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iotech Memoir – Moderna (8) – 너는 요셉이다.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오랜 기간의 여정을 거쳐 이제 드디어 미국까지 오게 됩니다. 제가 한 때 미국유학의 꿈을 가지고 1년간 열심히 공부하다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후 미국유학과 박사학위에 대한 모든 꿈을 저는 접었지만, 하나님은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셔서 박사학위도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유학이 아닌 포스닥이라는 방법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번에는 Yale University에서 시작된 첫번째 2년간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Yale University에서 Offer Letter를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Yale이 미국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일이었어요. 그만큼 저희가 무지했죠. 아마 Manhattan 가까운데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아무리 주변 지도를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고 그 위로 올라가다 보니 New Haven이라는 작은 도시에 Yale이 있더라구요. Yale대학교에 Postdoc으로 가면서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보통 Interview도 하고 했어야 하는데 이 교수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를 뽑았는지, 잘못 알고 뽑은 건 아닌지 등등…걱정이 태산인 상태로 교수님과 첫번째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교수님은 젊으신 분이셨고 인상이 좋으셨는데 첫마디가 저에게 꽤 전율있게 다가왔어요.

Don’t Forget that You are a Scientist!!

이게 전부였어요. “네가 과학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가만 생각해 보니 제가 석사, 박사학위를 받으면서도 단 한번도 내가 과학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연구원, 학생 뭐 이런 생각을 했지 정작 “과학자“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거죠.

저는 교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도 마음에 굳게 굳게 새기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Yale 대학교 종신교수가 되시기까지 보통의 교수님들과 같은 특별히 똑똑해서 명문대학교 출신에 천재 반열의 그런 분이 아니셨어요. 오히려 Wisconsin 주의 조그마한 주립대에서 공부를 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Purdue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다음에 Scripps 연구소로 Postdoc을 가시기까지 그리고 Scripps 연구소에서 처음 3-4년간 하시던 연구과제가 정말 잘 안됐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꿋꿋이 지도교수님로 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셔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시고 그 연구분야의 독창성 때문에 Yale University에 교수로 오시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도 새벽5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매일 12시간씩 강행군 하시는 성실성과 노력을 새로운 RNA의 분야인 Riboswith라는 유전자 조절 메커니즘을 발견하신 분이셨어요.

어떻게 보면 저와 좀 닮은 점이 많은 분이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묵묵히 자기 길을 가셨고 그 길에서 결국 새로운 RNA와 DNA 분야를 개척해 나가고 계신 분이셨죠. 그래서 아마 저의 CV를 보시고 제가 과학자의 마인드를 놓치고 있다고 판단을 하신 것 같아요.

이 분과의 첫 만남 덕분에 저는 Postdoc 생활을 생애 처음으로 즐기며 연구하는연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저에게 프로젝트를 특별히 던져 주시지는 않고 Riboswitch라는 것이 Drug Discovery에 응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는말씀만 하시고는 저를 그냥 놔두셨어요. 제 앞에 있던 Postdoc은 일본인 유기화학자였는데 물어보니 자기도 3년간 특별히 결과가 없었는데도 그냥 놔두었다고 하더군요. 본인이 과거에 Scripps에 있을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요. 이런 것을 학생들은 귀신같이 알아서 저희 연구실은 항상 학생들이 20-30명 정도로 북적북적 댔습니다. 똑똑한 Yale 학부생들도 와서 밤새워 실험하고 발표하고 나중에 지나고 보니 모두 다 잘되었더라구요.

이 분의 연구과제인 Riboswtich는 Small Molecule Metabolites를 선택적으로 인식하는 Aptamer 영역과 그 인식에 따라 단백질의 합성을 시작하거나 종료하는 Expression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여기에 발견된 Small Molecule Metabolites 대부분이 Nucleosides 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연구에서 Small Molecule Metabolites인 Nucleosides를 변형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Riboswitch 자체의 구조변화를 연구할 수 있으니 저로서는 Nucleoside Chemistry와 RNA Structural Biology를 동시에 연구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과제였어요. 정말이지 이런 기회가 저에게 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죠.

아! 세상에 나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이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 너무나 좋은 한인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New Haven에 온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입국전에 이 교회에 등록을 결정하고 연락을 취한 상태였는데요 담임목사님 부부와 청년부 목사님 부부등 모두가 참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독일에서 뵌 선교사님으로 부터의 삶의 가르침에 이은 좋은 신앙생활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죠. 특히 선교담당 장로님이 계셨는데 한국에서명문대를 나오고 회사생활을 하시다가 이민을 오셔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이 분과 선교사역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너무나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Yale University 신학부가 운영하는 OMSC라는 선교사 안식센터가 있는데요 이곳에 우리교회가 후원을 하고 있었고 이곳에 매년 한인 선교사 가족이 안식년을 위해 많이 오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에는 현지 선교사님들이 1년씩 오셨다 가시곤 하셨어요. 그리고 이 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각 나라와 민족의 선교사역에 대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저로서는

(1) Nucleoside Chemistry와 RNA Structural Biology를 함께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프로젝트

(2)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실력이 뛰어난 지도교수님

(3) 활발하게 선교하는 지역교회

이 세가지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정말 처음 2년간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교회 안에는 Postdoc 모임이 따로 있었는데요 이 모임에서 만난 동료들은 저와 나이가 같고 아내들도 비슷한 Yale Postdoc들이었어요. 마치 최고의 Chef가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의 코스요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런 환경에서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Postdoc을 시작하고 2년차가 된 어느날 문득 대학시절에 했던 40일 아침금식기도와 그 이후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셨던가에 대한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대략 계산을 해 보니 그 금식기도를 한지 한 20년 정도가 흘렀고 지난 20년간 하나님께서 그 40일간의 아침금식기도에 선하게 응답하셔서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니 너무 감사해서 다시 40일 제단을 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40일 아침금식기도와 동시에 새벽기도를 위해 매일 교회로 향했습니다.

이 기간동안은 저에게 마치 단비와 같이 입에 단 꿀과 같이 그리고 나를 감싼 하나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느끼는 그런 시간이었고요 이 40일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서 어느새 30일을 지나고 열흘이 지나 약속한 금식기도는 결국 끝이 났어요.

이제 2년이 지나면 원래 아내와 약속한 3년간의 외국생활이 끝나고 귀국을 하기로 한 기간이 다 차는 순간이었어요.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연구과제를 마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죠.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어서 성경을 읽었는데 창세기를 열게 되었고 읽어보니 마지막 족장인 “요셉”에 대한 말씀이었어요. 그 구절을 읽고 묵상을 하는데 요셉이 가족들 앞에서 이집트 어로 얘기하는 구절입니다. 당시에 저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국에서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어실력이 막상 Yale 에 와서 똑똑한 미국학생들과 연구원들과 잘 모르는 RNA 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하니 영어실력이 오히려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와 달리 요셉의 삶을 보니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와서 감옥에만 주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유창한 이집트어를 구사해서 형들은 말하는 사람이 요셉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시더군요.

요셉을 보렴. 언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래서 그 주간에는 이 말씀을 생각하며 지냈구요 그러다가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일날 아침 여느때와 같이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기 위해 앉았는데 본문이 제가 묵상한 바로 그 똑같은 구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본문을 읽으시고 담임목사님께서 설교말씀을 하시는게 아니겠어요?

그날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은 저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이 분명했어요.

두번째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두번 내지 세번 반복하십니다. 한번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두번 같은 말씀이 반복되면 새겨들어야 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작정을 하신 것이니까요.

이날 두번째 주시는 같은 본문의 요셉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동안 하나님은 분명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요셉이다.”

이 날 설교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점점 분명해 지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미국에 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요..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죠.

주님, 오늘 지도교수님께 가서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이날 지도교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께 가서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당연히 잘 가라고 격려해 주실 줄 알았는데 교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I believe you can be successful in the United States as a good Pharmaceutical Scientist. I don’t know whether you could have such a good opportunity in South Korea. I want you to stay in the United States. I will fully support your application in the US positions. I will write a fantastic reference letter for you! I also want you to get promoted to a Research Scientist in my lab.”

이러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말 제 귀를 의심했어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지요.

  • 하나님이 나를 미국에 머물게 하시려고 미국으로 부르셨다는 것.
  • 그리고 나의 삶은 요셉처럼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이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는 약속만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이제까지 살아온 터라 굳이 정해진 약속이 필요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어요. 다만 아내의 교사직은 또 다른 이야기여서 아내의 의견도 중요했지요.

아내는 저의 진로에 대해서는 알겠다고 했지만 본인은 12월까지 복귀를 하고자 했어요. 12월말이 3년 휴직의 만료일이었기 때문에 복귀를 위해서는 그날까지 들어가야 했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여러가지로 몸상태가 좋지 않아 유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았어요. 의사는 12월까지 비행기를 타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얘기했고요 결국 아내도 미국에 남게 되고 아이는 이듬해에 Yale Hospital에서 낳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평탄대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고난이 시작됩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7) – 독일에서 만난 선교사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손은 정말 오묘합니다. 오묘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저의 삶의 여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죠. 저의 삶의 계획 가운데에는 하나 없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것의 시작이 “독일”이라는 나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2년정도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들었는데요 당시 문법대로 정확히 딱딱 들어맞는 독일어가 재미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제가 독일에 가서 살게 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특히 이것이 저를 어떤 삶으로 인도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죠. 이제 그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샬롬~

마가복음 10장 29절 – 30절 말씀을 통해서 집을 다시 산다는 의지와 결별하고 해외유학의 길도 포기하고 따라서 당연히 박사학위에 대해서도 포기하고 선교에 대해 열심히 살던 어느날 저는 뜻밖의 전화를 받고 지도교수님의 권유하에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마저 받게 됩니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여정이었죠. 어찌 되었든 마침내 유기화학 박사가 되었어요. 그것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Nucleoside Chemistry로 말이죠. 그리고 저는 연구원의 생활을 접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투자자로서 돈을 많이 벌기로 계획을 잡게 돼요. 그래서 벤처캐피탈리스트로 2년간의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요 하지 않던 술을 마시고 방탕한 삶에 들어갑니다. 마치 과거에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신기하게도 저도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저의 삶에서 갔는 의미는 몇가지가 있는데요.

