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확률 0.01%: MODERNA 임박사의 무한도전 (1)

무한도전

한국의 MBC에서 김태호 PD와 유재석 등 연예인들이 뭉쳐서 만들었던 최장기 예능프로그램 중에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무한도전은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도전 과제를 매주 설정하고 그 과제를 6명의 연예인들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함으로써 결국 그 도전을 성공시키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경우에든 끝까지 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도전은 무한했고 이 프로그램이 초기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조기에 종영될 위기에도 있었지만 당시 예능국장이던 김영희 예능국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 속에서 점차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주말 예능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방송이 자리잡게 되면서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점점 높아져 갔고 이를 반영하듯 초기에 매주 과제를 도전하고 해결하던 종래의 패턴을 벗어나 장기과제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때에는 방송 편집이 된 이후에도 시청자들이 느끼기에 무한도전 멤버들이 고전하며 과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어떤 과제의 경우에는 몇주간 한 과제의 수행과정을 방송으로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이 무한도전 멤버들의 도전과정에 점차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결국 도전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시청자들의 무한도전에 대한 애정과 응원은 점차 높아져 갔다. 무한도전은 2005년 4월 30일에 첫방송을 한 이후에 2018년 3월 31일에 마지막 방송을 하기 까지 13년이라는 최장기 예능프로그램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무한도전이 우리에게 준 감동은 그 도전이 실패할 때보다는 성공할 때였다. 물론 사소한 실수는 있을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할 때 시청자들은 큰 감동과 전율을 느끼게 되며 이를 통해 힘을 얻고 새로운 삶을 향한 에너지를 얻게 된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무한한 도전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듯이 나는 생명과학자로서 무한한 도전을 통해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이다. 방송이나 SNS에서 듣게 되는 수많은 광고는 우리를 현혹하며 실상보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쉽다. 예를 들면, 고급차나 명품에 대한 광고는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서민들의 마음에 파고들며 결국 가난한 서민들의 얇은 지갑을 열게 하며 부족한 자산은 크레딧카드와 같은 채무에 무감각하게 만들어서 서민들이 더욱 가난해지게 하는데 일조한다.

또 하나의 예는 제약회사의 광고를 들 수 있다. 신약이 출시되면 제약회사는 앞다투어 새로운 약이 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을 완치할 수 있을 것처럼 아픈 환자들의 마음을 후벼낸다. 건강할 때에는 제약회사의 광고를 듣더라도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다가 막상 그 질병에 걸리게 되면 평소에 듣던 광고의 내용과는 달리 신약의 실상이 환자를 고치기는 커녕 아주 낮은 치료가능성만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부작용이라고 불리우는 다른 병을 일으킴으로써 약을 먹지 않는 편이 약을 먹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닌가 의심마저 하게 만든다.

생명과학자로 30여년 전에 어떤 대기업에서 신약개발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은 벅차고 기쁘기만 했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처음에는 신약개발한 약물이 임상시험에 올라가기도 어려웠고 조금 실력이 나아져서 임상시험에 올라가더라도 최종적으로 약물이 승인되어 환자들에게 사용되기까지 되는데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설사 성공하더라도 그 효과는 너무나 초라하고 미미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기대보다는 실망이 더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신약개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거의 신약개발하는 생명과학자로 사는 삶을 거의 포기할 뻔한 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한도전의 정신으로 계속해서 신약개발에 도전했고 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약 메커니즘이나 개발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항상 던지며 더 나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고 어떤 때에는 벤처캐피탈리스트 투자자로서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방식으로 신약을 개발할지 모르는 바이오텍 스타트업을 찾아 다니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새로 생명과학분야를 배우기 위해 다시 연구생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이런 준비와 새로운 실력을 습득하게 되면서 나의 무한도전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물론 새로운 도전은 과정상의 많은 실패를 동반한다. 만약 실패하지 않고 항상 성공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끊임없이 실패했고 그 실패들을 분석하고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차원의 안목이 생겨나고 결국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공확률 0.01%

내가 30여년전 처음 신약개발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신약의 성공확률이 1만분의 1 즉 0.01%라고 하였다. 그 때에는 정말 그런줄 알았다. 사실은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이었는데도…미국 바이오텍 스타트업에서 처음 도전했던 RNA 바이러스 C형간염치료제에 도전할 때에는 몇개의 약물이 있었지만 치료 효과는 50% 미만이었고 약물은 극심한 부작용으로 환자들을 괴롭혔다. 많은 신약연구자들이 C형간염 (HCV) 의 원인 바이러스인 RNA Virus는 쉽게 변환하기 때문에 완치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몇 바이오텍 스타트업들이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무한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날 한 Nucleotide 신약이 95%-100%의 완치효과를 임상3상에서 증명했고 약물은 3개월만 먹으면 되었다. 세계에서 신약개발 역사상 최초로 C형간염은 우리 생명과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완치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에 뉴클레오타이드 (Nucleotide) 신약이 있었다. 이제 더이상 C형 간염환자들은 없고 이 신약의 필요도 사라졌다. 나는 이런 약을 개발하고 싶어했고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Yale University에서 함께 연구생으로 있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Moderna라는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듣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메신저 RNA (mRNA)으로 신약을 만든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이 신약개발 플랫폼의 기초가 된 논문을 찾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연한 기회에 Youtube의 Ted Talk에서 Moderna의 CEO인 Stephane Bancel 대표가 발표하는 짧은 프리젠테이션을 찾게 되었다.

mRNA가 약이 될수 있다면? (What if mRNA could be a medicine?)

프리젠테이션을 들으며 나의 의심은 일말의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여전히 성공확률은 0.01%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더이상 0.01%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볼만한 무한도전이라고 생각했고 성공확률이 낮았을 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무한했다. Moderna에 입사하기로 결정하고 나는 반대로 100%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뛰어났다. 거의 대부분 빅파마에서 경험이 오래되었거나 세계적인 명문대학교 연구실에서 조련받은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었다. 펀딩도 충분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무한도전을 했다. 실험실에서도 무한도전을 했고 회사 자체에도 무한도전을 했다. 과거에 이런 회사의 운영형태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정말 신기한 방식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비상장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이다. 전문 온라인 신문에서 우리에 대해 비방하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모르고 한 소리일 뿐이었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했고 분석하고 점점 진화해 갔다. 쥐실험과 원숭이 실험은 점점 희망의 시그널을 주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mRNA를 안전하게 몸속으로 전달해 줄 우리의 전달체는 Lipid Nanoparticle이었다. 모든 분자들을 분자설계와 합성을 통해서 변환시켜 갔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mRNA 신약개발은 RNA뿐만 아니라 단분자 (Small Molecule), DNA, mRNA, 단백질 및 Lipid Nanoparticle까지 종합 생명과학 패키지 연구였다.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다. 회사의 투자자들과 공동연구 빅파마들은 우리를 믿고 거금을 지속적으로 투자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발생했다.

전세계적으로 2,000개 이상의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신약이 임상시험에 도전했다. 여전히 mRNA 백신에 대해서는 조롱하거나 비방하는 기사가 많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시간만이 문제였다. 빨리 해야했다. 매일 수백만명이 죽음을 향해 나아갔고 병원 중환자실은 중환자로 가득했고 의료진도 지쳐갔다.

임상 3상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

mRNA-1273 – 94.5%!!

우리의 mRNA 백신은 세상의 조롱과 비판을 딛고 성공했다. 하지만 데이터가 나와도 비판이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팬데믹은 다행히 엔데믹으로 변했고 모두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늘도 무한도전을 이어 나아가고 있다.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의 무한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무한도전은 성공할 때에야 환자들과 환자들의 가족들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다.

