 4월이었다. 이 대학에서 그는 법문학부 2회인 이강국(李康國)과 박문규(朴文奎), 최용달(崔容達) 등 조선인 학생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유물사관과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친 그는 이들이 만든 마르크스 사회과학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이처럼 반제운동과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에서 열렬한 활동을 하던 미야케는 당시 유명한 혁명운동가인 이재유를 자신의 동숭동 교수 관사 지하에 토굴을 파 37일 동안 숨겨준 일을 계기로 1934년 5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검찰에 송국돼 예심이 시작된 직후인 1934년 6월 그는 대학으로부터 휴직 처분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35년 1월 면직됐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및 범인 은닉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의 아내인 히데도 이재유를 숨겨준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같은 해 5월 24일에 취조를 받고 기소유예에 처해졌다. 석방된 이후에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일제 경찰의 지속적인 내사에 시달렸다.
미야케가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경성제대 졸업생으로 미야케의 제자인 최용달 등의 도움으로 쌍림동(당시 병목정)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34년 11월에는 조선인 운동자인 김윤회의 배려로 명동(당시 명치정 2정목)에서 ‘가메야(龜屋)’라는 고서점을 열었다. 그런가 하면 전술한 이종률도 그의 아내에게 2000원의 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형태로 적극 후원했다.
출옥 이후에 그는 아내가 경영하던 고서점을 정리하고 1937년 1월에 일본으로 돌아가 고물상(자동차 해체업)과 신문판매점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는데 특고(特高)의 감시는 패전까지 계속됐다.
‘사상사건’으로 투옥된 유일의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 그것도 대학교수라는 지위에 있던 인물이 사상사건과 관계해 투옥된 희유의 사건”이었다.
조선에서 그가 보낸 시간이 10년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대가와 지배 블록의 보복은 어둡고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실상,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의 일로 다른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들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국의 식민지 현실이 암담했으면 총독부 산하의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마저 도움을 주려 했고 또 그런 도움으로 이 가족이 평생 힘들게 살아야 했을까요?
그리고 일본인 교수마저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다면 당시 조선인의 고통은 더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김 교수는 “고령 장수 사회에서는 인생 후반 삶을 활기차게 이끌 튼실한 반려 근육이 필요하다“며 “근육이 늘어나면 자신감도 커져 사회 활동이 활발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일보가 하는 캠페인 ‘움직이는 고령 사회를 위한 근육 저축 근육이 연금보다 강하다’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나이 들어도 근육을 잘 키울 수 있느냐?”고 묻자 김 교수는 “60·70대가 돼도 근육은 단련한 만큼 늘어난다”며 “부상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한 번 1시간 이내로 하고 일주일 3~4회 운동하면 원하는 근육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홍혜걸님의 유튜브죠 ‘의학채널 비온 뒤’에서 가장 최근의 김원곤님의 인터뷰를 볼 수 있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데에는 재물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재물은 어느 일정 정도 이상을 벌게 되면 더 벌더라도 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경험은 새로운 경험을 하면 할수록 그 행복감은 점점 커져 간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버킷리스트에 제가 하고 싶은 다양한 새로운 경험 요소들을 쓰고 있노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행복감을 느끼곤 합니다.
제가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 최근 관심은 예체능이야!”
그림 감상하고 클래식 음악 듣거나 부르고 운동하고 하니까 예체능이죠. 그렇다고 남들이 하는 걸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 하고 싶지는 않고 저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좀 배워 보고 싶거나 10년 이상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완성을 지향하는 다양한 취미나 일을 만들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림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품인데요 그와 곁들여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 특히 모네와 반고흐 – 일본의 목판화 유키요에도 관심을 가지고 좋은 책을 하나 사서 왔고 읽을 계획입니다. 일본 여행 기회가 있으면 꼭 유키요에 미술관에 가 보고 싶어요.
일본의 유키요에와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품의 연결성을 보면서 저는 한국 전통 그림인 수묵화와 서양의 유화가 결합하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찾아보니까 역시나 이걸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수묵화의 검은색과 여백의 단조로움이 저는 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거든요. 색의 단조로움도 그렇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는 면도 저에게는 좀 아쉬운 면이 있어요.
반면에 유화는 다양하고 유려한 색들의 향연과 함께 내구성도 갖고 있기 때문에 좋은 작품을 오랜 기간 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화를 그리려면 좀 많이 배워야 겠지만요.
이번 글은 600번째 블로그 글이군요. 그동안 생각이 나거나 뭔가를 새롭게 배우게 될 때마다 조금씩 적어 나갔던 글이 600개나 만들어 졌다니 마음 한 켠에서는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켠에서는 새로운 글들을 더 잘 지어야 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낍니다. 처음에 일기를 쓰고 블로그를 쓸 때에는 글을 쓴다는 게 너무나 어색하고 힘들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 듭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用不用說)이 생각나는군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심포지엄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Youtube에 지금까지 5회 심포지엄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요 그 중 제4회 심포지엄의 주제는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13분의 학자가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주제를 듣다가 괴테의 파우스트 작품에 대한 소개를 듣게 되었는데, 괴테가 20대에 시작해서 죽기 직전인 81세까지 60년간 집필한 12,111 행의 장문의 시입니다.