  •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은 과학자의 길이다.
  • 돈을 쫓지 말고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니다. 결국 저는 2년만에 다시 과학자의 길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마침 선배님이 계신 바이오텍 회사에서 신약개발 책임연구원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이오텍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대표이사와의 면접에서 뜻하지 않은 제안을 받게 됩니다.

독일에 가서 일해 보지 않겠는가?

독일??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죠. 당장 답을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대표이사께는 몇일간의 말미를 주십사하고 아내와 상의를 했습니다. 아내는 중학교 교사였는데요 매우 지친 상태여서 휴직을 하고 싶어했어요. 이 학교가 사립학교여서 휴직을 받으려면 유일하게 해외에 남편이 나가면 3년까지 휴직이 가능했는데요 제가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아내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대표이사의 이야기도 3년간 독일 근무였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독일로 가게 됩니다. 독일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요. 이미 나가 있는 연구원이 독일에서 우리 회사와 공동연구하는 교수 아래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고 대표이사의 누이가 당시 독일 법원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저는 독일 법인 연구소장 직함으로 사실상은 비지니스 사업개발을 맡아서 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던 일도 잘 되어서 마침 독일의 대기업과 몇차례 미팅을 해서 상당히 사업이 진전이 되어 가고 있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독일에 가자 교회를 찾는 것이 가장 문제였는데요. 독일교회 자체가 활성화가 안되어 있고 영어로 예배하는 젊은이들 교회가 있어서 몇달간 가 보았지만 그것도 결국 오래 다니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래 저래 수소문한 끝에 어떤 선교사 한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 분은 군인이셨던 남편과 사별한 여자 선교사이셨는데요 아들과 함께 외롭게 교회를 개척해서 선교하시면서 독일 대학교에서 학위과정을 하시고 계셨어요. 교회에 가보니 한국에서 온 파견 직원들 몇가정과 교환학생들 몇명과 함께 그 선교사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선교사님과 교제를 하면서 이 분이 정말 신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은 지혜를 배우게 되었어요.

사실상 저희로서는 선교사를 통한 선교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이 분의 삶 자체가 Faith Mission이셨고요 그 삶을 오게 된 얘기라든지 살고 계신 삶의 모습, 기도 생활, 그리고 섬기시는 것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이 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시내에 있는 한 교회 건물을 빌려서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참 귀한 일이었고요. 나중에는 근처의 다른 한인 목사님이 하시는 교회와 하나로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독일 바이오텍 회사의 약속은 원래 3년이었는데 회사의 경영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해서 6월경에 대표이사가 오더니 사직을 권고하더군요. 그래서 담판을 하고 8월말까지만 월급을 받되 한국으로 전가족의 이사 및 귀국비용은 지원받도록 사인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한두달 안에 다음에 일할 곳으로 가야할 상황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한국에 있는 회사들에 연락을 해 봤지만 여름 휴가 기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9월이 지나서 새해가 되어야 뭔가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요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당신 이제까지 돈 때문에 항상 공부를 즐기지도 못하고 했는데 이번에 미국에 가서 2년간 우리 돈을 쓰고 포스닥을 하는게 어때요? 대신 좋은 대학교로만 알아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이래서 저는 다시 미국의 명문대학교 연구실에 이메일을 마구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일간은 유기화학 연구실에만 집중적으로 보냈는데 당시 유기화학 연구 Grant 사정이 좋지 않아서 답장이 모두 부정적이었어요. 선교사님께서 이 모든 과정에 저희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고 계셨어요. 그러던 중에 저의 마음 속에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진정으로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라

그래서 생각을 해 봤어요. Nucleoside 연구를 오랜 기간 했잖아요? 이 연구는 결국 RNA나 DNA 연구와 연결이 되는데 저는 항상 도대체 RNA니 Robozyme이니 DNA니 하는게 실제로 어떻게 연구되는지 궁금한 거에요. 그래서 이번에는 명문대학교의 의대나 생물학 연구실로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Yale 대학교의 한 교수님으로 부터 관심이 있다는 답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교수님께 제가 직접 이메일을 드린 기억은 없고 이메일 리스트를 봐도 없더라구요.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나 이제 사택을 비워주어야 하는 날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컴퓨터 코드를 뽑기 전에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거짓말처럼 Offer Letter 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월급과 의료보험을 모두 지원한다는 너무나 감사한 조건으로 말이죠. 우리 가족은 그날 얼마나 함께 뛰며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던 선교사님도 함께 기뻐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독일의 1년과정을 통해 저희들에게 현지 선교 훈련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저는 벤처캐피탈리스트로 2년간 살면서 방황했던 그리고 방탕했던 모든 앙금을 씻고 회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다시 새로운 영으로 회복되어서 Yale University가 있는 New Haven, CT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6)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선교에 대한 부르심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글을 쓰는 이 과정을 통해서 저의 삶에 대한 신앙간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신에게 감사가 넘치는 의미있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셨는가에 대한 것이 저의 Moderna까지 이르는 Biotech Career와 상당히 깊이 연관이 있기 때문에 Moderna를 얘기할 때 하나님과 크리스찬 신앙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오늘도 드디어 제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일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저를 Lunatic이라고 보실 수 있는데요 그래도 있었던 일이고 너무나 생생한 일이기 때문에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저는 뭘 본 건 아니고 단지 한마디의 음성과 성경책을 통해서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써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주님을 만난 여정이 왜 제가 미국에 남아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지의 과정에서도 또 다른 형태로 나오게 됩니다. 단 한번이었다면 우연이었겠지만 그냥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죠.

SK Chemicals 연구소에 입사한 저는 3개월간의 신입사원 연수과정을 마치고 수원공장 안에 있던 연구소 옆의 사원기숙사에서 동기들과 지내게 되었습니다. KAIST 기숙사와 비슷하게 2인1실이었는데 저는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게 된 동기와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서울대 약대 대학원을 나온 친구였는데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덩달아 미국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기숙사방은 자연스럽게 유학준비공부방이 되었죠.

수원공장에는 섬유공장과 석유화학공장이 있어서 직원들이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곳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식당은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제공하고 있었고 당연히 저희들도 회사에서 3식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저녁식사 후에는 방에서 남아서 늦게까지 제 친구와 영어 TOEFL과 GRE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죠.

1월에 입사하고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갔는지 1년이 후딱 지나가 버려서 공부는 거의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시간은 정말 금방 지나간거에요. 12월밤의 어느날 저는 잘못하면 공부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즉,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거죠.

이런 날이 몇일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심각한 상심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영어공부에 쓰는 시간이 시간을 괜스리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들게 된거죠. 그날도 저는 그런 생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저의 마음 속에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읽으라!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너무나 명료했고 분명히 마가복음 10장을 읽으라는 소리였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마가복음 10장을 펴서 1절부터 읽기 시작했죠.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어떤 구절도 마음에 와 닿기는 커녕 의미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저의 눈을 의심하듯이 저의 마음을 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말씀의 마가복음 10장 29절에 이르러서 부터는 읽는 순간 분명히 듣게 됩니다. 음성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이 글자가 그대로 저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 – 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저의 마음에 꽂힌 말씀은 “내 집을 버린 자는…”입니다.

제가 이 날로 부터 7년전에 저는 아버지의 부도와 함께 살던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을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끄집어 내시고 계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이미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이 생각은 저의 마음 속에 분명히 남아서 저의 삶을 끊임없이 무의미한 목표를 향해 달리도록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반드시 돌아와 이 집을 사고 말리라!

대학교 1학년짜리가 장남으로서 어린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 이제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1년이 지난 12월 어느날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통해 다시 들려진 것이죠.

다른 분은 마가복음 10장 29절을 읽고 이런 생각을 못하시겠지만 저는 정말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집이나“에서 그 ““을 읽는 순간 바로 정신이 번쩍 들고 이 날 비로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이후 저는 유학준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마음을 고쳐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선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선배로 부터 강남역에서 매주 토요일 3시부터 10시까지 1년간 전문인선교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1년만에 졸업을 하지 못하고 1년반만에 졸업을 했는데요. 이 훈련을 받는 과정 중에서 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선교로 부르셨다

는 것을요. 즉,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일을 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강의를 듣는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어느날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박사과정을 시작해서 학위를 받고 그 이후 2년간은 열심히 벤처캐피탈리스트로 바이오텍 투자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저는 선교의 일을 계속 했습니다. 교회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선교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선교를 돕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년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에 반드시 알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그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시더라구요.