지금부터 이 나의 무한도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Bucket List (31) – 1인 출판사 Crowd Funding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아는 분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제가 하고 있는 커리어코칭의 목표를 중고등학생으로 해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영감을 준 분은 김민식 PD님이신데요.

부러우면 지는거다 (2) – 김민식 피디님

김민식 PD님은 경쟁이 가장 적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신다면서 기분좋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다면요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에요. 무슨 말이냐면 AI/ML시대에 어차피 과거의 정보와 지식은 모두 AI/ML이 찾아준다고 생각을 한다면 지금 자라나는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은 우리 기성세대와는 분명히 다른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즉, AI/ML이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데 그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될 것 아니겠어요?

창조하는 일 중에서 생명을 치유하는 일은 얼마나 보람이 있는데요. 그래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블로그에 쓰고 책으로도 쓰고 ‘중학생,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 좋겠다!’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거에요.

블로그는 쓰고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닌데요 더 나아가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1인 출판사, 크라우드펀딩으로 전자책 출간

에 대한 것을 알게 된거에요.

[강대호의 책이야기] 원하는 꿈을 꿀 수 있다고?…‘달러구트 꿈 백화점’

삼성전자 연구원인 이미예 작가님이 그렇게 하셨더군요. 크라우드펀딩플랫폼 ‘텀블벅’을 통해서 전자책을 출간했는데 호응이 좋아서 종이책으로까지 가게 된 케이스에요.

또 재미있는 SNS 얘기도 있는데요. 어떤 작가가 사인회를 했는데 2명밖에 안와서 그걸 SNS에 올린 거에요.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고 해요.

참 요지경이죠! 사람들이 마음이 착해서 그래요.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래서 갑자기 저도 꿈이 생겼어요.

제가 쓰고 싶은 “Moderna 신데렐라 연구원“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1인 출판 전자책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될 듯, 안될 듯 그렇죠?

이럴 땐 그냥 해야 돼요. 어차피 50:50일 때는 해서 100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편이 나아요. 해 보려고요.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하나 늘었네요.

BOSTONIAN (26) – 연구과제 – 오래 만나기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블로그를 통해서 몇차례 얘기를 했지만 작년 팬데믹이 막바지가 되면서부터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저와 같은 내성적인 사람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은 참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거의 연구과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는…

연구과제 – 오래 만나기

입니다.

제가 보스턴 지역과 한국에서 그동안 오랜기간 알고 만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한가지 특징이 있더라구요.

지인들 또는 친구들이 먼저 나에게 연락하고 지속적으로 만나준다.

흐음….

결국 수동적인 저의 성격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산물 중에 그래도 저와 만나주는 몇몇분들이 있는 거에요. 보통 대부분은 제가 연락을 하기보다 상대방이 저에게 연락을 해와서 그동안 만나왔어요.

그런데 이제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그래서 최근에는 방법을 달리해서 제가 먼저 연락을 하는 방식으로 좀 치환을 하는 중입니다. 사실 지인들과 친구들은 여전히 제가 먼저 연락을 하기 전에 보통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요. 그러니 제가 특별히 노력을 할 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 새로운 분들과는 제가 주도적으로 “오래 만나기” 프로젝트를 하는 중이죠.

예를 들면 커리어코칭을 위해 만난다는가…네트워킹을 한다든가…뭐 이런거요.

일단은 밥을 함께 먹는 식으로 시작은 했어요. 첫번째 식사는 제가 사기로 하고요 그 다음에는 얻어 먹는 식으로 Take Turn 방식이죠. 직장인에 한해서요..

학생들이나 포스닥 연구원 분들은 여전히 제가 그냥 삽니다. 그게 일단 편하고요. 제가 받은 예전에 도움을 돌려드린다는 개념인데 다들 좋아하는 건 아니더라구요. 어떤 사람들만 좋아하고요 뭐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아요.

이 연구과제는 제가 평생 연구해야 할 주제인 것 같고요. 저의 “노화현상 (Aging Phenomena)”이 이런 분들에게 혹시 부담이 될까해서 가능하면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을 합니다. 머리염색을 하면 저자신이 일단 나이를 잊어요.

그리고 이런 저런 공부를 많이 해요. 자꾸 물어보려고 하고요.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Comfort Zone“을 빠져 나오는데는 성공을 하지 않았나? 자평을 해 봅니다.

오늘도 작년 KASBP 모임에서 처음 뵙고 그 다음에 한번 제가 점심 사고 오늘 그분이 점심을 사서 3번째 만남을 이어간 분이 계세요. 같은 바이오 회사이기도 하고 반가워서 계속 만나는데 저처럼 키도 크고 옷도 잘입고 잘 생겼습니다…하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분과는 오래 가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망해 봅니다.

또 한분은 예전에 한인교회에 함께 다닌 분인데 제가 지금 Layoff되어서 잡을 찾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이세요. 그래서 교회는 달라졌지만 제가 작년말에 연락을 해서 한번 만났고 올해도 한두번은 만나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바이오텍 인맥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일을 함께 하는건 없어서 특별히 일관계로 만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인간적인 만남이죠.

다른 분들은 아직 두번 정도 뵌 분들이 몇분 계시고요. 좀더 기회가 되어서 만남을 이어가려고 해요. 너무 인원이 많아져도 관리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일단은 10명 이내로 좀 먼저 친해질 때까지는요. 그렇게 하려고 생각을 해요.

오래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연구과제에 대해서 제가 나름대로 가정 (Hypothesis) 을 좀 세웠습니다.

첫째, 존대말로 하고 절대 말을 놓치 않는다.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배우는 자세를 취한다.

둘째, 가능한한 일상적인 얘기를 주로 하고 상대방을 세워주기 위해 애쓴다.

셋째, 내 얘기를 할 때는 터놓고 숨김없이 한다.

이 정도로 일단 정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벤처캐피탈리스트 생활을 할 때 잠시 7개월 같이 일한 분이 계세요. 그 분은 이상하게 연락을 계속 해서 지금까지 20여년간 그 만남이 꾸준히 이어져요. 그 분도 저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배우는 중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배울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요 신기하게도….

한동안은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던데 알고 보니 그것은 제가 Reach-Out을 하지 않은 까닭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사실 사람을 만나려고 하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요즘 들어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노력을 한 결과일까요?

다음주는 아주 빼곡히 점심,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금-토요일은 KASBP Spring Symposium이 있어서 거기에서 또 사람들을 만날 것 같구요. 한국에서 온다는 친구도 있어서 만나기로 했고 다른 한국에서 오는 분들도 있어서 이 분들은 대접을 해야 할 것 같네요.

특별한 목적을 내세우지 않고 만나는게 좋은 것 같아요. 커리어코칭 얘기를 했더니 좀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일단은 그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친해지기 전에는요.

제 아내가 이런 저의 변화를 보며 놀립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극과 극이야!”

뭐 놀려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네요. 좋게 변하는 극과 극은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의 연구과제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잘되면 블로그나 책으로 남기려고요. 한가지 확실한 건요 오래 만나려면 둘 중 한사람이 끌어줘야 해요. 그동안은 끌어주는 사람이 저의 상대방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방을 끌어주려고 하는 것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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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iotech Memoir – Moderna (9) – 변화의 시절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제가 살아온 내용과 더불어 미국에서 산 지 2년이 지나면서 저의 삶은 이민자의 삶으로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 배경에는 몇가지 일들이 있었는데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도 있지만 또한 실질적으로 저와 가족들이 미국에 정착하기 위한 이민 관련 서류들도 필요한데요. 이런 일들이 제 주위에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그에 대해 좀 적어보려고 해요.

