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다른 분들의 글을 읽는 경우가 있는데 일을 부정적으로 대하는 분들의 글이나 Youtube 등을 보게 되면 좀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직장생활에서 일터의 삶이 행복하다거나 자유롭다고 여겨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산업혁명 시대 이후로 우리의 일의 형태가 다소 반복적이거나 상명하복식의 기계적 업무인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작업의 반복이라거나 기계적이라는 것을 넘어선 또다른 차원 – 고차원적 – 의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테면 일은 단순히 기계적 반복을 몇십년간 하는 것만은 아니고 스스로 생산적인 어떠한 부가가치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생산활동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는 더 나아가 자신이 팀의 일원으로서 해 나가는 일을 통해 사회를 위해 중요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그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그의 대가로 임금을 받거나 부차적인 소득을 얻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끼는 일의 의미는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일터를 통해 하고 있는 일은 ‘창조하는 행위‘입니다. 일터에서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매일 새로운 것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을 합니다. 특히 미국의 직장생활에서 하는 일은 Beyond my comfort zone –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즐겁지만은 않고 무언가 고통과 도전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과 난제를 향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저자신도 성장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직장에서는 만 5년부터 3년마다 한달의 특별한 Sabbatical leave (안식 휴가)를 부여합니다. 이번에 저는 두번째 안식 휴가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안식 휴가에 대해 딸과 함께 얘기를 하다가 Unlimited vacation policy와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사실 아주 특별한 차이는 별로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에게 주어진 이 Sabbatical leave는 단순한 휴가를 넘어 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가족들과 지난 시간을 감사하며 공유하는 시간으로서의 의미도 있고 저에게 감사한 직장으로 부터 받은 특별 휴가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조금더 큰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렇게 글도 쓰고 책도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친구들이나 친지들을 만나면서 그동안의 근황을 배우고 저 자신도 저의 근황과 생각을 나누면서 무언가 배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특별히 저에게 이 시간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명상의 시기라고 할까요? 저는 항상 내일에 대한 큰 기대가 있습니다. 사실 그냥 매일 매일을 사는 것이라면 인생은 좀 지겨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목적으로만 매일 살아간다면 그것은 좀 인생을 최대한 산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력을 키워나간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느낌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고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매일은 좀 다른 인생입니다.
‘성장통 (成長痛)‘이라고 할까요?
성장통은 아이들에게서 신체적인 이상이 없는데도 특별한 원인이 없이 양측 다리 통증이 나타나는 증상을 뜻하지요? 어쩌면 현재의 저도 미래의 저에 비해서는 어린아이이고 계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유없이 온몸에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성장통을 느낄 수 있어야 무언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듭니다.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외부로 부터 오는 자극과 함께 내부에서의 성찰이 함께 수반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극과 성찰이 반복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제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요 저는 오늘도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즐기고 있는 안식 휴가도 단순히 매일 노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성장하는 성장통의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성장통을 통해 자극과 성찰을 하면서 계속 자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며 그렇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Polymath란 적어도 두 세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Leonardo Da Vici, Benjamin Franklin 등이 Polymath의 예로 자주 거론되곤 합니다. 주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Polymath들이 많이 있었다가 이후 기술의 발전 등의 이유로 전문화가 이루어 지면서 Polymath는 거의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4차 산업혁명으로 이름 지어진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주된 직장의 일을 그만 둔 이후에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오래된 기사이지만 지금으로 부터 5년 전에 포브스에 실린 기사를 읽으며 좀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Ever since Adam Smith published The Wealth of Nations, the industrial world has been enthralled with specialization. Workers have been trained from an early age to focus on a fairly narrow range of skills that they will then apply for the remainder of their careers, like compliant cogs in the industrial machine.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이후로 산업 사회는 전문화 되어 왔다. 근로자들은 어려서 부터 특정 전문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훈련되어 자신들의 직업을 영위하게 됨으로써 마치 산업 기계 부품과 같이 살게 되었다.
This forms a basic T-shaped knowledge base, with deep expertise in one discipline, which was gained early on in one’s career, which was them supplemented and built upon with whatever on-the-job training you were offered.
이것이 기본적인 T-형 지식기반으로 한 분야에서 깊은 전문성을 가지고 직업 내에서 얻어지고 보완하게 되며 직업훈련 형태로 키워져 왔다.