잠언 16장 9절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저의 삶은 이런 여러가지 여정의 산물이 됩니다. 다음에는 제가 독일과 미국에 까지 가게 된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5) –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 이제 다섯번째 글을 쓰게 되었네요. 저는 이 글을 저의 신앙간증의 형태를 겸비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KAIST 석사과정을 하는동안에 여러가지 인생을 결정해야 할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이 때에도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저를 위해 예비하신 곳으로 저를 정확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KAIST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첫학기를 지나면서 지도교수님과 연구실을 정하게 됩니다. 연구 주제와 교수님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이었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사뭇 심각했습니다. 특히 졸업 후 진로에 도움이 많이 되는 교수님의 경우에는 더욱 들어가기도 어렵고 교수님의 숫자가 12명에서 과기대 교수님 10분을 포함해서 22명이나 되셨기 때문에 36명이었던 지도 교수님 당 받을 수 있는 석사학생의 수는 2명이 채 못되었습니다. 석사과정 학생은 향후 대부분 박사과정 학생이 되고 박사과정 학생이 많을수록 연구실의 연구실적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모든 교수님이 석사과정 학생들을 가능하면 많이 받으시려고 각 연구실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통해서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올 석사과정 학생들을 미리 수소문하는 등 여러가지 눈치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본래 유기화학에서 유명하신 어떤 교수님의 아래에서 배우고 싶었지만 나중에 알게된 바로는 입학성적으로 학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출신 대학에 따라 결정된다는 실망스러운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의 대학은 상위권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는 원하는 교수님의 아래로 가는 대신 유기화학 교수님 중에서 저를 받아주실 수 있는 교수님 아래로 가야했습니다. 다행히 경희대 선배님 중 한분이 계신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은 저의 입학성적을 아시고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선배님이 계신 연구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놀랍게도 동기 2명과 함께 3명이나 그 교수님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실 내에서도 프로젝트가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정하는 것도 실망스럽게도 출신학교 별로 좋은 학교를 나온 학생이 좋은 프로젝트를 받을 수 있어서 저는 처음 6개월간은 다들 받기 싫어하는 프로젝트를 받게 되어서 유기화학반응연구가 아닌 유기화합물 순수정제분리 연구 프로젝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실험실에 오고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시작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개월이 지난 후 어찌된 일인지 저의 프로젝트는 변경되었고 새로운 유기화학반응연구 프로젝트로 배치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Nucleoside Chemistry라는 프로젝트였는데 DNA, RNA의 골격이 되는 Nucleoside 분자의 구조를 수정함으로써 항바이러스제 (Antiviral Agents) 또는 항암제 (Anticancer Agents)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꺼리는 프로젝트였는데 그 이유는 이 물질이 다루기 어려운 물질적 특성 (Physical Properties)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왠지 이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고 Nucleoside라는 분자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연구도 너무나 잘 되어서 금새 반응에 적응하고 데이타를 일주일만에 뽑게 되었습니다.

Nucleoside (1) – 뉴클레오사이드에 꽂히다

석사1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 성적이 나오고 얼마 후 지도교수님이 저를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군, 자네 1학기 성적이 아주 좋아서 2학기까지만 잘 유지하면 조기박사과정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침내 제가 이태석 박사님이 그러셨듯이 조기박사과정으로 갈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기뻤지만 저에게는 당시 말 못할 큰 고민에 빠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욱 어려워진 저의 가정의 상황이었습니다. 대학1학년때 저희 가족은 아파트에서 집달리들에 의해 온집기가 아파트의 지하실로 옮겨지고 쫓겨나는 일을 겪었고 그 날의 경험으로 저는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돈을 벌어서 다시 이 집을 사고야 말리라!

그리고 우리 온가족은 경기도 하남시의 반지하로 옮겨서 몇년간 월세를 살게 되었고 교회와 너무 멀었던 것 때문에 우리는 다시 잠실에 있는 어느 상가건물에 공동화장실을 쓰는 방한칸인 집으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엌도 없어서 아버지께서 약식으로 건물 밖에 간이부엌을 만드셔서 어머니께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만든 상태였습니다.

주중에는 저만의 기숙사 생활로 저자신은 편하게 지냈지만 주말에 집에 갈 때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되니 제가 편하게 더이상 공부만 하고 있어서는 우리 가족의 어려움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도교수님으로 부터 성적이 좋아서 조기박사과정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즐거워 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죠.

오히려 저의 상황을 교수님께 설명을 드려봤자 교수님이 하실 말씀이야 참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저는 어리석게도 2학기 성적을 반대로 깔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역시 2학기 성적은 좋지가 않았고 당연히 지도교수님의 핀잔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에게 이미 지도교수님의 핀잔이나 박사학위 등에 대한 것은 이미 사치 그 자체였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빨리 취직을 해서 우리 가족의 열악한 경제상황에 도움을 주고 새로운 집도 얻게 할 것인가에 저의 생각은 온통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저의 동기 나머지 2명도 박사과정으로 가지 않고 석사로 졸업하고 취직하기로 결정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저는 지도교수님의 박사과정 진학을 하라는 종용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상당기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결심이 확고하고 가정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신 교수님의 포기가 있으셨고 우리 대신 졸업생 중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할 선배 2분을 찾으신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KAIST 석사들은 대기업에서 모셔가는 분위기여서 한 사람 당 2-3개 회사의 오퍼를 쉽게 쥘 수 있었고 이 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 (?)을 제시하는 곳으로 골라서 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조건이라면 대부분 박사학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어떤 회사는 2년 입사 후 바로 박사과정을 보내주는 조건도 있었고 해외 박사과정 유학을 조건으로 내거는 회사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2군데 정도의 오퍼를 이미 받은 상태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 보다는 나의 지도박사과정 선배를 통해 알게된 대기업에 있는 어떤 박사님이 Nucleoside 신약개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회사는 우리학교에 리쿠르터를 보내지 않아서 공채를 통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5년간 회사가 투자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회사의 실적도 좋지 않았고 당연히 월급도 다른 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좋은 회사는 이와 정반대의 회사였습니다. 소위 가장 좋은 회사는…

  • 월급이 많은 회사, 보너스도 많은 회사
  • 일은 상대적으로 적은 회사
  • 대기업
  • 박사학위 등등 소위 조건이 좋은 회사

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저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특히 저의 상황이 큰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회사는 타이어 회사로 고분자화학연구를 하는 회사였는데 조건은 놀랍게도 1년 입사 후 박사과정 진학이었고 월급도 가장 높았습니다.

결정을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저는 갑자기 하나님께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까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마음만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요일에 KAIST안에 있는 과학원교회에서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예배에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 예배는 졸업할 학생들을 위한 “졸업예배“였습니다.

이 졸업예배의 목사님의 설교제목은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 이셨고 골로새서 3장 22절-24절 말씀으로 제가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4절 말씀: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날 목사님의 말씀은 세상의 기준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대략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하나님이 여러분을 교육시키시고 훈련시켰음을 기억하십시오.
  • 자신의 전공에 맞는 회사가 중소기업이거나 월급이 적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회사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 회사가 고용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용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박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가야할 회사가 곧바로 명확하게 정해져서 다가왔습니다.

바로 Nucleoside를 하는 박사님이 계신 대기업 – SK Chemicals 였던 것이죠. 바로 이 회사가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회사라는 것이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제가 한 연구가 Nucleoside 연구였고 이 회사는 당연히 일은 많고 월급이 적은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그 회사 인사과에 연락을 해서 면접 일정을 잡았고 아무런 조건이 없는 이 회사에 저는 조건없이 공채를 통해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Nucleoside 박사님이 저를 받아주셔서 저는 그 연구실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고 5년간이나 다닐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제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이사의 교체가 있었고 그 이후 제가 근무한 5년간 회사는 그동안의 나쁜 실적을 만회하고도 남는 우수한 실적으로 회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얼마간의 저축은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를 아버지께 드려서 아버지가 그 이후 사업을 다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에 다닌지 3년만에 모은 돈과 회사를 통해 얻은 대출을 합쳐서 우리는 사당동에 방3개가 있고 화장실도 별도로 모든 것이 잘 정돈된 빌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좋았던 것은 회사에 다닌지 몇년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가 아버지가 신학대학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목회의 길로 가지 않고 사업의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어머니는 아버지나 우리들 중에 목회자가 나오게 해 달라고 오랜동안 기도하고 계셨는데 아무도 목회에는 가지 않게 되어서 고민을 하시고 계셨는데 그러던 중 어머니 자신이 목회를 하라는 말씀을 받으셨다고 하시면 어떤 여성목회신학원 원서를 가지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집까지 이사하게 되시니 감사의 마음이 너무나 크신 것이었죠.

먼저 아버지께 이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셨지만 아버지는 이미 상황 때문에 안된다는 거절을 당하신 상태였는데 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공부에 대한 좌절을 항상 마음에 걸려하던 터라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저는 어머니께 제가 등록금을 내어 드리겠으니 하시라고 하고 첫번째 등록금을 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첫학기를 즐겁게 하셨는데 그 중에 그 소식을 들으신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이 제안하셔서 어머니께서 교회의 전도사로 일을 하실 수 있게 되고 그 월급을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하실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해 전 말기암으로 3-4개월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병상을 지키며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이런 저런 과거 얘기를 하던 중에 어머니께서 이 신학원 공부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머니의 납골당에는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신학대학원 졸업사진”과 학사모 사진과 학위증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우리 어머니는 중졸이시라고 얘기하는데 제 아내가 고쳐 말하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어머니, 대학원 졸업이셔!”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고용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여러가지로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의 삶이 점차 나아짐을 통해서 분명히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

이 말씀은 저의 삶의 모토가 되었고 독일과 미국에 살게 될 때에도 지역과 고용주의 변화와 무관하게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