미국에 남기로 결정을 한 이후부터 저의 주위에는 몇가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변화는 Yale University 연구실 내에서 제 프로젝트의 변화인데요. 어느날 교수님께서 저의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2명의 새로운 Postdoc을 고용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저의 위상이 약간 높아진 것이죠. Research Scientist 자리도 제안을 해 주셨지만 제가 학교에 오래 남으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을 한 상태였어요. 새로온 Postdoc은 중국인 여자 한명과 미국인 남자 한명이었는데요 미국인 친구는 두번째 Postdoc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이때 더불어 몇명의 다른 Postdoc들도 조인하게 되서 연구실은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연구도 지난 2년간은 약간 답보 상태였다면 이 시기부터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번째 변화는 교회에서 일어난 변화인데요. 독일에서 새로오는 Postdoc 한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특이하게도 오실 때부터 H-1 visa로 오시고 오시자 마자 영주권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해서 갑자기 우리 모두는영주권 준비를 하게 됐어요. 저도 미국에 남기로는 했지만 이런 이민 관련된 것에는 문외한이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 분이 오심으로 해서 저의 신분 문제를 위한 서류준비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세번째 변화는 담임목사님이 6개월간 안식년을 가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입니다. 6개월간 남미의 선교지를 돌아보고 오시겠다고 하셨는데요. 안식년 기간동안 설교를 해 주실 분을 물색하던 중 남미에서 오신 선교사님 한분께 6개월간 강단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드렸고 승낙을 받아 6개월간 새로운 말씀을 받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교회의 새벽기도가 활성화되도록 바람을 일으키셔서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저도 이 기간동안 성장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네번째 변화는 좀 규모가 큰데요. 한국에서 PD수첩을 통해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사건이 크게 대서특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통 논문 문제는 다른 연구자들의 문제 제기로 해당 논문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논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는데요 이번 건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로 MBC PD 수첩이라는 탐사기획 프로그램에서 제기하고 Science와 Nature와 같은 저널들이 이를 바탕으로 조사를 해서 결국 이에 해당하는 논문의 증거 사진들이 조작되었음이 판명나게 되고 그 논문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이 미국에서 Postdoc 중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파면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한국인 Postdoc들이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요. 당혹스럽고 쉽지 않은 순간이었습니다.

다섯번째 변화는 저와 함께 일하던 Postdoc들의 저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일이에요. 제가 워낙 무디다 보니 이런 변화를 감지하는 것도 늦었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보통 중요하지 않은 일은 무시하고 지나치고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주의여서 크게 문제삼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큰 일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인 Postdoc의 태도가 초기에 우호적이고 배우려던 자세와는 달리 언제부턴가 드세어지고 저를 무시하는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는 처음에 이 친구가 Arkansas 출신으로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있어서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보다 좀 큰 문제였구요. 여하튼 이런 일이 몇차례 있으면서 갑자기 저의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들었습니다.

여섯번째 변화는 교수님의 변화인데요. 처음 약속과 달리 저의 영주권 수속에 대해 다소 소극적이었습니다. NIW 수속에 중요한 Reference Letter를 써 주시기로 하시고는 차일피일 미루셔서 결국에는 지도교수 추천서 없이 이미 7개의 추천서를 모았고 그 중 6개는 타기관에 계신 분들의 Independent Reference Letter였기 때문에 저의 케이스는 사실 이미 상당히 좋은 케이스였어요. 어쨋든 지도교수님의 추천서 없이 영주권 수속을 마치게 되었고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일곱번째 변화는 담임목사님께서 안식년에서 돌아오신 후 남미의 니카라구아로 선교사로 가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하시면서 사임을 통보하신 일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려 온 성도들은 많은 충격을 받았고요 담임목사님이 니카라구아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거리의 아이들의 충격적인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선교사로 가신다는 것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교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의 선교 후원을 준비하는 중요한 서류를 만들었고요 담임목사님은 얼마 안 있어 선교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 없이 새로운 담임목사님이 청빙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기간을 가졌는데요. 이를 안쓰럽게 여기신 남미 선교사님께서 선교지에 복귀할 시기를 미루시고 1년을 더 설교목사로 섬기시기로 결정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임목사님이 없이 하나님이 사역하시는 목회를 경험하는 1년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여덟번째 변화는 가장 충격이 큰 변화였습니다. 제가 Postdoc을 한지 3년 6개월이 지난 어느날 지도 교수님께서 저를 아침 일찍 부르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지도 교수님을 뵈었는데 교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몇개월간 너와 불가리아 포스닥의 연구에 대해 우리가 내부조사를 했는데 너의 연구는 문제가 없었지만 불가리아 포스닥의 연구는 가짜로 판명났다. 오늘 우리가 랩미팅을 할텐데 그동안에 시큐리티 요원이 와서 불가리아 포스닥을 데리고 갈거고 미국을 떠나게 된다. 네가 그와 그동안 해오던 연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혹시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받도록 하고 대신 그 포스닥에게는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표정관리를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새로온 어떤 포스닥 동료가 저에게 제가 한 실험을 재현한다고 해서 제가 도와주곤 했거든요. 알고보니 그 친구가 재현한 것은 연구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저와 함께 했던 두명의 포스닥 특히 Arkansas 출신 미국인 포스닥이 주도한 사실도 알 수 있었죠. 그동안 왜 나를 차갑게 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어요. 아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실험실에서 제가 가장 친했던 동료는 그날 쫓겨나기로 한 불가리아 포스닥이었어요. 우리는 항상 점심을 같이 먹고 새로운 연구계획을 기획하고 얘기하곤 했는데 그 가장 친구가 오늘 이후 볼 수 없게 된 것이죠.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날 결국 우리들이 따로 모여있는 동안 불가리아 친구가 두명의 건장한 시큐리티 요원과 함께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나가게 된 것은 불가리아 포스닥이었지만 사실 이 조사가 황우석 박사 논문조작사건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로 볼 때 저를 표적으로 한 것은 분명한 것이니까요.

아홉번째 변화는 제가 쓰던 논문에서 저의 순위가 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날 제가 시작해서 주도적으로 하고 있던 논문이 투고되기 전에 주저자 두명이 Arkansas 포스닥과 중국인 포스닥 그리고 저 이렇게 순서로 되어 있고 제가 3번째 저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도교수님께 따로 찾아가 논의한 끝에 세명이 공동제1저자로 되었지만 순서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괴로워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논문이 아니라 바로 나다.

이 음성과 함께 저는 논문에 대한 미련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라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저에게 이번에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논문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밀어내고 첫번째 저자가 된 포스닥은 저의 지도교수와 회사를 설립해서 함께 7년간 일을 하다가 결국 회사가 실패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고 한동안 다시 포스닥 생활을 해야 했고 두번째 저자였던 중국인 포스닥은 나중에 연구 이외의 다른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자리에서 과학자의 삶을 살아간 사람은 저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열번째 변화는 지도교수님이 저를 연구실에서 내보내기로한 결정이었습니다. 첫번째 변화가 저에게 좋았듯 마지막 변화는 저에게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도 지도교수님은 마지막까지 제가 좋은 오퍼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신경쓰시고 기다려주시는 미덕을 보여 주셨고 캘리포니아 바이오텍 2군데와 보스턴 바이오텍 1군데의 최종 오퍼를 받고 그 중에서 보스턴으로 가기로 최종적으로 결정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회사에 취업한 시기가 2008년 금융위기가 있기 바로 전 해인 2007년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포스닥 모두가 영주권을 받았지만 실제로 취업까지 한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여러가지 형태로 어려움을 주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저를 보호하시고 가장 좋은 때에 저를 인도해 주심으로써 제가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포스닥 기간 후반부에 일어난 10가지 변화를 시기 순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고용주이신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셨고 제가 좋을 때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도 항상 곁에서 저를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양 달콤한 말로 안심을 시킵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결국 사람들이 하는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아멘.