For many years, this approach has been just fine, but it’s no longer fit for purpose, and today, knowledge should resemble more of an M-shaped profile whereby you have in-depth knowledge and expertise in multiple areas, with lifelong learning then helping to keep those skills relevant.
수년동안 이러한 접근은 당연시 여겨졌지만 이제 더이상 이러한 방식은 목적에 맞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전문지식을 가져야 하는 M-형 지식기반으로 나아가야 한다.
Overcoming stigma
The problem is, this kind of knowledge profile has a high level of stigma attached to it. In the western world it’s characterized as the Jack of all trades, master of none. In Eastern Europe, a common saying is “seven trades, the eighth one – poverty” (and variants of this throughout the Eastern Bloc). In South Korea, they say that “a man of twelve talents has nothing to eat for dinner.”
문제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기반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M-형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일을 하더라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동유럽에서는 종종 “7가지 직업, 여덟번째는 결국 가난”이라고들 말한다. 한국에서는 “다재다능하면 먹을 것이 없다”라고 한다.
This mindset is one that needs overcoming. Whereas the T-shaped approach to knowledge was acceptable in an age where change was slower and less widespread, i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change is pretty much a constant, so it’s no longer something to be mocked. If you still need convincing, here are a few reasons why having multiple strings to your bow is so important.
이런 통념을 넘어서야 한다. T-형 접근법이 기술발전이 느리고 덜 보편화된 시대에는 적합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술이 지속적으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직업을 갖는 것은 더이상 조롱거리가 되지 못한다. 확신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다양한 전문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아래에 열거하고자 한다.
1. Polymaths are more innovative – Innovation today is increasingly recombinative in nature. This means that innovators are not necessarily inventing completely new things, but rather applying existing technologies in new ways. This requires people to have a broad set of skills and experience so that they can apply ‘left field’ thinking on common problems. One of the main reasons entrepreneurship is so high among the migrant community is that migrants have norms and values built up in their homeland that they have to reassess when they move overseas. This process of re-evaluation acts as the Eureka moment in finding new ways of doing things in their new homeland. The value of cognitive diversity has been well explained by academics like Scott Page, and amply illustrated via crowdsourcing and open innovation, where challenges are often best solved by people outside of their core domain of expertise. So if you want to be creative and innovative, spread your knowledge net far and wide.
1.Polymath는 보다 더 혁신적이다 –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혁신은 본질적으로 점점 융합적이다. 말하자면 혁신자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기술들을 새로운 영역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방면의 기술과 경험을 가져야만 어떠한 문제에 대해 전혀 의외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창업자들이 이민자들 가운데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모국에서 얻은 경륜과 가치들을 해외로 이주한 이후 다시 재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재해석 과정을 통해서 이들은 유레카 경험을 하게 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방식을 창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식의 다양성이 가진 가치에 대해서 Scott Page와 같은 학자들이 이미 연구했고 크라우드 소싱이나 오픈 이노베이션 등을 통해 문제점들이 전문 영역 밖의 사람들에 의해 아주 잘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창의적이며 혁신적이고 싶다면 당신의 지식을 아주 넓혀야 한다.
2. Adapting to changes in a 100-year life – Children born today are likely to live until they’re 100 years old, and will therefore have multiple careers during their long life. If one is to make the most of such a long life, or to enjoy what Lynda Gratton refers to as the “longevity premium,” then it’s vital that you’re able to adapt sufficiently to ride the waves of change and remain gainfully employed throughout. Having multiple talents will not only give you greater value in the workplace, but in a world where many of the jobs today’s school children will do not yet existing, it’s vital that you have a number of skills that you can apply to whatever the labor market looks like in the future.
2.100세 시대 변화에 적응하기 –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백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래 살면서 다양한 일자리를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오래사는 삶을 최대한 이용하고 Lynda Grattn이 “장수프리미엄”이라고 말했듯 향유할 수 있으려면 변화의 파고를 충분히 적응할 수 있으면서 계속 고용되어야 한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직장에서 가치를 창조할 수 있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직업들 안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만 미래의 노동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3. Tapping into your passion – When we’re children we have this inherent curiosity for life that tends to get beaten out of us as we progress through the schooling system, such that we often end up in jobs we hate. This is a criminal waste, and noted thinkers such as Ken Robinson have long bemoaned the turgid state of modern education and how it drives any excitement for learning out of us. As an adult, all is not lost however, and I’ve written before about how you can both reignite your curiosity and how you can design the life you want to lead. If you do these things, you will inevitably venture off down multiple paths as you go where your curiosity takes you. This will almost certainly reignite your passion and purpose at work, which research has shown not only results in us being more productive and happier at work, but earning more throughout our career and even living longer lives as a result.