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4) – 나의 Mentor 이태석 박사님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종종 주위의 사람들이 저를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계획하심의 과정 중에 Moderna가 있을 따름이지 제가 무슨 대운이 있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미 저의 앞의 글을 읽으셨다면 조금은 이해를 하시지 않을까 기대해 보며 4번째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이태석 박사님은 저를 특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반갑게도 이태석 박사님도 신실한 크리스찬이셨고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성품도 매우 온화하시고 언제 나 웃으셨을뿐만 아니라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도 조용히 웃으시고 핀잔 한번 없이 조곤조곤 상세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16주간 이태석 박사님과의 만남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 평생을 잇는 멘토와의 만남으로 발전하게 되어서 제가 진로를 정하고 커리어 상에 중간 중간 고비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셔서 저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과 격려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태석 박사님과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유기화학에 대해서 배울뿐만 아니라 이태석 박사님의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접근방식등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함께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작 학부 1학년 학생인 저에게 이태석 박사님은 큰 산과 같은 분이었고 평생의 멘토가 되어 주셨습니다. 실험의 중요성과 항상 실험실에서 플라스크를 놓치 않고 일을 해야한다는 가르침은 저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 제가 지금까지도 실험실에서 연구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도 중창이나 합창을 좋아했는데 이태석 박사님도 대학 합창반 활동을 하시며 형수님을 만나시는 등 많은 부분에서 저와 이태석 박사님은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한가지 차이점은 제가 가지지 못한 온유함이었는데 차갑고 냉정했던 저에게 이태석 박사님이 한결같이 보여주신 온유함은 큰 위로가 됨과 동시에 정확히 가야하는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르쳐주시는 삶의 이정표가 되어 주셨습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크리스찬의 표현인데요 남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되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단호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태석 박사님을 통해서 KAIST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전액 국비장학금 제도, 식비 등 생활비 지원 제도, 기숙사 생활관, 조기박사제도 (석사입학 1년 후 성적에 따라 바로 박사학위과정으로 진입하여 4년만에 석박사학위를 동시에 끝내는 고속학위과정), 석사입학 병역특례제도 (KAIST 석사과정 입학과 동시에 5년간의 병역특례를 받음으로써 석사과정 이후 기업체에서 3년만 근무하면 병역이 마쳐지는 제도 – 당시 타대학교에는 없어서 기업체에서 5년간 병역특례를 받아야 병역을 마칠 수 있었슴 따라서 KAIST출신은 병역기간이 2년 단축되는 효과로 조기 유학이 가능해짐) 등등 다양한 실생활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 만남을 통해서 제가 KAIST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 조기박사가 될 수 있다면 박사학위까지 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나온 이후에 다니던 바이오텍 회사가 Merck에 인수되면서 전직원이 정리해고가 되었을 때 이태석 박사님이 대표로 계시던 바이오텍 회사의 경영진이 이 박사님과 대치되는 임원을 영입하면서 그 중 사장급 임원이 저에게 조인하기를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절했죠. 나중에 그 사장급 임원이 저와 이태석 박사님의 관계가 그렇게 깊은 줄 몰랐다면서 저에게 사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만큼 이태석 박사님을 존경했고 평생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태석 박사님께 도움은 되지 못할 지언정 피해를 드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대학교 2학년부터 KAIST를 일찌감치 저의 다음번 진로로 생각하고 준비를 했고요 그 생각은 KAIST가 홍릉에서 대전으로 이전하고 과학기술대학교와 합병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생각은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저의 동기들은 KAIST 이전 발표가 나면서 다른 대학원으로 진로를 변경했는데 저만은 시험을 치루었고 좋은 성적으로 KAIST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KAIST에 입학하고 대전 캠퍼스의 기숙사에 살게 되었을 때 한번은 당시 화학연구소 (KRICT)에서 근무하시던 이태석 박사님 연구실에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도 즐겁게 맞이해 주셨고 제가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에는 바이오텍을 창업하셔서 KAIST내에 있는 보육센터에 계셨는데 그 때에도 종종 찾아뵈면 언제든지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연구실에 계셨습니다. 진정한 연구자이셨던 것이죠.

KAIST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때부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주위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겸손해라. 네가 가장 못났다고 여기고 항상 배우고자 노력해라. 절대로 나대지 마라”

이런 말씀을 해 주셔서 저는 다행히 그 잘난 동기들이나 선배님들 사이에서도 제가 가야할 배움의 길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보다 더 이태석 박사님이 처음 KAIST에 들어오신 후에 겪으셨을 많은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경희대학교에서는 물론 레전드가 되셨지만 막상 KAIST 안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왜 없으셨겠어요? 하지만 그럴 때에도 특유의 낙천적이로 긍정적인 자세로 잘 헤쳐 나시고 동기들하고도 관계를 잘 맺으셨기 때문에 무사하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박사학위를 마치셨습니다. 저에게 유기화학을 가르쳐 주시던 때가 벌써 박사님이 마지막 학기를 향해 가는 시기셨어요. 졸업논문 디펜스 등 바쁘셨을 때인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게 여깁니다.

또 하나는 이태석 박사님께 유기화학을 배운 것 때문에 저도 유기화학자가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기화학을 배운 교수님이 계신데 저는 유기화학을 배운 첫번째 교수님이 이태석 박사님이십니다. 물론 이태석 박사님은 그때 그냥 박사과정 학생일뿐 교수 신분은 아니셨지만 제 마음에는 이미 첫번째 교수님이시자 마지막 교수님이시죠.

제가 KAIST에 입학 후 조기박사를 포기하고 석사졸업 결정을 했을 때 아쉬워하셨고요. 제가 대기업을 다니고 나서 다시 KAIST에 박사학위과정에 들어왔을 때는 기뻐해 주셨고 잘한 결정이라고 칭찬해 주셨고요 제가 독일로 나가게 되었을 때에는 격려해 주셨습니다.

항상 모든 면에서 저의 멘토이시면서 큰 산으로 언제나 우뚝 서 계십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3) –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지난번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를 대학에 보내시고 졸업까지 이끄셨는가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제목은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께서 매일밤 저의 대학입학을 위해 하나님을 붙드시고 절규하며 철야기도를 하셨던 것 때문일까? 저는 결국 대학에 기적과 같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저를 담금질하셔서 졸업까지 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로 저의 가방끈을 늘이신 것입니다.

제가 고3이 되던 해에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입시를 위한 학부모 100일 철야기도”를 한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발표가 있던 시기는 이미 우리집은 부도와 상실감에 빠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에게는 대학에 가야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 100일 철야기도에는 수험생이던 우리들의 기도제목을 내야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철야기도를 할 수 있게된 것을 매우 기뻐하시며 상기된 얼굴로 하루는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기도제목을 뭐라고 적으면 좋겠니?”

고등학교 육성회비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대학 등록금이 나올리 없는 저로서는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국 전액장학금 밖에 없고 대학도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학보다는 등록금이 비교적 저렴한 국립대학을 가야되지 않겠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현재의 상황에서는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꿈일뿐이었죠. 그래서 어머니께 반 체념한 상태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국립대학 전액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어요. 입학시험 만점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는 저의 너무나 큰 (?) 기도제목에 너무나 기뻐하시며 저의 대학입시 기도제목을 교회에 내셨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교회성도들은 저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셨고 제가 어떤 성적으로 대학에 가게될지 은근히 기대마저 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미 여러상황은 제가 공부에 집중하기에 너무나 저의 머리는 복잡했습니다. 심지어 입시공부가 막바지이던 시절에는 경찰들과의 출현했던 날 이후로 저는 이미 대학에 가는 것을 포기한 상태로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읽는데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입학시험 만점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었죠.

저는 포기했지만 그러나 저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계셨고 매일 기도를 하시고 오셔서는 저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성도들이 너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고 있어!”

포기하지 않으신 분은 어머니 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닛시 (하나님은 승리하신다)나 여호와샬롬 (하나님은 평화를 주신다)와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죠. 나중에 대학부에 가서 배운 단어 중에 저에 대한 하나님을 잘 설명한 단어 하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은 준비하신다.

시간이 지나 결국 대학입시의 날이 되었고 저는 시험을 무사히 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치른 몇일 후 점수를 받게 되었고 당연히 학력고사 만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았지만 그래도 고2때까지 공부는 좀 하는 편이어서 대학을 아주 못 갈 성적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저를 대학에는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고 제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담임선생님과 애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희 학교는 강남8학군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3개 대학에 반에서 20-25등까지는 보내려는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노력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담임선생님도 저를 연세대나 고려대 정도는 보내려고 하셨는데 문제는 저의 대입성적이 저조했고 저의 상황이 전액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루는 저를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성적이라면 연세대 원주캠퍼스에 있는 보건학과에 가면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보건학과를 졸업하면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어. 여기에 지원해 보자!”

하지만 저의 생각은 좀 달랐어요. 아버지의 부도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만약 정말 만약 대학을 갈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고 공부기간이 짧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의미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외할아버지는 당시 중풍을 앓고 계셨는데 삼촌이 한의사가 되어서 가업을 잇기를 원하셨지만 한의대에 가지 않고 일반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고 계셨기 때문에 많이 상심하신 상태였어요. 저는 편찮으신 외할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한의대를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하셨어요.

당시에는 전국에 한의대가 있는 대학은 5개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 전기에 있는 대학은 3개밖에 되지 않았어요. 제일 좋은 대학은 경희대학교 한의대였고 두번째는 원광대학교 한의대였습니다. 그리고 대구한의대라는 단과대학이 있었습니다.

제 머리속에는 조금이라도 입학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에 지원할 필요가 있어서 원광대학교 원서를 얻어야 했어요. 교보문고에서 원광대학교 원서를 교부한다고 해서 두번이나 찾으러 갔지만 어쩐 일인지 2천여장의 원서는 금방 동이 나버려서 저는 원광대학교 원서는 손에 쥐지 못하고 대구한의대 원서만 간신히 얻은 상태였어요. 그날까지 원서를 얻지 못하면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조급해 하며 종로에서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제 마음속에 드는거에요.

“경희대로 가자! 경희대 한의대에도 가능성이 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는 교보문고로 가던 발길을 180도 돌려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경희대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삶이 180도 바뀌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어요. 이미 시간이 2시를 넘어서고 경희대학교에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찾는데 애를 먹어서 5시쯤 되어서야 경희대학교에서 마침내 원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밤 경희대와 대구한의대 원서를 가져온 저를 보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깜짝 놀라셔서 한참동안 아무말도 못하셨어요. 그러더니 아버지께서 갑자기 생각이 나셨는지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 한번 해보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지원을 해보자!”