My Biotech Memoir – Moderna (8) – 너는 요셉이다.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오랜 기간의 여정을 거쳐 이제 드디어 미국까지 오게 됩니다. 제가 한 때 미국유학의 꿈을 가지고 1년간 열심히 공부하다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후 미국유학과 박사학위에 대한 모든 꿈을 저는 접었지만, 하나님은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셔서 박사학위도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유학이 아닌 포스닥이라는 방법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번에는 Yale University에서 시작된 첫번째 2년간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Yale University에서 Offer Letter를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Yale이 미국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일이었어요. 그만큼 저희가 무지했죠. 아마 Manhattan 가까운데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아무리 주변 지도를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고 그 위로 올라가다 보니 New Haven이라는 작은 도시에 Yale이 있더라구요. Yale대학교에 Postdoc으로 가면서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보통 Interview도 하고 했어야 하는데 이 교수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를 뽑았는지, 잘못 알고 뽑은 건 아닌지 등등…걱정이 태산인 상태로 교수님과 첫번째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교수님은 젊으신 분이셨고 인상이 좋으셨는데 첫마디가 저에게 꽤 전율있게 다가왔어요.

Don’t Forget that You are a Scientist!!

이게 전부였어요. “네가 과학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가만 생각해 보니 제가 석사, 박사학위를 받으면서도 단 한번도 내가 과학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연구원, 학생 뭐 이런 생각을 했지 정작 “과학자“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거죠.

저는 교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도 마음에 굳게 굳게 새기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Yale 대학교 종신교수가 되시기까지 보통의 교수님들과 같은 특별히 똑똑해서 명문대학교 출신에 천재 반열의 그런 분이 아니셨어요. 오히려 Wisconsin 주의 조그마한 주립대에서 공부를 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Purdue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다음에 Scripps 연구소로 Postdoc을 가시기까지 그리고 Scripps 연구소에서 처음 3-4년간 하시던 연구과제가 정말 잘 안됐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꿋꿋이 지도교수님로 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셔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시고 그 연구분야의 독창성 때문에 Yale University에 교수로 오시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도 새벽5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매일 12시간씩 강행군 하시는 성실성과 노력을 새로운 RNA의 분야인 Riboswith라는 유전자 조절 메커니즘을 발견하신 분이셨어요.

어떻게 보면 저와 좀 닮은 점이 많은 분이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묵묵히 자기 길을 가셨고 그 길에서 결국 새로운 RNA와 DNA 분야를 개척해 나가고 계신 분이셨죠. 그래서 아마 저의 CV를 보시고 제가 과학자의 마인드를 놓치고 있다고 판단을 하신 것 같아요.

이 분과의 첫 만남 덕분에 저는 Postdoc 생활을 생애 처음으로 즐기며 연구하는연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저에게 프로젝트를 특별히 던져 주시지는 않고 Riboswitch라는 것이 Drug Discovery에 응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는말씀만 하시고는 저를 그냥 놔두셨어요. 제 앞에 있던 Postdoc은 일본인 유기화학자였는데 물어보니 자기도 3년간 특별히 결과가 없었는데도 그냥 놔두었다고 하더군요. 본인이 과거에 Scripps에 있을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요. 이런 것을 학생들은 귀신같이 알아서 저희 연구실은 항상 학생들이 20-30명 정도로 북적북적 댔습니다. 똑똑한 Yale 학부생들도 와서 밤새워 실험하고 발표하고 나중에 지나고 보니 모두 다 잘되었더라구요.

이 분의 연구과제인 Riboswtich는 Small Molecule Metabolites를 선택적으로 인식하는 Aptamer 영역과 그 인식에 따라 단백질의 합성을 시작하거나 종료하는 Expression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여기에 발견된 Small Molecule Metabolites 대부분이 Nucleosides 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연구에서 Small Molecule Metabolites인 Nucleosides를 변형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Riboswitch 자체의 구조변화를 연구할 수 있으니 저로서는 Nucleoside Chemistry와 RNA Structural Biology를 동시에 연구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과제였어요. 정말이지 이런 기회가 저에게 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죠.

아! 세상에 나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이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 너무나 좋은 한인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New Haven에 온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입국전에 이 교회에 등록을 결정하고 연락을 취한 상태였는데요 담임목사님 부부와 청년부 목사님 부부등 모두가 참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독일에서 뵌 선교사님으로 부터의 삶의 가르침에 이은 좋은 신앙생활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죠. 특히 선교담당 장로님이 계셨는데 한국에서명문대를 나오고 회사생활을 하시다가 이민을 오셔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이 분과 선교사역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너무나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Yale University 신학부가 운영하는 OMSC라는 선교사 안식센터가 있는데요 이곳에 우리교회가 후원을 하고 있었고 이곳에 매년 한인 선교사 가족이 안식년을 위해 많이 오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에는 현지 선교사님들이 1년씩 오셨다 가시곤 하셨어요. 그리고 이 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각 나라와 민족의 선교사역에 대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저로서는

(1) Nucleoside Chemistry와 RNA Structural Biology를 함께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프로젝트

(2)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실력이 뛰어난 지도교수님

(3) 활발하게 선교하는 지역교회

이 세가지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정말 처음 2년간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교회 안에는 Postdoc 모임이 따로 있었는데요 이 모임에서 만난 동료들은 저와 나이가 같고 아내들도 비슷한 Yale Postdoc들이었어요. 마치 최고의 Chef가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의 코스요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런 환경에서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Postdoc을 시작하고 2년차가 된 어느날 문득 대학시절에 했던 40일 아침금식기도와 그 이후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셨던가에 대한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대략 계산을 해 보니 그 금식기도를 한지 한 20년 정도가 흘렀고 지난 20년간 하나님께서 그 40일간의 아침금식기도에 선하게 응답하셔서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니 너무 감사해서 다시 40일 제단을 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40일 아침금식기도와 동시에 새벽기도를 위해 매일 교회로 향했습니다.

이 기간동안은 저에게 마치 단비와 같이 입에 단 꿀과 같이 그리고 나를 감싼 하나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느끼는 그런 시간이었고요 이 40일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서 어느새 30일을 지나고 열흘이 지나 약속한 금식기도는 결국 끝이 났어요.

이제 2년이 지나면 원래 아내와 약속한 3년간의 외국생활이 끝나고 귀국을 하기로 한 기간이 다 차는 순간이었어요.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연구과제를 마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죠.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어서 성경을 읽었는데 창세기를 열게 되었고 읽어보니 마지막 족장인 “요셉”에 대한 말씀이었어요. 그 구절을 읽고 묵상을 하는데 요셉이 가족들 앞에서 이집트 어로 얘기하는 구절입니다. 당시에 저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국에서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어실력이 막상 Yale 에 와서 똑똑한 미국학생들과 연구원들과 잘 모르는 RNA 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하니 영어실력이 오히려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와 달리 요셉의 삶을 보니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와서 감옥에만 주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유창한 이집트어를 구사해서 형들은 말하는 사람이 요셉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시더군요.