이 작품을 평생 연구하신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께서 계명대학교에서 여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에서 2시간 반동안 강연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요. 그래도 꼭 한번 읽고 싶어서 이번에 단테의 신곡을 구입해 왔습니다. 번역서로 사 온 이유는 시 중간 중간에 저와 같이 바탕지식이 없는 사람을 위한 많은 주석이 있기 때문이죠. 천페이지 좀 넘는 분량인데 천천히 읽으려고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연극이나 뮤지컬로도 공연이 되었고 지금도 공연이 많이 되지만요 전영애 교수님께서 독일에서 1999년에 21시간 완판본 공연을 보신 얘기를 해 주시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괴테는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로서 어느날 미혼모의 영아 유기 사건으로 공개처형되는 여인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시 낙태도 불법이었기 때문에 영아 유기 사건이 많이 있었는데 법이 엄정하여 공개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부터 괴테는 파우스트를 집필하기 시작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집필을 했고 내용은 20대부터 80대까지의 괴테의 삶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편의 시입니다.
이 시가 쓰여지는 배경에는 1770년대에 세워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1776년 미합중국 독립전쟁,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30년 전쟁 그리고 러시아 공격과 최후 등등 1830년대까지 유럽의 격동기를 살았던 괴테의 세기의 경험들이 이 작품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Nerd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죠. 저와 비슷한 먹물입니다. 파우스트의 60년간의 여정을 번역본, 영어 번역본 그리고 독일어 원본으로 읽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도 독일어 공부인데요 독일인의 책을 원본으로 읽고 싶은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걸 버킷리스트에 쓰는게 맞을지 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버킷리스트가 맞는 것 같아요. 제가 바라는 삶은 다소 황당한 (?)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은 삶인데요 그럴려고 생각을 해 보니까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삶을 일구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질러 봅니다.
물론 언젠가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사는 건 싫고 좀 소소한 다양한 일들을 조금씩 해 나가며 매년 늘려가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적어 봅니다.
Career Coaching
Medicare Agent
Tax Preparer
Uber/Lyft Driver
CFP
Biotech Builder/Consultant
Blogger
Youtuber
건물 청소
부동산 투자자
버킷리스트니까요.
제 마음이죠. Digital Nomad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제 마음, 저도 이제 너무 커져서 감당이 안되네요.
그래도 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건 많은 저는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자축해 봅니다.
아무래도 나이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 상 한국 직장인의 은퇴 연령이 나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미국 회사에 비해 이른 편인데요. 스스로 조기퇴직 하는 분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직을 당하는 (?)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아마 언젠가 퇴직을 당하겠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작 퇴직 이후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를 통해서 다양한 시니어들의 삶을 소개하는 중인데요 오늘 소개하고 싶은 분은 퇴직 후 10여가지가 넘는 취미 생활을 열심히 영위하고 계신 취미 부자이십니다.
이춘재님은 28년간 삼성전자에서 부장까지 재직하셨다가 2015년에 명예퇴직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중소기업에 가서 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대기업에서 근 30년간 향유했던 시스템 안에서 일을 하시다가 중소기업에 가서 일을 해 보니 막상 적응이 쉽지 않으셨다고 해요. 그래서 2주 만에 일을그만두게 됩니다.
이춘재님의 말씀으로는 명예퇴직 후 가족들의 반응이 너무 달랐다고 합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저희를 위해서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저희들이 가정 경제를 책임질테니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을 사세요”
그래서 그 후로 이춘재님은 그동안 하고 싶으셨던 다양한 취미 생활을 영위하게 되셨습니다. 취미만도 10여개가 넘어서 가족들로 부터 ‘너무 바쁘시다’라는 말씀을 들을 정도라고 하십니다.