저의 결정을 들으신 담임선생님은 펄쩍 뛰셨습니다. 안된다는 거에요. 왜 연세대 보건학과를 가면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어려운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모험을 거느냐는 거였죠. 그것도 그럴 것이 경희대학교 한의대는 서울대생도 자퇴하고 다시 입학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곳이었고 평생이 보장되는 그런 곳이었어요. 예과2년 본과4년 합쳐서 6년만 공부하고 졸업하면 개업해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학부모들과 수험생 사이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이렇게 펄쩍 뛰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저희 아버지도 완강하셨어요. 저를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담임선생님과 각을 세우시고 저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주셨지요. 지금도 그 날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싸우시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어요. 결국 담임선생님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아신듯 원서를 던져 놓으시고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저는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지망을 어디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어요.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2지망은 화학과가 어떻겠니? 화학과에 가면 화학회사나 교사도 될 수 있고 제약회사에 다닐 수도 있어.”

아버지는 화공약품회사를 하셨기 때문에 화학전공자가 아니었던 것이 한이셨던 모양이에요. 아마 그래서 화학과로 저를 이끄신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저는 사실 화학보다는 물리를 더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원서를 들고 경희대 접수대로 갔는데 그 접수하는 분이 원서를 가만히 보시더니 저에게 그러시는거에요. 화학과 수원이요? 서울이에요?

알고보니 화학과가 서울캠퍼스와 수원캠퍼스에 있는데 그 사실도 처음 알았지만 저는 당연히 제가 서울캠퍼스에 지원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수원캠퍼스에 있는 화학과로 지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무원의 도움으로 저는 1지망 한의과 2지망 화학과로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 발표가 나기 하루 전에 저는 고열이 흐르며 많이 아팠습니다. 지원을 하고 나니 한의과의 경쟁률이 너무 높았습니다. 거의 기적이 있지 않고는 합격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이제 정말 대학은 안되나보다!’라고 생각이 들은 나머지 저는 그날밤 너무나 많이 아팠습니다. 꿈을 잃은 자의 마지막 절규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교회에는 경희대 한의과 교수이신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 분을 통해 부모님은 제 이름이 한의과 명단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아셨다고 해요.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저로서는 이 시간이 제 평생에 꿀 수 있는 마지막 대학입시의 꿈의 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다음날 아버지와 저는 경희대의 발표장으로 갔고 역시 한의과에는 아무리 몇번을 봐도 제 이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낙심하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아버지가 크게 저를 부르시는거에요.

“합격했다! 합격했어! 화학과에 합격했어! 축하한다! 정말 수고가 많았다! 축하한다! 축하해!”

하며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시며 저의 등을 두드리셨습니다. 이게 제가 화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얘기에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화학이라는 학문. 고등학교 화학선생님은 무조건 외우라고 이론보다는 암기법만 가르치셔서 저는 그 때까지 화학이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국사같은 학문일거라고 생각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입학을 하게 된 저는 이제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화학과에 들어왔으니 이 화학과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든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아니면 다른 식으로 돈을 벌어서 어떻게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야하는 길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저에게 이미 재수는 안된다고 말씀을 하시고 현재 입학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종용을 하는 상황이었어요.

대학입학이 결정된 후 겨울에 대학부의 첫번째 수련회가 있었는데 이 수련회 강사 목사님은 최이우 목사님이라는 분이셨어요. 이번 수련회는 금식 수련회여서 3일간 금식을 하는 것이었는데 수련회가 끝나는 날 목사님께서 새로운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3일간 금식 수련회를 했는데 이 금식기간을 40일로 늘여서 아침만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이렇게 해서 저는 40일간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아침식사를 먹을 돈도 없었기 때문에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매일 12시가 되기 까지 그 전날 6시부터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의 기도제목은 한가지 였습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대학 입학 후 제가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고 도서관은 4년간 제가 보낸 저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입학하자마자 저는 일반화학 (General Chemistry) 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어요. 다행히 일반 물리 (General Physics)와 일반생물 (General Biology)도 수강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역시 일반물리가 가장 재미있었고요. 일반화학은 그 다음이었어요. 그래도 그나마 공부를 해보니 일반화학이 그동안 알던 암기과목이 아니라 나름의 원리와 이론이 있는 과학이라는 것을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점점 화학이라는 학문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몇개월이 지나고 나서 2학년 선배가 도서관에 처박혀있는 저를 불러서 갑자기 두분의 KAIST선배를 소개시켜 주시는 것이었어요. 그 중 한분은 경희대학교 화학과에서 최초로 KAIST에 가신 이태석 박사님이셨고 다른 한분은 그 분의 후배로 역시 KAIST에서 조기박사로 박사과정을 하시고 계신 김경수 박사님이셨어요. 당시에 KAIST가 경희대 바로 옆 홍릉캠퍼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마침 학교에 잠깐 들르신 것인데 2학년 선배님이 저를 눈여겨 두셨다가 이 분이 오셨을 때 소개를 해 주신 것이었죠. 사실 그 때 저는 화학과 동기들 9명과 함께 2학년 전공서적인 유기화학 (Organic Chemistry) 원서를 함께 읽으면서 스터디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 선배님들이 저를 찾은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 자리에서 뜻밖에 제안을 해 주셨어요. 이태석 박사님께서 겨울방학 기간동안 우리를 근처 카페에서 데리고 유기화학책 스터디를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저로서는 너무나 감사했죠. 영어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이 개념이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KAIST에서 조기박사로 박사과정을 하시는 대선배님이 무료로 커피를 사주시면서 스터디를 해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든든한 것이겠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1학년 겨울방학동안 매주 1 Chapter씩 16주간에 걸쳐서 스터디를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을 했지만 하나 둘 떨어져 나가서 결국 저와 2명의 친구가 끝까지 남게 되었고 이 친구와 저는 졸업때까지 전액장학금 1명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가 되게 됩니다. 그렇게 이태석 박사님과 즐거운 겨울방학을 지내고 난 후 유기화학 첫 강의를 듣는 순간부터 저의 머리속은 갑자기 유기화학의 모든 원리가 차곡차곡 정돈되기 시작했고 매번 1등을 놓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다른 전공과목에서도 저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특히 물리화학 (Physical Chemistry)를 잘했고 다른 두개의 전공과목도 공부를 잘해서 2학년까지 전체 수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선배님때까지 전통이 하나 있었는데 매년 한명씩 1-2학년 전체수석은 졸업 때까지 전액장학금을 주는 삼의원장학금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당연히 우리 때에는 제가 그 대상자가 되었는데요 무슨 일인지 그 해 부터는 학부생을 주는 대신 대학원생을 주기로 결정이 되어 버려서 저는 이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저는 나머지 2년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 때까지 계속해서 수석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게 되면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 하신 100일간의 철야기도와 수련회와 함께 한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도록 저를 기도로 준비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KAIST 선배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제가 가장 최상의 조건에서 전공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셔서 대학 졸업까지 무사히 (?) 전액장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이 뿐이 아니셨어요. 이후에도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길로 이미 인도하신 큰 계획을 가지고 저를 계속해서 인도해 주셨어요.

고3 시절 1학년때 맞았던 아버지의 부도, 대학입시를 위한 100일 학무모 철야기도회, 경찰과의 극한 대치의 날, 함석헌 선생님의 두권의 책, 40일간의 아침금식기도, 경희대학교 화학과에 2지망으로 입학하고 KAIST 선배님이신 이태석 박사님께 배울 수 있었던 16주간의 즐거웠던 스터디 생활 등등…

너무나 모든 과정이 마치 자로 잰듯이 정확히 계획된 놀라운 하나님의 준비하심..

이 준비하심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오히려 점점더 커지게 됩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2) –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나의 모더나 이야기 (My Biotech Memoir – Moderna)”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사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일정한 직업 없이 건축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집을 짓고 되팔고를 반복하시는 바람에 저의 집은 어려서 부터 항상 이사를 다녔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한번은 어느날 아버지께서 집을 판 대금을 현금으로 들고 오셔서 온가족이 둘러앉아 그 돈다발을 함께 세고 큰 돈 단위로 돈묶음을 해서 전체 받은 금액을 함께 오랜 시간 센 기억이 있습니다. 그 날은 모두들 그 많은 돈에 신기해 하고 약간의 흥분 속에서 돈다발을 즐겁게 세었는데 그 일이 있고 몇일 후에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이 팔렸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항상 이사를 다니다 보니 오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어느 정도 가까워질 무렵이 되면 우리집은 또다시 이사를 해야했기에 결국 인사도 못하고 친구와 헤어지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는 이사하는 일과 친구를 사귀고 헤어지고 하는 일이 친구 좋아할 어린 나이의 소년이 겪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이사를 많이 한 덕분(?)인지 몰라도 저는 어느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모험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건축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차를 운전해서 가끔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계곡이나 산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차를 운전하실 때에는 좋아하시는 이탈리아 가곡을 큰 소리로 멋지게 불러주셔서 우리들은 잦은 이사를 하는 어려운 과정 중에도 가족들 간에는 화목함을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쾌활한 성격이셨지만 자신이 4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께서 벌어놓으신 돈을 주식투자로 다 날리시고 그 충격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려서 부터 아버지 없는 설움과 그 허전함을 느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저희 3남매들에게는 언제나 친구처럼 잘 놀아주시고 TV에 나오는 만화영화도 우리와 꼭 함께 보시면서 함께 어린이처럼 즐거워해 주시는 좋은 친구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한약방을 하시는 외할아버지의 첫째딸이셨는데 성격이 차분하시고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시던 동네가 깡시골이어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할 충분한 성적이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여자가 무슨 고등학교를 가냐는 핀잔과 반대로 인해 중학교까지만 다니게 되어서 항상 배움에 대한 갈망이 크셨습니다. 특히 어머니는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으로 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셔서 학교를 졸업하신 이후에도 가끔 저희에게 그 때 배우셨던 영어실력을 보여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저는 어려서부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고 언어 습득도 빠른 편이었습니다. 특히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어민 영어테이프를 선물받아서 원어민의 발음대로 듣고 읽는 습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저의 발음이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하게 된 계기가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건축일이 워낙 부침이 심하고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도 부족한 살림을 채우시기 위해서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다만 중졸 학력으로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어서 화장품 장사를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시면서 주위 아주머니들의 비위를 맞추시거나 야쿠르트 아줌마 일을 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저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해서 친구의 집에서 나오시는 어머니를 못본채하고 숨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어리석은 아들이었던 것이 확실하죠.