요셉을 보렴. 언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래서 그 주간에는 이 말씀을 생각하며 지냈구요 그러다가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일날 아침 여느때와 같이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기 위해 앉았는데 본문이 제가 묵상한 바로 그 똑같은 구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본문을 읽으시고 담임목사님께서 설교말씀을 하시는게 아니겠어요?

그날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은 저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이 분명했어요.

두번째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두번 내지 세번 반복하십니다. 한번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두번 같은 말씀이 반복되면 새겨들어야 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작정을 하신 것이니까요.

이날 두번째 주시는 같은 본문의 요셉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동안 하나님은 분명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요셉이다.”

이 날 설교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점점 분명해 지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미국에 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요..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죠.

주님, 오늘 지도교수님께 가서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이날 지도교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께 가서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당연히 잘 가라고 격려해 주실 줄 알았는데 교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I believe you can be successful in the United States as a good Pharmaceutical Scientist. I don’t know whether you could have such a good opportunity in South Korea. I want you to stay in the United States. I will fully support your application in the US positions. I will write a fantastic reference letter for you! I also want you to get promoted to a Research Scientist in my lab.”

이러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말 제 귀를 의심했어요.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지요.

  • 하나님이 나를 미국에 머물게 하시려고 미국으로 부르셨다는 것.
  • 그리고 나의 삶은 요셉처럼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이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는 약속만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이제까지 살아온 터라 굳이 정해진 약속이 필요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어요. 다만 아내의 교사직은 또 다른 이야기여서 아내의 의견도 중요했지요.

아내는 저의 진로에 대해서는 알겠다고 했지만 본인은 12월까지 복귀를 하고자 했어요. 12월말이 3년 휴직의 만료일이었기 때문에 복귀를 위해서는 그날까지 들어가야 했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여러가지로 몸상태가 좋지 않아 유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았어요. 의사는 12월까지 비행기를 타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얘기했고요 결국 아내도 미국에 남게 되고 아이는 이듬해에 Yale Hospital에서 낳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평탄대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고난이 시작됩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7) – 독일에서 만난 선교사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손은 정말 오묘합니다. 오묘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저의 삶의 여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죠. 저의 삶의 계획 가운데에는 하나 없는 것이 있었는데요. 그것의 시작이 “독일”이라는 나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2년정도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들었는데요 당시 문법대로 정확히 딱딱 들어맞는 독일어가 재미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제가 독일에 가서 살게 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특히 이것이 저를 어떤 삶으로 인도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죠. 이제 그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샬롬~

마가복음 10장 29절 – 30절 말씀을 통해서 집을 다시 산다는 의지와 결별하고 해외유학의 길도 포기하고 따라서 당연히 박사학위에 대해서도 포기하고 선교에 대해 열심히 살던 어느날 저는 뜻밖의 전화를 받고 지도교수님의 권유하에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마저 받게 됩니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여정이었죠. 어찌 되었든 마침내 유기화학 박사가 되었어요. 그것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Nucleoside Chemistry로 말이죠. 그리고 저는 연구원의 생활을 접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투자자로서 돈을 많이 벌기로 계획을 잡게 돼요. 그래서 벤처캐피탈리스트로 2년간의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요 하지 않던 술을 마시고 방탕한 삶에 들어갑니다. 마치 과거에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신기하게도 저도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저의 삶에서 갔는 의미는 몇가지가 있는데요.

  •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은 과학자의 길이다.
  • 돈을 쫓지 말고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니다. 결국 저는 2년만에 다시 과학자의 길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마침 선배님이 계신 바이오텍 회사에서 신약개발 책임연구원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이오텍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대표이사와의 면접에서 뜻하지 않은 제안을 받게 됩니다.

독일에 가서 일해 보지 않겠는가?

독일??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죠. 당장 답을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대표이사께는 몇일간의 말미를 주십사하고 아내와 상의를 했습니다. 아내는 중학교 교사였는데요 매우 지친 상태여서 휴직을 하고 싶어했어요. 이 학교가 사립학교여서 휴직을 받으려면 유일하게 해외에 남편이 나가면 3년까지 휴직이 가능했는데요 제가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아내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대표이사의 이야기도 3년간 독일 근무였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독일로 가게 됩니다. 독일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요. 이미 나가 있는 연구원이 독일에서 우리 회사와 공동연구하는 교수 아래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고 대표이사의 누이가 당시 독일 법원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저는 독일 법인 연구소장 직함으로 사실상은 비지니스 사업개발을 맡아서 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던 일도 잘 되어서 마침 독일의 대기업과 몇차례 미팅을 해서 상당히 사업이 진전이 되어 가고 있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독일에 가자 교회를 찾는 것이 가장 문제였는데요. 독일교회 자체가 활성화가 안되어 있고 영어로 예배하는 젊은이들 교회가 있어서 몇달간 가 보았지만 그것도 결국 오래 다니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래 저래 수소문한 끝에 어떤 선교사 한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 분은 군인이셨던 남편과 사별한 여자 선교사이셨는데요 아들과 함께 외롭게 교회를 개척해서 선교하시면서 독일 대학교에서 학위과정을 하시고 계셨어요. 교회에 가보니 한국에서 온 파견 직원들 몇가정과 교환학생들 몇명과 함께 그 선교사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선교사님과 교제를 하면서 이 분이 정말 신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많은 지혜를 배우게 되었어요.

사실상 저희로서는 선교사를 통한 선교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이 분의 삶 자체가 Faith Mission이셨고요 그 삶을 오게 된 얘기라든지 살고 계신 삶의 모습, 기도 생활, 그리고 섬기시는 것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이 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시내에 있는 한 교회 건물을 빌려서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참 귀한 일이었고요. 나중에는 근처의 다른 한인 목사님이 하시는 교회와 하나로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독일 바이오텍 회사의 약속은 원래 3년이었는데 회사의 경영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해서 6월경에 대표이사가 오더니 사직을 권고하더군요. 그래서 담판을 하고 8월말까지만 월급을 받되 한국으로 전가족의 이사 및 귀국비용은 지원받도록 사인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한두달 안에 다음에 일할 곳으로 가야할 상황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한국에 있는 회사들에 연락을 해 봤지만 여름 휴가 기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9월이 지나서 새해가 되어야 뭔가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요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당신 이제까지 돈 때문에 항상 공부를 즐기지도 못하고 했는데 이번에 미국에 가서 2년간 우리 돈을 쓰고 포스닥을 하는게 어때요? 대신 좋은 대학교로만 알아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이래서 저는 다시 미국의 명문대학교 연구실에 이메일을 마구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일간은 유기화학 연구실에만 집중적으로 보냈는데 당시 유기화학 연구 Grant 사정이 좋지 않아서 답장이 모두 부정적이었어요. 선교사님께서 이 모든 과정에 저희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고 계셨어요. 그러던 중에 저의 마음 속에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진정으로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라