오늘 퇴근을 하러 나오는데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한참을 내려서 운전하는데 애를 좀 먹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시원하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한량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왔습니다. 이곳 보스턴에서는 WCRB (World Classic Radio Boston) 이라는 FM 방송국이 있는데 이 방송국에서는 하루 종일 정말 좋은 클래식 음악들을 틀어줍니다. 한 곡 당 30분 이상씩 하기 때문에 온전히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저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방송이죠.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다가 나무 숲이 우거진 거리를 지날 때에면 저는 마치 영화에 나오는 고전 거리를 마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저는 본래 문과에 진학해서 법학이나 외국어 혹은 신학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요 아버지께서 취업이 힘들다는 이유로 문과/이과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제가 이과로 가도록 종용하셨어요. 그래서 평생 과학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학자로 살게 된 것도 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삶이고 즐겁게 일하고 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문과에 가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지 회한 (悔恨)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한 때 변리사 시험공부를 한다고 법학 책을 공부한 적도 있었고 MBA를 할까도 생각해 본 적도 있었고 실제로 금융업인 Venture Capitalist로도 몇년간 일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저런 마음으로 언젠가는 꼭 문과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실제로 무슨 공부를 하면 좋을지 생각을 꽤 오랜동안 진심으로 해 오고 있는데요 제가 역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학과를 갈까? 이렇게 생각을 해 봤는데 역사를 오랜동안 공부할 끈기는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철학도 생각이 있어서 철학책을 원서로도 읽어 보고 번역본으로도 읽어 보았는데 아~ 철학은 저에게 넘사벽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경영이나 경제를 공부해 보는 것도 너무 기술적인 학문으로 보여서 저에게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한 때 Communications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서 언론정보학을 공부하면 어떨까? 라고도 생각을 해 봤는데 그것도 생각보다 오랜 동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든 생각이 “국어국문학과” 였습니다.
불현듯 제 뇌리에 박힌 이 여섯글자가 떠나지를 않는 거에요. 정말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제일 성적이 나오지 않는 과목이 국어였거든요. 그래서 한 때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내가 만약 미국에 태어났으면 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공부를 더 잘했을텐데….”
그리고 이 말대로 된 건지 어쩐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 20년 이상을 살았잖아요? 영어는 차라리 국어보다는 오히려 쉽다고 느껴졌는데 막상 실제로 미국에서 살아 보니 저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그래서 돌고 돌아 다시 생각을 해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어쩌면 고등학교 때 배운 국어가 진짜 국어가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가서 실제로 배우면 어쩌면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국문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냐?”
그래서 검색을 해 봤습니다.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 이렇게 검색을 했는데 아주 유용한 Youtube 영상이 뜨는거에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4분이 나와서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의 생활에 대해서 1부, 2부로 나누어서 영상을 만드셨는데 저로서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결국 하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연구라는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구요. 주로 세미나를 통해서 함께 연구하는 분위기이고 국문학 연구를 하다 보면 역사적 상황이나 신문 등도 읽게 되고 소설가 한 분의 작품을 거의 다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분들이 실제로 느끼는 고민이라든가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어려움도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국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국어학을 배우지 않고 국문학을 배우는 게 제대로 소설이나 시를 연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거 막 흥분되는데요?
한국에서 2년 정도 머물 기회가 된다면 꼭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8/22/2024 첨가글
지난번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 글을 썼는데요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먼저 학부를 공부하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2024년 1월부터 국립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재외국민, 외국인 전형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송통신대학교는 학비가 저렴하고 편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3학년으로 편입하면 2년여만에 학사과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국어국문과 학사학위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싶습니다.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총장 고성환/이하 방송대)는 2024학년도 1학기 신‧편입생 모집부터 재외동포 및 해외거주 외국인의 입학이 가능해진다고 13일 밝혔다.
학력 요건은 국내 학생과 같다. 신입생은 △고등학교를 졸업(예정)한 자 또는 법령상 이와 같은 수준의 학력자이고, 편입생은 △대학교 또는 전문대학교를 졸업(예정)한 자 또는 법령상 이와 같은 수준의 학력자 △4년제 대학(각종 학교 포함)에서 1학년 이상 수료자 또는 법령상 이와 같은 수준의 학력자다.
재외동포 및 해외거주 외국인이 방송대 해외거주학생으로 입학하려면, 3개월 이상 해외에 거주해야 한다. 방송대가 운영중인 24개 학과 중 20개 학과에 지원할 수 있으며, 실습 교과목이 있는 사회복지학과, 식품영양학 전공, 유아교육과, 생활체육지도과 등 4개 학과는 입학이 제한된다.
해외거주학생으로 입학하면 해외에 거주하면서 100% 원격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수업과 성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수업은 한국어로만 진행되며, 중간시험 및 기말시험 등 성적 평가는 과제물로 일괄 제출하게 해서 평가한다. 다만, 성적장학금, 조기졸업, 복수전공 등은 적용되지 않는다.
입학 지원 방법은 방송대 입학 홈페이지(https://admission.knou.ac.kr)에서 지원서를 작성한 뒤, 졸업(예정)증명서와 성적증명서, 거주사실 증명서 등의 부속서류를 원본으로 제출해야 한다. 2024년 1월 3일 도착분까지 유효하다.
7/18/2025 첨가글
얼마전에 아내에게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학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을 물었는데 흔쾌히 Yes 해 주었습니다. 고맙네요. 그런데 아마 성적증명서, 졸업증명서 받아 내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라고 하는군요. 2025년 2학기도 서류 지원 기간이 지나 버려서 할 수 없이 편입은 2026년 1학기로 연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꿈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이 곳에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기 전에 국어국문학과에 대해 좀 배우고 싶어서 Youtube를 봤는데 나태주 시인의 따님인 나민애 교수님의 강의가 있어서 다 올릴 수는 없고 1번 강의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