그렇게 이사가 잦다 보니 교회도 계속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저희 집안은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죽으셨다가 기도를 몇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크리스찬이 되셨고 그 이후에 제가 4대째 크리스찬인 오랜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으로 저의 아버지는 신학대학교를 나오셨는데 목회에 큰 뜻이 없으시고 오히려 정치에 관심이 많으셔서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망도 있으셨지만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장사를 주로 하시고 계셨던 것이죠. 제가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희들의 교육을 위해 이제 더이상 이사를 다니면 안되겠다고 결정을 하시고 강남8학군이 있는 선릉역 부근에 28평형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방이 3개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는 안방을 쓰시고 막내 여동생이 방 하나를 혼자 쓰고 나머지 한방은 저와 제 남동생이 함께 쓰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2층침대에서 저는 2층에서 자고 동생은 1층에서 잤는데 처음에는 2층에서 자다가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서 처음 몇일간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금새 익숙해져서 몇일 지나지 않아 잠을 아주 쿨쿨 잘 잘 수 있게 되었죠.

새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이제 교회도 정하게 되었어요. 처음에 가본 교회는 좀 신기했습니다. 교회가 압구정이라는 무슨 밭 사이에 있었는데 큰 허허벌판에 엄청 큰 천막이 크게 쳐진 그런 천막교회였습니다. 그전에도 천막교회나 비닐하우스 교회는 많이 다녀봤지만 그렇게 큰 천막교회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그 천막교회까지 가는 버스는 딱 한대 뿐이었는데 천막교회 주위에는 진흙탕 가득한 밭을 고르고 그 위에 고층아파트가 올라가는 중이었어요.

그 천막교회는 지금의 광림교회가 되었고 그 때 올라가던 고층아파트는 현대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모님의 훌륭한 결단과 헌신 덕분에 소위 잘 나가는 강남8학군에서 질 좋은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도 멀지 않았고 훌륭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나름대로 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본래 신앙이 없는 상태로 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니는 광림교회를 통해서 신앙을 가지게 되셨고 점차 어머니의 신앙은 깊어져 갔습니다. 반면 아버지는 새로 시작한 화공약품사업을 배우고 성장시키느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는데 그러는 중에 평소 하지 않던 술, 담배, 골프 등에 빠지기 시작했고 어느 시기 부터 이에 대해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기 시작해서 급기야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환경은 좋은 곳으로 옮겨졌지만 그와는 반대로 가족의 화목은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죠. 가정 폭력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갔고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는 날에는 나는 두동생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근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소리를 밤새 듣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밤 늦게 나타나서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시는데 이전과는 달리 내 마음속에 가만히 보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를 때리시는 술에 취한 아버지와 정면으로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고등학생이 되어 키도 아버지보다 커지고 몸도 좋았기 때문에 몇번 아버지를 밀치고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게 저항하니 아버지도 결국 포기하고 앉은 채로 몇마디 하신 후 더이상의 폭력없이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이후로는 더이상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끔 일이 바쁘신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아지고 뭔지 모를 위험신호는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라며 저와 동생들은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고3이 되던 해 1월 우리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사업이 크게 부도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집과 친척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고 어느날에는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상심해 계시고 집에 있는 모든 가구와 집기들에는 빨간 딱지가 여기저기 붙여진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에도 오지 못하시고 경찰에 쫓기는 상태가 되어서 어수선한 상태여서 저는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장남인 저로서는 불안해 하는 동생들을 안심시키는 것과 함께 낙담하시고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하는데 온통 정신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다행히 어머니는 교회에서 기도하시는 생활을 통해 이 어려운 상황을 신앙심으로 극복하고 계셨고 많은 주위의 믿는 분들이 때로는 음식을 보내주시기도 하고 돈을 보태 주시기도 하시는 등 어려워진 우리 가정을 돌봐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어머니께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시려고 노력해 오신 것이 이 어려운 때에 도움의 손길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대입시험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날 그날은 늦가을 날씨가 정말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월 이후로 집에 한번도 오시지 못하고 도망을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저녁 늦은 시간에 잠깐 집에 들르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의 당당했던 그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고 너무나 야위고 의기소침한 거의 노숙자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살도 많이 빠지시고 목소리에는 전혀 기운이 없으셨어요. 그래도 그나마 그날만큼은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우리 온 가족은 차분한 마음이 되어서 어머니께서 준비하시는 맛있는 저녁식사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리고 아파트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두명의 건장한 사복경찰이 현관문으로 막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몇일동안 사복경찰들이 우리 아파트 앞에서 잠복해서 아버지가 나타나기만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경찰들이 갑자기 들이 닥친 것이죠. 저는 그 순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크게 벌리고 아파트 현관을 막아섰고 아파트의 문이 열린 상태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크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수색영장이 없이는 당신들은 한발짝도 이 집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집으로 들어오려던 사복경찰들은 순간 당황한 듯 멈칫하는 기색이었죠. 당연히 수색영장이든 어떤 영장이든 가져왔을리가 없으니까요. 몇차례 집으로 들어오려는 경찰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어디서 나에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이렇게 모든 식구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순순히 경찰의 손에 넘겨줄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몇분간 대치하는데 어머니께서 음식 준비를 하시다가 급히 나오셔서 두분의 사복경찰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시고는

“동네 사람들에게 소란을 끼치면 민폐가 되니 잠시 잠깐 저와 함께 나가시죠.”

라고 하시고는 두분의 경찰들과 함께 잠시 나가셨습니다. 경찰들과 어머니가 나간 후 저는 현관문을 닫고 집안을 둘러보는데 어디로 숨으셨는지 아버지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즈막이 저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날 너무도 초라하게 뚜껑이 덮인 변기위에 앉아 있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말이지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듯이 힘없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들어오시라고 해…”

그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알았노라고 말씀드리고 다시 현관 밖으로 나가서 저으기 멀치감치 떨어져서 아직도 어머니의 사정을 듣고 있는 경찰들에게 다가가 완전한 체념한 상태가 되어 이제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왠일인지 이 사복경찰들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이제 와서 네 아버지를 빼 돌리고 우리를 들어오라고 하는 걸 우리가 모를 것 같으냐? 에이씨!”

이러고 경찰들은 돌아가 버리고 그 날의 상황은 그렇게 종료가 되었습니다.

경찰들이 돌아가고 나서 다시 어머니는 급히 저녁식사를 차리시고 우리 모두는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그날 우리가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특히 저는 경찰들과 짧은 순간 겪었던 초긴장 상황의 극한 대치상황과 이후 다시 경찰들이 돌아와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버지는 이미 집에 계시지 않았고 저와 동생들은 어머니의 독려로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저에게 대학을 간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며 이미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입시 공부에서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미 몇달간 담임선생님이 몇십만원하던 육성회비를 가져와야 학교를 더 다닐 수 있다고 윽박지르고 이미 최종 통첩까지 받은 상태여서 이제 수일 내로 학교에서 내쳐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따라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조용히 교무실로 부르시더니 오늘 친구의 어머니께서 저 대신 육성회비를 주시면서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얘기해 주셨고 선생님이 교사 회의를 통해서 졸업 때까지는 육성회비를 장학금 형태로 주시기로 하셨다는 감사한 말씀을 해 주셔서 저는 다행히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마음속으로 이미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이미 가지 않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의 그런 마음을 모르신채 교회에 가셔서 열심히 저를 위해 매일밤 다른 학부형들과 목사님과 대학입시를 위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터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교과서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교과서는 접어두고 이제 대신 그동안 보지 못한 책을 몇권 읽어볼 요량으로 아버지의 책꽂이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저의 평생의 지침이 되어 준 두권의 철학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책은 함석헌님의 “씨알은 외롭지 않다.“였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씨알”은 저와 같은 민초를 얘기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치열하게 사셨던 함석헌님의 삶과 삶의 철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함석헌님은 군부독재시절 수차례 감옥에 가시게 되셨는데 본인은 그것을 오히려 “대학에 간다”고 표현을 하시더라고요. 감옥 안에서 사색하며 배운 것이 대학을 다니며 배운 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신 것이죠. 함석헌님도 크리스찬입니다. 함석헌님이 치열한 삶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평정심을 찾으시는 모습을 책속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이 책을 통해 저는 저의 현재 어려운 상황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씨알은 외롭지 않다”를 다 읽고 나서 저의 어려운 상황을 이길 힘을 얻은 저는 다른 함석헌님의 책에 손길이 갔습니다. 그 책은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함석헌님의 저항과 투옥을 하게 된 배경 등 그 분의 인생이 다양한 우여곡절과 질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은 한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덤덤하게 쓰신 책이었습니다.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저는 지금의 상황에 흔들리기 보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지 간에 그 상황이나 결과에 흔들림이 없이 내가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올곳이 흔들림 없이 가면 된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꿈을 포기한 어린 저에게 단비와 같은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수년이 지나 나중에 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아버지는 함석헌 선생님을 꽤 존경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이셨는데도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대학교 때 읽은 이후로 함석헌 선생님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아버지의 책장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이 귀한 두권의 책을 통해서 아버지의 부재를 견딜수 있고 이후 저의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견뎌나갈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몇년전 세상을 떠나셨지만 선생님의 힘있는 어조는 저의 삶 속에 여전히 남아 힘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 글도 혹시 어려운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분에게 제가 어려서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통해 힘과 결의를 다졌듯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1) – Prelog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몇분이 그동안 저에게 제안하시길 Moderna에 다녔던 경험을 책으로 써서 나누면 좋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랜 기간 곰곰히 고민을 하다가 이제 그래도 시작은 해보자는 생각으로 블로그에 그동안 제가 살면서 느끼던 경험들을 조금씩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마 이 글은 제가 젊었을 때 어려운 상황들, 이루려던 꿈, 그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들에 대해 조금씩 적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초고는 항상 부족한 법이지만 블로그의 특성상 글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을 것 같고요. 다만 제가생각하는 생각의 틀의 한도안에서 써 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저의 책꽂이에는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게 지침이 되어 준 몇권의 책이 있는데요 이 책들은 저를 북돋아 준 좋은 책들이고 멘토들입니다. 그 책을 아래에 열거해 보려고 합니다.