그래서 생각을 해 봤어요. Nucleoside 연구를 오랜 기간 했잖아요? 이 연구는 결국 RNA나 DNA 연구와 연결이 되는데 저는 항상 도대체 RNA니 Robozyme이니 DNA니 하는게 실제로 어떻게 연구되는지 궁금한 거에요. 그래서 이번에는 명문대학교의 의대나 생물학 연구실로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Yale 대학교의 한 교수님으로 부터 관심이 있다는 답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교수님께 제가 직접 이메일을 드린 기억은 없고 이메일 리스트를 봐도 없더라구요.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나 이제 사택을 비워주어야 하는 날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컴퓨터 코드를 뽑기 전에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거짓말처럼 Offer Letter 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월급과 의료보험을 모두 지원한다는 너무나 감사한 조건으로 말이죠. 우리 가족은 그날 얼마나 함께 뛰며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던 선교사님도 함께 기뻐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독일의 1년과정을 통해 저희들에게 현지 선교 훈련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저는 벤처캐피탈리스트로 2년간 살면서 방황했던 그리고 방탕했던 모든 앙금을 씻고 회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다시 새로운 영으로 회복되어서 Yale University가 있는 New Haven, CT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6)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선교에 대한 부르심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글을 쓰는 이 과정을 통해서 저의 삶에 대한 신앙간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신에게 감사가 넘치는 의미있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셨는가에 대한 것이 저의 Moderna까지 이르는 Biotech Career와 상당히 깊이 연관이 있기 때문에 Moderna를 얘기할 때 하나님과 크리스찬 신앙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오늘도 드디어 제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일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저를 Lunatic이라고 보실 수 있는데요 그래도 있었던 일이고 너무나 생생한 일이기 때문에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저는 뭘 본 건 아니고 단지 한마디의 음성과 성경책을 통해서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게 됨으로써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주님을 만난 여정이 왜 제가 미국에 남아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지의 과정에서도 또 다른 형태로 나오게 됩니다. 단 한번이었다면 우연이었겠지만 그냥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죠.

SK Chemicals 연구소에 입사한 저는 3개월간의 신입사원 연수과정을 마치고 수원공장 안에 있던 연구소 옆의 사원기숙사에서 동기들과 지내게 되었습니다. KAIST 기숙사와 비슷하게 2인1실이었는데 저는 같은 연구실에서 일하게 된 동기와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서울대 약대 대학원을 나온 친구였는데 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덩달아 미국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기숙사방은 자연스럽게 유학준비공부방이 되었죠.

수원공장에는 섬유공장과 석유화학공장이 있어서 직원들이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곳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식당은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제공하고 있었고 당연히 저희들도 회사에서 3식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저녁식사 후에는 방에서 남아서 늦게까지 제 친구와 영어 TOEFL과 GRE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죠.

1월에 입사하고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갔는지 1년이 후딱 지나가 버려서 공부는 거의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시간은 정말 금방 지나간거에요. 12월밤의 어느날 저는 잘못하면 공부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즉,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거죠.

이런 날이 몇일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심각한 상심상태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영어공부에 쓰는 시간이 시간을 괜스리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들게 된거죠. 그날도 저는 그런 생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저의 마음 속에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읽으라!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너무나 명료했고 분명히 마가복음 10장을 읽으라는 소리였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마가복음 10장을 펴서 1절부터 읽기 시작했죠.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어떤 구절도 마음에 와 닿기는 커녕 의미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저의 눈을 의심하듯이 저의 마음을 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말씀의 마가복음 10장 29절에 이르러서 부터는 읽는 순간 분명히 듣게 됩니다. 음성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이 글자가 그대로 저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 – 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저의 마음에 꽂힌 말씀은 “내 집을 버린 자는…”입니다.

제가 이 날로 부터 7년전에 저는 아버지의 부도와 함께 살던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을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끄집어 내시고 계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이미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이 생각은 저의 마음 속에 분명히 남아서 저의 삶을 끊임없이 무의미한 목표를 향해 달리도록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반드시 돌아와 이 집을 사고 말리라!

대학교 1학년짜리가 장남으로서 어린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 이제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1년이 지난 12월 어느날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통해 다시 들려진 것이죠.

다른 분은 마가복음 10장 29절을 읽고 이런 생각을 못하시겠지만 저는 정말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집이나“에서 그 ““을 읽는 순간 바로 정신이 번쩍 들고 이 날 비로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이후 저는 유학준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마음을 고쳐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선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열심히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선배로 부터 강남역에서 매주 토요일 3시부터 10시까지 1년간 전문인선교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1년만에 졸업을 하지 못하고 1년반만에 졸업을 했는데요. 이 훈련을 받는 과정 중에서 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선교로 부르셨다

는 것을요. 즉,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일을 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강의를 듣는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어느날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박사과정을 시작해서 학위를 받고 그 이후 2년간은 열심히 벤처캐피탈리스트로 바이오텍 투자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저는 선교의 일을 계속 했습니다. 교회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선교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선교를 돕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년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에 반드시 알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그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시더라구요.

잠언 16장 9절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저의 삶은 이런 여러가지 여정의 산물이 됩니다. 다음에는 제가 독일과 미국에 까지 가게 된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5) –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 이제 다섯번째 글을 쓰게 되었네요. 저는 이 글을 저의 신앙간증의 형태를 겸비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KAIST 석사과정을 하는동안에 여러가지 인생을 결정해야 할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이 때에도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저를 위해 예비하신 곳으로 저를 정확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KAIST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첫학기를 지나면서 지도교수님과 연구실을 정하게 됩니다. 연구 주제와 교수님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이었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사뭇 심각했습니다. 특히 졸업 후 진로에 도움이 많이 되는 교수님의 경우에는 더욱 들어가기도 어렵고 교수님의 숫자가 12명에서 과기대 교수님 10분을 포함해서 22명이나 되셨기 때문에 36명이었던 지도 교수님 당 받을 수 있는 석사학생의 수는 2명이 채 못되었습니다. 석사과정 학생은 향후 대부분 박사과정 학생이 되고 박사과정 학생이 많을수록 연구실의 연구실적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모든 교수님이 석사과정 학생들을 가능하면 많이 받으시려고 각 연구실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통해서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올 석사과정 학생들을 미리 수소문하는 등 여러가지 눈치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본래 유기화학에서 유명하신 어떤 교수님의 아래에서 배우고 싶었지만 나중에 알게된 바로는 입학성적으로 학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출신 대학에 따라 결정된다는 실망스러운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의 대학은 상위권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는 원하는 교수님의 아래로 가는 대신 유기화학 교수님 중에서 저를 받아주실 수 있는 교수님 아래로 가야했습니다. 다행히 경희대 선배님 중 한분이 계신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 교수님은 저의 입학성적을 아시고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선배님이 계신 연구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놀랍게도 동기 2명과 함께 3명이나 그 교수님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실 내에서도 프로젝트가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정하는 것도 실망스럽게도 출신학교 별로 좋은 학교를 나온 학생이 좋은 프로젝트를 받을 수 있어서 저는 처음 6개월간은 다들 받기 싫어하는 프로젝트를 받게 되어서 유기화학반응연구가 아닌 유기화합물 순수정제분리 연구 프로젝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실험실에 오고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시작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개월이 지난 후 어찌된 일인지 저의 프로젝트는 변경되었고 새로운 유기화학반응연구 프로젝트로 배치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Nucleoside Chemistry라는 프로젝트였는데 DNA, RNA의 골격이 되는 Nucleoside 분자의 구조를 수정함으로써 항바이러스제 (Antiviral Agents) 또는 항암제 (Anticancer Agents)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꺼리는 프로젝트였는데 그 이유는 이 물질이 다루기 어려운 물질적 특성 (Physical Properties)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왠지 이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고 Nucleoside라는 분자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연구도 너무나 잘 되어서 금새 반응에 적응하고 데이타를 일주일만에 뽑게 되었습니다.