3.관심사에 주목하기 – 어렸을 적에는 본질적으로 삶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지만 학교 시스템을 통해 공부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억제되고 결국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은 불행한 낭비이고 Ken Robinson과 같은 선각자들은 현대 교육 체계가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 오랜 기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잃은 것은 아니고 지금이라도 다시 호기심을 재발동하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설계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호기심을 따라 다양한 일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당신이 관심사에 다시 주목하고 일의 의미를 찾게 되면서 연구에도 나타나듯이 더욱 생산적이로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벌 수 있고 결과적으로 더욱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Versatility and resilience are prized characteristics in this era of extreme change, and cultivating multiple talents is a great way of achieving that. The above are some of the reasons why this is valuable, and in a subsequent article I will explore some of the ways you can do so.
다양성과 꾸준함이 끝없이 변화하는 시대에서 이겨낼 수 있는 특성이고 다방면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내용들이 바로 그 이유들이고 차후에 다른 글에서 당신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꾼다면 참 재미있는 세상이고 기회의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은 과거 왕들도 원했지만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우리가 누리고 있다고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꿈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참 즐거우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참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음 서양철학 서적도 조금씩 읽고 클래식 음악도 듣다 보니 라틴어에 대한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몇가지 알게 된 것이 있는데요.
네델란드의 철학자였던 바룩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가 살던 시기에는 교회의 권위가 너무 세서 스피노자가 자신의 저작을 일반 대중이 볼 수 없도록 라틴어로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독일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의 경우에도 초기 저작은 라틴어로 썼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라틴어 원문으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번역서에 지쳤거든요.
그러는 와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이 죽는 순간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긴 Requiem이 있습니다. 이 음악은 라틴어 성가입니다. 이러니 더욱 라틴어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유명한 부분으로는 예를 들면 Lacrimosa 가 있습니다.
기초를 공부하고 기초 문법이 좀 다져지면 중급 부터는 정식 대학 강좌를 들을 생각입니다. 라틴어가 프랑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아주 가까워서 사실 라틴어를 배우고 나면 이 언어들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라틴어를 고급 수준까지 하려면 몇년 걸린다고 하는데요 시간은 많으니까 지금부터 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요즈음은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에 빠져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음악을 들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도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오페라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 여행을 가면 차 속에서 이탈리아 칸초네 산타루치아나 오솔레미오 등을 부르셨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그 당시에는 ‘오페라가 뭐가 좋은거지?’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보니 저도 아버지와 같이 오페라를 좋아하는군요. ㅎㅎ
이번에 부러우면 지는거다는 강석우님으로 정했습니다. 강석우님에 대해서는 배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요 3년 전에 송승환님의 원더풀라이프에 나오셨던 장욱제님께서 강석우님을 부럽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말씀하셨던 게 강석우님처럼 클래식 공부를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것이었어요. 5:55부터 보시면 강석우님에 대해 부럽다고 하시면서 하시는 얘기가 있습니다.
책을 발간할 만큼 클래식에 조예가 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접하게 됐나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들으면 제 감정이 움직인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기회가 생겨 처음 정식으로 음악회에 가보고, 대학교 때 대학 방송국에서 클래식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클래식을 전공하는 친구들도 사귀고 본격적으로 클래식을 알게 됐습니다. 배우가 된 후로는 일반 직장인보다 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쉬는 기간 동안 음악회나 전시회, 발레 공연에 가는 등 취미 생활에 집중했어요. 벌써 40년이 넘었네요. 그러니 이제는 클래식이 제 몸에 밴 거나 마찬가지죠.