Book Club (1) – Medicine, Science and Merck by Roy Vagelos and Louis Galambos – 이 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Merck의 CEO이셨고 Regeneron의 Chairman 으로 30년을 섬기신 Roy Vagelos 박사님의 인생 여정을 담은 글입니다. 이 분의 책을읽을 수 있었던 것은 참 우연히도 제가 다니던 이전 Biotech 회사가 Merck에 M&A되면서 Merck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우연히 회사에서 가져가고 싶은 사람은 읽어도 좋다는 책이었고요 이 책은 이후 저의 커리어에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Roy Vagelos 박사님은 Merck의 80-90년대 중흥기를 이끄신 분으로 그 기간동안 본인이 겪었던 신약개발 스토리를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 주시고 계십니다.

두번째 책은 “성경대로 비즈니스 하기 Proverb 31“- 하형록 지음 – 저의 오랜 교회친구가 우연히 보스턴을 방문했다가 저에게 책 두권을 선물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책이고 다른 하나는 하형록 대표님이 쓰신 다른 책인 “성경대로 세상살기 WISDOM 31″입니다. 두 권이 조금 입장은 다르지만 같은 분이 쓰신 만큼 내용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제가 써야 하는 글도 결국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데 이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습니다. 하형록 대표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자라온 배경과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자신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언제 하형록 대표님의 이 책에 대한 저의 독후감이 블로그에 올라올 날이 있으면 좋겠네요.

세번째 책은 “Genentech – The Beginnings of Biotech” by Sally Smith Hughes – 이 책은 우리에게 바이오텍 회사라는 것의 최초의 시작인 Genentech의 회사 설립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얘기한 책입니다. 개인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회사의 스토리입니다. 현재 Genentech은 스위스 Roche사에 합병되어 Roche/Genentech으로 보통 얘기하는데 여전히 좋은 신약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Moderna는 시작부터 Genentech을 항상 바탕에 두고 회사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Genentech도 시작은 해고된 어떤 Venture Capitalist의 집념과 의지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마치 Moderna가 Flagship Pioneering이라는 Venture Capital Firm의 수년간의 Incubating으로 만들어진 것과 유사하죠.

마지막으로 네번째 책은 “The Amgen Story” by Duncan – 현존하는 가장 큰 바이오텍이고 Amgen은 미국의 30개 대표기업을 모아둔 “Dow Jones Industrial Index”에 바이오텍 대표기업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Amgen은 제가 Moderna의 미래의 모습이 어떨지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디딤돌이 되는 회사입니다. 최근에 은퇴를 하셨지만 Pandemic 동안 Moderna의 CFO 이셨던 David Meline도 Amgen의 오랜 베테랑이셨고 저희들에게 Moderna가 얼마나 커질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라고 Amgen의 경험을 빗대어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렇게 4권의 참고문헌 혹은 안내서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제가 살아오게 된 Biotech 여정과 그 여정에서 만난 Moderna에서의 일들에 대해 오로지 공개된 정보만을 바탕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거인의 어깨에 기대어 저는 지금까지 달려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까지 얻은 경험들이 저의 Biotech 여정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고 감히 예상해 봅니다. 돌이켜보면 신기하게도 저는 매번 안락함에 안주하기 보다는 모험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고 새로운 신약 플랫폼의 발견 – 환자들이 평생 먹는 약이 아니라 환자들이 완치될 수 있는 신약 개발 플랫폼의 개발 – 을 위해 지금까지 커리어를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모험은 Pandemic이라는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시기에 Moderna와 Messenger RiboNucleic Acid (mRNA) 시대의 도래를 알릴 수 있는 큰 성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이런 과정을 겪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잘나거나 기획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었고 그 소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말하는지는 이 글이 써 나가는 과정 중에서 조금씩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저에게는 어쩌면 필연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새로운 완치신약 플랫폼을 개발하기 위해서 제가 그랬던 것 처럼 모험에 뛰어든 많은 한국인 과학자들과 수많은 훌륭한 창업자들이 불철주야 연구실과 펀딩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저의 이 글이 미래를 단순히 예측하거나 어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해 나가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어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혹시 저의 어린 시절과 같은 갈바를 알지 못하는 어려움과 가난, 고통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저로서는 제가 쓰는 이 글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저의 서문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Lexington의 한 서고에서 이 글을 바칩니다.

“In God We Trust in Our Future for All.”

내가 쓰는 나의 삶 (19) – The Next Chapter – 내 인생 계획표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제가 다니는 미국 교회는 Grace Chapel 이라고 하는 교회인데요 얼마전에도 제가 이 교회에 대한 저의 생각을 잠시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내가 쓰는 나의 삶 (17) – 중꺽마

저희 교회 담임목사님은 Pastor Bryan Wilkerson 목사님이신데요 2000년부터 지금까지 23년간 저희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번주에 내년 5월까지 목회를 하시고 사임하신다는 발표를 하셨습니다.

제가 몇분의 담임목사님이 바뀌시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겪게 되었는데요 어떤 때에는 이와 같이 좋은 과정으로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분쟁과 혼돈의 과정으로 되기도 하더군요. 사실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담임목사님이신 Pastor Bryan 목사님께서 많이 힘드셨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했는데요 이제 팬데믹이 끝나고 나니 사임을 결정하시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설교 중에 2000년에 우리교회에 오시기로 결정하시는 과정에서 이전 담임목사님이셨던 Gordon MacDonald 목사님과 통화해서 왜 교회를 사임하시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교회에 새로운 리더쉽이 세워져서 새로운 장 (The New Chapter)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Bryan목사님께서 이번 사임을 결정하시고 다시 Gordon 목사님께 전화하시면서 23년전에 Gordon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자신이 하고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1년여간 새로운 담임목사님을 청빙하고 세우는 리더쉽 변화과정을 겪게 될 것 같은데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되어지길 바랍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장 (The New Chapter)“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었어요.

지금부터 몇년에 걸쳐 중요한 인생 이벤트가 있는데요.

2023년에는 첫째에 대한 모든 의무는 끝나는 것 같아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사가 여전히 성장가도에 있기 때문에 저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시기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Consulting 1인 기업을 만들어서 활동을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큰 돈을 번다는 생각보다는 서서히 대체할 수 있는 저만의 직업을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에요.

2028년에는 막내의 대학졸업이 있습니다. 이 때까지가 아마 가장 많이 돈이 들어가는 시기가 될 것 같고요. 이 시기까지 가능하면 현직장 또는 지금 수준 이상의 급여를 받는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지금부터 5년정도의 기간이 되는군요. 저의 1인 기업이 이 시기까지 활발하게 될 수 있도록 마케팅을 잘 해 놓아야겠죠.

2030년에는 제가 SSN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됩니다. 62세이니까 70% 수령이 되는 시기이고요. 이 나이까지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을 현재로서는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현 직장이나 아니면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한다고 가정해도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 때까지면 1인 기업이 결과를 내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1인 기업을 창직하고 7년여정도를 꾸준히 Consulting을 한다면 직장에서 버는 월급의 반 이상은 1인 기업에서 벌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모아둔 자산이 돈을 벌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033년에는 제가 Medicare를 받을 수 있는 65세가 됩니다. 2030-2033년 사이에는 제가 풀타임보다는 파트타임으로 전환하면서 근로시간을 매년 주10시간 정도씩 일하는 시간을 줄여나가고 보다 의미있는 일에 투자하고 싶어요. 저의 1인기업이 이 시기에 일정한 수입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가장 좋겠구요. 2030년부터 약 3년간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401(k)나 IRA를 조금씩 써도 괜찮을 것 같아요.

2034년 이후부터는 새로운 창업가 (Entrepreneur)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수입에 따라 다르겠지만 67세 정도에 SSN 을 받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년 정도 지난 이 시기를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벌일 수 있는 시기로 생각을 하고 지금부터 차근 차근 준비하려고 해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으로서 해야할 저의 직분 (?)을 잘 감당하고 이제 제가 새로운 사람들과 일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저의 “새로운 장 (The New Chapter)“에 대한 나름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이 보는 사람에 따라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보다는 저 자신을 위한 계획표를 남긴다고 하고 싶습니다.

저의 롤모델인 “김민식 PD”님의 말씀을 여기에 남깁니다.

ChatGPT 시대에 나는 창의적인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경쟁이 적은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강연에 시간을 많이 쏟으신다고 해요. 저도 “글로벌 바이오텍의 발전과 미래 희망”에 대해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강연을 하고 싶어요.