Nucleoside (1) – 뉴클레오사이드에 꽂히다

석사1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 성적이 나오고 얼마 후 지도교수님이 저를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군, 자네 1학기 성적이 아주 좋아서 2학기까지만 잘 유지하면 조기박사과정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침내 제가 이태석 박사님이 그러셨듯이 조기박사과정으로 갈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기뻤지만 저에게는 당시 말 못할 큰 고민에 빠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욱 어려워진 저의 가정의 상황이었습니다. 대학1학년때 저희 가족은 아파트에서 집달리들에 의해 온집기가 아파트의 지하실로 옮겨지고 쫓겨나는 일을 겪었고 그 날의 경험으로 저는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돈을 벌어서 다시 이 집을 사고야 말리라!

그리고 우리 온가족은 경기도 하남시의 반지하로 옮겨서 몇년간 월세를 살게 되었고 교회와 너무 멀었던 것 때문에 우리는 다시 잠실에 있는 어느 상가건물에 공동화장실을 쓰는 방한칸인 집으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엌도 없어서 아버지께서 약식으로 건물 밖에 간이부엌을 만드셔서 어머니께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만든 상태였습니다.

주중에는 저만의 기숙사 생활로 저자신은 편하게 지냈지만 주말에 집에 갈 때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되니 제가 편하게 더이상 공부만 하고 있어서는 우리 가족의 어려움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도교수님으로 부터 성적이 좋아서 조기박사과정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즐거워 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죠.

오히려 저의 상황을 교수님께 설명을 드려봤자 교수님이 하실 말씀이야 참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저는 어리석게도 2학기 성적을 반대로 깔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역시 2학기 성적은 좋지가 않았고 당연히 지도교수님의 핀잔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에게 이미 지도교수님의 핀잔이나 박사학위 등에 대한 것은 이미 사치 그 자체였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빨리 취직을 해서 우리 가족의 열악한 경제상황에 도움을 주고 새로운 집도 얻게 할 것인가에 저의 생각은 온통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저의 동기 나머지 2명도 박사과정으로 가지 않고 석사로 졸업하고 취직하기로 결정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저는 지도교수님의 박사과정 진학을 하라는 종용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상당기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결심이 확고하고 가정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신 교수님의 포기가 있으셨고 우리 대신 졸업생 중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할 선배 2분을 찾으신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KAIST 석사들은 대기업에서 모셔가는 분위기여서 한 사람 당 2-3개 회사의 오퍼를 쉽게 쥘 수 있었고 이 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 (?)을 제시하는 곳으로 골라서 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조건이라면 대부분 박사학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어떤 회사는 2년 입사 후 바로 박사과정을 보내주는 조건도 있었고 해외 박사과정 유학을 조건으로 내거는 회사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2군데 정도의 오퍼를 이미 받은 상태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 보다는 나의 지도박사과정 선배를 통해 알게된 대기업에 있는 어떤 박사님이 Nucleoside 신약개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회사는 우리학교에 리쿠르터를 보내지 않아서 공채를 통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5년간 회사가 투자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회사의 실적도 좋지 않았고 당연히 월급도 다른 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좋은 회사는 이와 정반대의 회사였습니다. 소위 가장 좋은 회사는…

  • 월급이 많은 회사, 보너스도 많은 회사
  • 일은 상대적으로 적은 회사
  • 대기업
  • 박사학위 등등 소위 조건이 좋은 회사

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저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특히 저의 상황이 큰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회사는 타이어 회사로 고분자화학연구를 하는 회사였는데 조건은 놀랍게도 1년 입사 후 박사과정 진학이었고 월급도 가장 높았습니다.

결정을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저는 갑자기 하나님께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까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마음만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요일에 KAIST안에 있는 과학원교회에서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예배에 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 예배는 졸업할 학생들을 위한 “졸업예배“였습니다.

이 졸업예배의 목사님의 설교제목은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 이셨고 골로새서 3장 22절-24절 말씀으로 제가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4절 말씀: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날 목사님의 말씀은 세상의 기준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대략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하나님이 여러분을 교육시키시고 훈련시켰음을 기억하십시오.
  • 자신의 전공에 맞는 회사가 중소기업이거나 월급이 적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회사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 회사가 고용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용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박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가야할 회사가 곧바로 명확하게 정해져서 다가왔습니다.

바로 Nucleoside를 하는 박사님이 계신 대기업 – SK Chemicals 였던 것이죠. 바로 이 회사가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회사라는 것이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제가 한 연구가 Nucleoside 연구였고 이 회사는 당연히 일은 많고 월급이 적은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그 회사 인사과에 연락을 해서 면접 일정을 잡았고 아무런 조건이 없는 이 회사에 저는 조건없이 공채를 통해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Nucleoside 박사님이 저를 받아주셔서 저는 그 연구실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고 5년간이나 다닐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제가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이사의 교체가 있었고 그 이후 제가 근무한 5년간 회사는 그동안의 나쁜 실적을 만회하고도 남는 우수한 실적으로 회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얼마간의 저축은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를 아버지께 드려서 아버지가 그 이후 사업을 다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에 다닌지 3년만에 모은 돈과 회사를 통해 얻은 대출을 합쳐서 우리는 사당동에 방3개가 있고 화장실도 별도로 모든 것이 잘 정돈된 빌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좋았던 것은 회사에 다닌지 몇년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가 아버지가 신학대학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목회의 길로 가지 않고 사업의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어머니는 아버지나 우리들 중에 목회자가 나오게 해 달라고 오랜동안 기도하고 계셨는데 아무도 목회에는 가지 않게 되어서 고민을 하시고 계셨는데 그러던 중 어머니 자신이 목회를 하라는 말씀을 받으셨다고 하시면 어떤 여성목회신학원 원서를 가지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집까지 이사하게 되시니 감사의 마음이 너무나 크신 것이었죠.

먼저 아버지께 이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셨지만 아버지는 이미 상황 때문에 안된다는 거절을 당하신 상태였는데 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공부에 대한 좌절을 항상 마음에 걸려하던 터라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저는 어머니께 제가 등록금을 내어 드리겠으니 하시라고 하고 첫번째 등록금을 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첫학기를 즐겁게 하셨는데 그 중에 그 소식을 들으신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이 제안하셔서 어머니께서 교회의 전도사로 일을 하실 수 있게 되고 그 월급을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하실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해 전 말기암으로 3-4개월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병상을 지키며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이런 저런 과거 얘기를 하던 중에 어머니께서 이 신학원 공부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머니의 납골당에는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신학대학원 졸업사진”과 학사모 사진과 학위증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우리 어머니는 중졸이시라고 얘기하는데 제 아내가 고쳐 말하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어머니, 대학원 졸업이셔!”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고용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여러가지로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의 삶이 점차 나아짐을 통해서 분명히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용주이시다

이 말씀은 저의 삶의 모토가 되었고 독일과 미국에 살게 될 때에도 지역과 고용주의 변화와 무관하게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고용주이시다.