‘아트테이너’라고 불리며 전시를 열 정도로 그림도 잘 그리신다면서요? 아유,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림이나 작곡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요. 그저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었을 때 어떤 게 좋은 건지 판단할 눈과 귀가 생긴 거죠. 그 판단 기준에 저를 대입시키며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림 전시 같은 경우 벌써 30차례 이상 했네요. 제 그림을 산 분들에게 미안하죠. 어쨌든 그림은 앞으로도 계속 그릴 생각이니 그림값이 좀 올라야 할 텐데요.(웃음)
오늘 비가 옵니다. 비가 그치면 가을의 문턱을 넘어갈 듯한데 이럴 때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요? 팝 중에서는 도로시 무어의 ‘미스티 블루’. 약간 재지한 곡인데 이런 날 들으면 정말 좋죠. 그리고 20대 중반에는 이런 날이면 핑크 플로이드의 ‘더 파이널 컷’이란 곡을 꼭 들었어요. 이 곡의 트럼본 파트는 정말 기가 막히죠. 클래식에서는 가을엔 역시 브람스의 ‘인터메쪼 Op. 118’의 두 번째 곡. 많은 분이 계절이 연상되는 곡으로 비발디의 ‘사계’를 꼽는데 제가 생각할 때 가장 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작곡가는 브람스인 것 같아요. 교향곡 3번 3악장이나 4번의 1악장도 좋아요.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 원작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란 영화에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이 들어가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앞서 말한 건 좀 대중적인 곡들이고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곡은 (한동안 고민 후)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2악장.
어떤 곡인가요? 독일 함브루크의 떠돌이 음악가였던 브람스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요아힘의 소개로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의 집에 가게 돼요. 그때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를 만나게 되죠. 슈만의 집에 머물면서 당시 스무 살이었던 브람스가 세 곡을 쓰는데, 그게 소나타 1번, 2번, 3번이에요. 그 곡들을 듣고 클라라가 “투박한 껍질 속에 있는 열매”라고 했어요. 자신을 향한 브람스의 마음을 읽은 거죠. 자꾸 감싸려고 하지만 브람스의 마음이 곡 안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특히 1번의 2악장을 들어보세요. 아주 기가 막힙니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딱히 계획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계획을 세운다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요즘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있어요. 놀기. 짬이 나는 대로 여행 가고 골프 치면서 좀 놀려고요. 예전에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이제는 좀 놓으려고요.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아내와 일본에 가고, 10월에는 홍콩에 가요. 그렇게 살려고요. 지금부터는.
멋있지 않나요? 저도 그림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강석우님처럼 직접 할 생각은 못하는데요. 직접 실행에 옮기고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이곳에 올립니다.
어느 유튜브 경제채널에서 한국의 대기업 총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그 총수의 대답은 “자유“였습니다.
제가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메뉴 중 “자유 (自由) 와 이유 (理由)“라는 메뉴가 있는데 지금 쓰고 있는 “내가 쓰는 나의 삶”도 이 메뉴의 한 토막글 중 하나가 될 예정입니다.
이제까지 “경제적 자유 (Financial Freedom)”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지만 사실 경제적 자유 (經濟的自由) 라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지 “자유”를 찾아가고 “자유인”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가장 최소한의 조건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자유를 넘어선 자유에 대해 그리고 나는 어떤 자유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좀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자유에 대한 국어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크게 세가지 의미로 나뉩니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법률)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철학)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구속되지 아니하고“입니다.
여기서 구속은 (1)시간 (2) 공간 (3) 행위 및 (4) 관계에 대한 구속을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서 자유를 설명한다면
“나는 자유인으로서 (1) 내가 원하는 시간에 (2) 내가 가고 싶은 공간 (장소)에서 (3) 내가 원하는 행위나 사고를 하고 (4)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나에게 가장 최선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최근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3) 내가 원하는 행위나 사고”가 무얼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단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서 살아온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살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나 교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배웠고 그 이후에는 회사에서 상사의 지시를 통해 일을 해 왔습니다. 물론 이외에 배우자나 친구들, 선후배들 등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삶을 일터를 떠나서 만약 완전히 혼자서 산다는 가정 하에서 생각을 해 보았을 때,
“과연 내가 원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죠. 일단은 원하지 않는 행위를 끊는 것으로 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TV를 보지 않는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주식시장을 들여다 보지 않는 것
교회에서 필요 이상으로 일하지 않는 것
TV 뉴스를 보지 않는 것
정치 평론에 너무 빠지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하지 않고 생각없이 듣거나 믿는 것
소파에 누워 있는 것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
말을 필요 이상으로 길게 하는 것
등등 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몇가지 원하는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기를 쓰는 것
좋은 책을 읽는 것 – 고전이나 소설, 철학, 심리학, 역사 서 등 생각할 만한 책
운동을 하는 것
좋은 옷과 신발 등을 고르고 입는 것 – 패션에 신경 쓰는 것
블로그를 쓰는 것
유튜브에서 좋은 강의를 필기하며 집중해서 듣는 것
클래식 음악을 끝까지 집중해서 듣는 것
아내와 자녀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
아내와 취미 생활을 늘려가는 것
친구와 형제자매에게 종종 연락하는 것
등입니다.