내가 쓰는 나의 삶 (18) – 경제적 자유가 주는 4가지 “좋은” 것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반드시 Internet이나 Youtube에 있는 내용들이 사실이거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대략 요즘 MZ세대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 경험을 토대로 Youtube에서 얘기되는 “FIRE (경제적 자유)“에 대한 기대와 노력을 특히 지금의 MZ세대들이 우리와 같은 Millenium 세대에 비해서는 더 많이 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저도 20여년전에 Venture Capitalist로 일을 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빨리 경제적 자유를 얻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려운 가정환경을 조기에 극복하고 평생 ““로 살아야하는 생활을 벗어나 진정한 ““으로 살고 싶었거든요. 물론 당시에는 FIRE라는 개념도 없었고 갑이라든지 갑질이라든지 하는 등등의 단어도 없었지만 5년간 다녔던 대기업 생활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이 저를 아마도 이런 것에 일찍 눈 뜨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그 이전에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된 아버지 회사의 부도와 대학교 1학년 봄에 겪었던 아파트에서 통채로 쫓겨났던 기억들 속에서 피부와 뼈속까지 느끼게 된 “슈퍼을”의 삶을 살기 시작했던 당시의 제가 이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슈퍼을의 삶은 저와 저의 가족들을 제가 대기업에 입사하고 수년이 지나기 까지 10년 넘게 괴롭혔습니다.

제가 겪은 “을”의 삶은 그렇더라구요. 계속해서 빚을 갚고 있고 “을”이 이자와 원금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갚고 있으면 갚을 수록 “갑”은 편안히 앉아서 “을”이 보내주는 원금과 이자를 받고 그것으로 또 다른 투자를 해서 자산을 불리고 있고 반면에 “을”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번 돈을 족족 “갑”에게 갖다 바치고 있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빨리 끊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런 절박함이 저에게는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느낀 감정은 아래의 그림이 잘 나타내 주고 있죠. 을은 결국 갑을 위해 평생 봉사하다가 일찍 생을 마감하는…뭐 이런거요.

그래서 더 절박했던 마음이 있었고 다행히도 어느 시기를 넘으면서 평생 적자의 삶은 분기점을 넘어 드디어 흑자의 삶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이런 삶이 시작되고부터 저에게 질문이 들기 시작하는거에요.

경제적 자유를 얻은 나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동안 열심히 돈을 벌고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애쓰다보니 어느새 나이가 들고 아무런 취미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저의 삶을 열심히 돈을 위해 갈아넣기만 하다 보니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더라는 거죠.

또 하나는 돈을 이제 벌기만 하면 되는가?인데요. 가만히 상황을 돌아보니 저는 그저 돈을 벌기만 할 뿐 쓰는 사람은 따로 있더군요. 결국 돈을 버는 사람이 돈을 쓰는 구조는 아닌거였던 겁니다. 이런 지경이라면 가계는 흑자가 되었을지 몰라도 저는 여전히 “을”인 상태였던 거죠.

그래서 그 때부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어떤 정신과 의사분의 글을 읽으면서 무력감에서 탈출을 할 수 있었고요.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마흔은 없다 (1)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마흔은 없다 (2)

일기를 쓰기 시작했죠. 아무것이나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저의 감정을 솔직히 일기에 쏟아붓기 시작했죠. 일기를 쓰다보니 정말 감정에 쌓였던 묵은 생각들이 서서히 녹아져 가고 저 자신이 점점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3, 4개월쯤 지나서 다시 제가 쓴 일기들을 읽어봤죠.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제가 3, 4개월동안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고 있더라구요. 조금씩 표현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내용은 거의 천편일률이었어요.

그래서 다시 깨달았죠.

“머리에 들어가는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빈곤하구나. 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그래서 그 때부터 책을 읽거나 Youtube에 나오는 좋은 강연들을 책상에서 노트하며 읽고 듣기 시작했습니다. Youtube에서 독서법을 다시 배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저에게 정말이지 크나큰 깨달음이었습니다. 현슴원님의 독서법입니다.

현승원님의 독서법은 이렇습니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거나 형광펜을 치면서 배우려는 자세로 읽어라.

한번만 읽지 말고 다 읽고 나면 다시 밑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읽어라.

반복해라. 얻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얻을 때까지.

마지막은 “반드시 배운대로 실천해라!”

이 독서법은 제가 그동안 해 온 독서법이 현학적이기만 할 뿐 전혀 창조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현타”해 준 것이었고 저는 이 분의 말씀대로 독서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기의 내용은 이제 독후감으로 바뀔 뿐만 아니라 결심을 심는 중요한 자료실이 되어가기 시작했죠.

이후 저는 중요한 일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것이죠! 바로 지금 쓰고 있는 이 블로그를 말이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게 뭘?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블로그는 일기와 달리 “공유공간”이잖아요? 그래서 블로그를 쓰면서 부터는 일기를 쓸 때보다 보다 더 솔직해 질 수 있게 되더군요. 그리고 검색할 수 없는 일기와 달리 블로그는 제가 메뉴에 잘 보관만 해 둔다면 언제든지 저의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저의 생각의 흐름들을 정리할 수 있고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블로그 공간은 그야말로 “나의 재발견!!”이었습니다.

맨처음에 블로그를 쓸 때에는 지금과 같은 글이 도배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시작할 때 저는 “불가지론적 (Agnostic)”접근을 했거든요.

“그냥 아무것이나 생각나는대로 쓰자. 편집도 하지말고 그냥 쓰자. 3년만 꾸준히 쓰자. 가능하면 매일 글을 쓰자. 그러다 보면 블로그가 알아서 나의 생각을 정리해 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무작정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제 꽤 오래 시간이 되어서 글이 300개에 이르게 되었어요.

이제야 비로소 제가 스스로 느끼는 “경제적 자유 (Financial Freedom)”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깨닫게 된 경제적 자유는 4가지 “좋은”것을 하는 거에요.

첫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에요.

지금도 자유와 이유, 버킷리스트 등을 쓰고 있지만요. 이런 도구들을 통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선명해 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에 대해서 말이죠. 좋아하는 일을 늘려가는 중이죠.

  • 블로그를 쓰는 걸 제가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블로그를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 커리어코칭하는 걸 제가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커리어코칭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책을 읽는 걸 제가 좋아하죠. 그래서 밑줄 쫘악 쫘악 그어가며 책을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등등등….

둘째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혼자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처음에는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저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죠. 사람들을 만나고 제 소개를 하고 대화를 시작하고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모임에서 마음 맞는 분을 만나면 다시 링크드인 친구맺기를 하고 다시 따로 일대일로 만나기 시작했죠. 페이는 주로 제가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동안”에는 제가 돈을 쓰는 것이 전혀 이상하거나 손해본다는 느낌이 없었죠.

셋째는 “내가 좋아하는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자유란 저에게 있어서 공간이라기 보다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의 시간!!”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주로 저녁이 됩니다. 저녁시간에 주로 블로그를 쓴다거나 중요한 논문을 읽고 바이오텍 기술이나 스타트업을 분석하고요. 아니면 운동을 하거나 잠을 잡니다. 하하하.

넷째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 좋아하는 공간을 찾는 것이 저에게 중요했는데요. 다행히 몇년전에 이사한 저의 집에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나요. 물론 어떤 경우에 독립한 큰딸이 오면 제 방을 당분간 빌려주기도 하지만요. 그 공간은 엄연히 저만의 공간이죠.

아직 제가 좋아하는 도서관을 만나지 못했는데요. 시간을 들여서 제가 사는 시 이외에 좋은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알아볼 요량입니다. 책이 많이 있는 곳이면 좋겠고요. 젊은 사람이 많이 공부하는 그런 도서관이면 좋겠어요. 대학 도서관이면 더 좋을 것 같구요 아니면 공립 도서관도 좋아요.

최근에 찾은 좋아하는 공간은 저의 Gym인데요. “Life Time”이라고 합니다.

나의 운동일지 (13) – Gym을 가다

이 공간은 참 다양해요. 아직은 3층에 있는 Gym을 주로 이용하는데요. 제가 더 많은 시간을 저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아마 이곳에 있는 일하는 공간이나 Cafe, 식당, Philates나 Zoombar, Pickle ball Class, 농구장 등도 제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 찾은 곳은 그림을 좋아하는 제가 갈 수 있는 “Museum of Fine Arts“입니다.

그 이외에도 몇가지 공간이 더 있는데요. 작년에 한번 방문을 한 곳인데 “Hammond Castle Museum“이라고 Glouster, MA에 있는 개인 박물관인데요. Hammond라는 분은 2차대전때 엔지니어입니다. 이 분이 주파수 연구를 하신 분인데 2차대전때 잠수함에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발명해서 돈을 아주 많이 버신 분이에요. 그 분이 살던 집을 성처럼 만들어 놓았고요 이 공간에는 다양한 도면들이 있어서 한참을 봤습니다. Hammond의 책과 서재 등도 있어요. 함께 갔던 아내는 지루해 했지만요.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가에 위치해서 아주 좋더라구요.

제가 다니는 교회도 참 좋은 곳이에요. Grace Chapel이라고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라는 책을 쓰신 Gorden MacDonald 목사님이 오래 시무하셨던 교회이고요 지금은 Bryan Wilkerson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1948년에 5가정이 목사님 없이 시작한 교회이고요 5년이 지난 후에 목사님을 청빙하고 1959년에 지금의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주위의 어려운 교회들이 이 교회에 자기 교회를 내어놓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5개의 지역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사회 봉사와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공간들을 계속 찾아가는게 아마 제가 해야할 일이겠죠?

정리하면 제가 생각하는 경제적 자유는 “내가 좋아하는 일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내가 좋아하는 시간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저의 삶이 비로서 “을”의 삶에서 “갑”의 삶으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축하해 주세요. 나도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