다시 자유의 정의로 돌아와서 철학적 의미를 곱씹어 보면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 뜻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을 해 봤는데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께서 쓰신 논문을 통해서 좀 유추해 보기로 했습니다.
칸트는 초월적 자유라는 말을 쓰면서 “자유라는 말은 우주론적인 의미에서는 한 상태를 스스로 시작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유에서 생긴 원인성은 자연법칙에 쫒아서 시간적으로 규정하는 다른 원인에 또 다시 예속되어서는 안된다.”
헤겔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라는 것은 오직 나에 대해서 나 아닌 타자가 없는 데에만 있는 것이다“라고 본다.
위 논문에서 김석수님은 “자유와 필연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탈사회적이고 탈역사적으로 전개된 논의로만 볼 수 없고, 오히려 역사성과 사회성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 논의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상황과 관련해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며,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현 시점에서 과연 의미가 있는지는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해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4차 산업 혁명의 중심에 있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등의 발전으로 Post-Human이 되는 시대라고 하죠. 이런 시대가 저에게 줄 수 있는 몇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일하는 시간을 줄여 줌으로써 여가 시간을 부여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지식과 정보의 양은 매우 커지게 되겠고
대신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생명공학의 발전은 건강한 삶으로 선조들보다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정보들이 외장하드 처럼 저의 생각 밖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어쩌면 나는 자유롭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 자유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자유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자꾸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SNS로 부터 떨어져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ChatGPT 를 사용하지 않고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책을 읽으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고 이를 통해 제가 살 시간, 공간, 관계 및 행위를 제 스스로의 통제안으로 넣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블로그를 쓰고 책을 읽는 양과 읽는 책의 두께가 늘어나게 되면서 저도 차츰 생각이라는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한가지 제가 최근 느끼는 문제점을 발견한 게 있습니다.
오랜동안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한다.
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이 점점 늘어 나면서 너무 이것 저것 하려고 하지 말고 집중해서 한가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칸트 철학에 대해 지난번에 글을 쓴 것 같은데요 어찌하다가 포스트 휴머니즘 (Posthumanism)을 알게 되었습니다. 칸트 철학의 대가이신 백종현 교수님의 강의를 보다가 포스트 휴머니즘 강의를 찾게 되었는데요 이를 통해서 계명대학교 목요철학 인문포럼에서 포스트 휴머니즘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2020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COVID-19 global pandemic이 시작되고 2023년에 endemic이 될 때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 COVID-19 백신과 치료제의 전임상, 임상 파이프라인으로 주장한 것들이 2,000개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승인이 된 것은 몇 개 밖에 되지 않고 저는 그 중의 하나의 백신을 마치는 데 공헌을 한 사람의 한 사람으로 사는 행운 (?)을 얻을 수 있었고 몇년 전에는 그 공로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Nucleoside Chemistry라는 것을 접한 것은 1990년의 일이었는데요 그 이후로 회사를 들어갈 때에도 이 분야를 연구하는 몇 안되는 박사님의 팀으로 입사를 해서 배웠고 미국에 Postdoc을 올 때에도 Nucleoside와 RNA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RNA Regulatory System을 발견한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입사한 회사도 Nucleoside를 신약개발 하는 회사였고 현재는 RNA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 분야를 30년이 넘게 하면서 항상 ‘나는 언제 세상에서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끊임없이 저의 깊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의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라도 되는 듯이 저는 가장 유명세를 타는 – 심지어 우리 부모님과 친척들, 우리 아이들까지도 알 정도로 – 사람이 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러한 성공세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저는 그만 일에 치이다 못해 Burn-Out 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더 이상 이보다 더 할 것도 없으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 마저 먹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당시 아내의 오랜 격려와 돌봄 그리고 책을 통해 배운 나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책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마흔은 없다”를 읽으며 서서히 다시 삶의 기운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버킷 리스트가 서른개가 넘어 가면서 거의 버킷 리스트를 다 적었다고 생각해서 이제 더 쓸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책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시 버킷 리스트의 새로운 목록이 나타나는 군요. 이번에 쓸 버킷 리스트는…
피아노 배우기
입니다. 우리 집에는 그랜드 피아노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좋은 피아노가 한 대 있는데요. 이 피아노가 그대로 방치된 지 몇 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치질 않아요.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이 집을 언제까지 살게 될까? 아마 은퇴할 나이가 된다면 집을 줄여야 겠지? 만약 그 때가 된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버킷 리스트가 늘게 되었는데요.
여기에서 피아노 생각이 난 것입니다. 물론 그 언젠가 새로 살 집에 피아노를 가져 갈 수도 있겠지만 아마 팔 가능성도 많은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때 까지도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없다면 당연히 피아노는 이사할 때 어떤 형태로든 처분을 하게 되겠죠.
그래서 피아노를 배워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배우고 싶은 곡도 이미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즈 음악을 많이 하는 WHRB를 듣다가 듣게 된 선율인데 노래도 천천히 되고 제가 피아노 곡으로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따~~ 따~~ 딴딴딴….따-따-따-따-다~딴딴딴…
뭐 이런 곡조인데 제목은 모릅니다. 재즈 발라드인가요? 일단 운율만 적어 놓고 노래 제목을 알게 되면 그 제목을 다시 쓰려고 합니다.
피아노를 배우면 코드 피아노는 꼭 배우고 싶고 제가 피아노로 칠 수 있는 곡이 3곡 이상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성진님과 임윤찬님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면서도 한번 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9/2/2024 Update
피아노에 대한 글을 쓴지 벌써 5개월 정도가 지났군요. 배우자에게 피아노 배우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서 부부가 함께 레슨을 30분씩 받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군요. 저는 아마도 코드 피아노를 배워야 할 것 같아요. 피아노를 배우는 것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시작을 할 방안을 부부가 함께 생각해 보면 더 실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郎, 1935년 ~ 2023년)의 독서법인 3년 전작주의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바로 시작을 했습니다.
저의 첫번째 전작주의 작가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년 ~ 1784년) 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70권의 책을 썼다고 하는데요 순수이성비판 (Critique of Pure Reason), 실천이성비판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판단력 비판 (Critique of Judgement)의 세권의 비판 서적이 가장 중요하죠. 사실 칸트는 제가 몇년 동안 꼭 알고 싶었고 연구해 보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판단력 비판: 나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104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책을 보면 철학을 하고 싶으면 가능하면 최근 철학자 보다는 과거의 철학자를 연구 과제로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하셨는데요 저도 그래서 서양 철학의 거장인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 오랜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번역본을 사기가 만만치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최근에 미학과 예술학에 관심을 다시 갖게 되면서 이번에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판단력 비판을 이해하려면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문제는 책을 구했느냐?
네 영문판을 구했습니다. 어흑…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미국에 산 지도 이미 20년을 훌쩍 넘어 버린, 매일 매일 영어로만 살아가고 있는 제가 영어를 웬만큼 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시작을 했습니다. 아….그런데 말이죠.
이런….단어가 너무 어려워요. 철학책이라 그런지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사용하네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단어장을 찾으면서 읽어 내려 갔습니다. 그래서 12시를 넘은 12시 40분까지 읽은 페이지는 32페이지.
거의 8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약 4% 를 읽었고 아직 역자 서문을 읽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략 계산을 해 봐도 이런 속도로 읽어 나가면 한 달 내로 다 읽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매일 3시간씩 읽으면 말이죠.
이래서 고전, 고전, 대작, 대작, 이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웬만한 200 여 페이지 책은 하루 이틀이면 다 읽는데 이 책은 역시 달랐습니다. 또 문제는 한번을 읽는다고 이해를 할 수 있느냐? 그게 아니죠. 적어도 세번은 읽고 나야 뭔가 감을 잡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래도 시도를 열심히 해 보려고 합니다.
위에 말한 세 권 말고요. 칸트가 죽기 전까지 쓰다가 끝마치지 못한 유작이 있습니다. 이 유작은 사실 자연과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쓰던 것인데요. 이 유작도 읽어 보고 싶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1781년에 초판 (1st Edition) 을 쓰고 반응이 시원찮아서 1783년에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 (형이상학 서설) 이라는 책을 쓴 다음에 1788년에 순다시 순수이성비판 재판 (2nd Edition) 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형이상학 서설까지 3년 내에 읽을 수 있다면 저로서는 가장 성공적인 (?) 칸트 전작주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 가지고도 좀 부족해서 칸트에 관한 좋은 강의들을 좀 들으면서 개념을 잡아 가려고 생각을 합니다.
배가 고파서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이 정도 거리면 그냥 걸어도 되겠는 걸?’
거리가 편도 2.5 Mile (3.4 Km)인데 걸으면 55분 정도 걸리고 6천 보 정도 걷는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이 거리를 걸어서 다녀 오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계속 하다 보면 이 거리도 아무렇지 않게 되고 그러면 도서관을 가서 책을 읽고 돌아오는 오전 시간을 통해 고전을 읽고 유산소 운동을 하는 좋은 Routine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전 루틴을 나름대로 완성하고 났다고 생각을 하니까 왠지 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오후 시간에는 뭔가 프로젝트를 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일단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 Ernie J. Zelinski의 “How To Retire Happy, Wild and Free”에서 보니까 이 분도 처음에는 글을 못 썼다고 하고 그래도 매일 적어도 3시간 이상은 꼭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읽고 있는 이 책은 이 분야에서 나름대로 추천도서 반열에 오른 베스트 셀러 작품입니다. 글도 재미 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안목과 함께 배우는 것도 아주 많습니다.
Ernie는 이 책을 통해서 자신만의 삶을 주관적으로 건설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노력을 통해서 몰입 (Flow) 하면 인생은 아주 즐거워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배운 대로 오전 3시간 동안 저만의 루틴인 도서관 가서 책 읽기를 3시간 정도 하고 오니 ‘벌써 그래도 3시간 이나 내가 뭔가를 해 냈구나!’ 하는 뿌듯함이 밀려 옵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는 대학 스승님의 말씀을 평생 받들어 매3년 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전작주의를 했다고 합니다. 독서를 좋아하지만 깊이 있는 독서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오늘 아래 글을 읽고 3년마다 한 작가의 글을 읽는 전작주의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전작주의를 50년간 실행하는 끈기로 오에 겐자부로의 글은 점점 좋아지고 발전했다고 합니다.
제가 과학자로서 한 분야에 30년 이상 일을 해 보니까 한가지 일을 꾸준히 10년 이상 연습하고 훈련하면 결국 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읽고 있는 Ernie J. Zelinski의 책 “How To Retire Happy, Wire and Free”에서도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개발하라고 합니다.
Creative Writing Course를 듣게 되면 창작품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도 비슷한 독서법을 권한다. 다른게 있다면, 시한을 정해 읽어보라는 것인데, 그 저자의 책을 다 읽겠다는 것보다는 3년 동안 읽어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오에 겐자부로의 자서전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에 다음처럼 나온다.
“소설가로서의 나의 인생에 실제로 유용한 가르침을 준 사람은, 나의 대학 스승이자 만년까지 나를 이끌어주신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였다. 그때 내가 대학에 있었던가 졸업했던가, 어쨌든 <개인적 체험>을 쓰기 전이었던 건 확실하다.
‘저널리즘의 평가라고 할까, 어쨌든 자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당장에라도 변할 수 있으니까 믿을 수가 없지. 비평가 선생들의 자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니까……. 특히, 자네는 자네 방식으로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되네. 소설을 어떤 식으로 써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인, 작가, 사상가들을 상대로 삼년가량씩 읽어나간다면, 그때그때의 관심에 의한 독서와는 별도로 평생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네. 최소한 살아가는 게 따분하지는 않을 거야.’
그때부터 내 인생의 원칙은 이 선생님의 말이었다. 나는 삼년마다 대상을 정해서 독서하는 것을 생활의 기둥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