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4) – 나의 Mentor 이태석 박사님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종종 주위의 사람들이 저를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계획하심의 과정 중에 Moderna가 있을 따름이지 제가 무슨 대운이 있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미 저의 앞의 글을 읽으셨다면 조금은 이해를 하시지 않을까 기대해 보며 4번째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이태석 박사님은 저를 특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반갑게도 이태석 박사님도 신실한 크리스찬이셨고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성품도 매우 온화하시고 언제 나 웃으셨을뿐만 아니라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도 조용히 웃으시고 핀잔 한번 없이 조곤조곤 상세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16주간 이태석 박사님과의 만남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 평생을 잇는 멘토와의 만남으로 발전하게 되어서 제가 진로를 정하고 커리어 상에 중간 중간 고비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셔서 저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과 격려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태석 박사님과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유기화학에 대해서 배울뿐만 아니라 이태석 박사님의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접근방식등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함께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작 학부 1학년 학생인 저에게 이태석 박사님은 큰 산과 같은 분이었고 평생의 멘토가 되어 주셨습니다. 실험의 중요성과 항상 실험실에서 플라스크를 놓치 않고 일을 해야한다는 가르침은 저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 제가 지금까지도 실험실에서 연구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도 중창이나 합창을 좋아했는데 이태석 박사님도 대학 합창반 활동을 하시며 형수님을 만나시는 등 많은 부분에서 저와 이태석 박사님은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한가지 차이점은 제가 가지지 못한 온유함이었는데 차갑고 냉정했던 저에게 이태석 박사님이 한결같이 보여주신 온유함은 큰 위로가 됨과 동시에 정확히 가야하는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르쳐주시는 삶의 이정표가 되어 주셨습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크리스찬의 표현인데요 남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되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단호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태석 박사님을 통해서 KAIST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전액 국비장학금 제도, 식비 등 생활비 지원 제도, 기숙사 생활관, 조기박사제도 (석사입학 1년 후 성적에 따라 바로 박사학위과정으로 진입하여 4년만에 석박사학위를 동시에 끝내는 고속학위과정), 석사입학 병역특례제도 (KAIST 석사과정 입학과 동시에 5년간의 병역특례를 받음으로써 석사과정 이후 기업체에서 3년만 근무하면 병역이 마쳐지는 제도 – 당시 타대학교에는 없어서 기업체에서 5년간 병역특례를 받아야 병역을 마칠 수 있었슴 따라서 KAIST출신은 병역기간이 2년 단축되는 효과로 조기 유학이 가능해짐) 등등 다양한 실생활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 만남을 통해서 제가 KAIST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 조기박사가 될 수 있다면 박사학위까지 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나온 이후에 다니던 바이오텍 회사가 Merck에 인수되면서 전직원이 정리해고가 되었을 때 이태석 박사님이 대표로 계시던 바이오텍 회사의 경영진이 이 박사님과 대치되는 임원을 영입하면서 그 중 사장급 임원이 저에게 조인하기를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절했죠. 나중에 그 사장급 임원이 저와 이태석 박사님의 관계가 그렇게 깊은 줄 몰랐다면서 저에게 사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만큼 이태석 박사님을 존경했고 평생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태석 박사님께 도움은 되지 못할 지언정 피해를 드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대학교 2학년부터 KAIST를 일찌감치 저의 다음번 진로로 생각하고 준비를 했고요 그 생각은 KAIST가 홍릉에서 대전으로 이전하고 과학기술대학교와 합병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생각은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저의 동기들은 KAIST 이전 발표가 나면서 다른 대학원으로 진로를 변경했는데 저만은 시험을 치루었고 좋은 성적으로 KAIST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KAIST에 입학하고 대전 캠퍼스의 기숙사에 살게 되었을 때 한번은 당시 화학연구소 (KRICT)에서 근무하시던 이태석 박사님 연구실에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도 즐겁게 맞이해 주셨고 제가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에는 바이오텍을 창업하셔서 KAIST내에 있는 보육센터에 계셨는데 그 때에도 종종 찾아뵈면 언제든지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연구실에 계셨습니다. 진정한 연구자이셨던 것이죠.

KAIST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때부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주위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겸손해라. 네가 가장 못났다고 여기고 항상 배우고자 노력해라. 절대로 나대지 마라”

이런 말씀을 해 주셔서 저는 다행히 그 잘난 동기들이나 선배님들 사이에서도 제가 가야할 배움의 길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보다 더 이태석 박사님이 처음 KAIST에 들어오신 후에 겪으셨을 많은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경희대학교에서는 물론 레전드가 되셨지만 막상 KAIST 안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왜 없으셨겠어요? 하지만 그럴 때에도 특유의 낙천적이로 긍정적인 자세로 잘 헤쳐 나시고 동기들하고도 관계를 잘 맺으셨기 때문에 무사하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박사학위를 마치셨습니다. 저에게 유기화학을 가르쳐 주시던 때가 벌써 박사님이 마지막 학기를 향해 가는 시기셨어요. 졸업논문 디펜스 등 바쁘셨을 때인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게 여깁니다.

또 하나는 이태석 박사님께 유기화학을 배운 것 때문에 저도 유기화학자가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기화학을 배운 교수님이 계신데 저는 유기화학을 배운 첫번째 교수님이 이태석 박사님이십니다. 물론 이태석 박사님은 그때 그냥 박사과정 학생일뿐 교수 신분은 아니셨지만 제 마음에는 이미 첫번째 교수님이시자 마지막 교수님이시죠.

제가 KAIST에 입학 후 조기박사를 포기하고 석사졸업 결정을 했을 때 아쉬워하셨고요. 제가 대기업을 다니고 나서 다시 KAIST에 박사학위과정에 들어왔을 때는 기뻐해 주셨고 잘한 결정이라고 칭찬해 주셨고요 제가 독일로 나가게 되었을 때에는 격려해 주셨습니다.

항상 모든 면에서 저의 멘토이시면서 큰 산으로 언제나 우뚝 서 계십니다.

My Biotech Memoir – Moderna (3) –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지난번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를 대학에 보내시고 졸업까지 이끄셨는가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제목은 “여호와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께서 매일밤 저의 대학입학을 위해 하나님을 붙드시고 절규하며 철야기도를 하셨던 것 때문일까? 저는 결국 대학에 기적과 같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저를 담금질하셔서 졸업까지 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길이로 저의 가방끈을 늘이신 것입니다.

제가 고3이 되던 해에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입시를 위한 학부모 100일 철야기도”를 한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발표가 있던 시기는 이미 우리집은 부도와 상실감에 빠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에게는 대학에 가야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 100일 철야기도에는 수험생이던 우리들의 기도제목을 내야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철야기도를 할 수 있게된 것을 매우 기뻐하시며 상기된 얼굴로 하루는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기도제목을 뭐라고 적으면 좋겠니?”

고등학교 육성회비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대학 등록금이 나올리 없는 저로서는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국 전액장학금 밖에 없고 대학도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학보다는 등록금이 비교적 저렴한 국립대학을 가야되지 않겠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현재의 상황에서는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 꿈일뿐이었죠. 그래서 어머니께 반 체념한 상태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국립대학 전액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어요. 입학시험 만점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는 저의 너무나 큰 (?) 기도제목에 너무나 기뻐하시며 저의 대학입시 기도제목을 교회에 내셨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교회성도들은 저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셨고 제가 어떤 성적으로 대학에 가게될지 은근히 기대마저 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미 여러상황은 제가 공부에 집중하기에 너무나 저의 머리는 복잡했습니다. 심지어 입시공부가 막바지이던 시절에는 경찰들과의 출현했던 날 이후로 저는 이미 대학에 가는 것을 포기한 상태로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읽는데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입학시험 만점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었죠.

저는 포기했지만 그러나 저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계셨고 매일 기도를 하시고 오셔서는 저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성도들이 너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고 있어!”

포기하지 않으신 분은 어머니 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여러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닛시 (하나님은 승리하신다)나 여호와샬롬 (하나님은 평화를 주신다)와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죠. 나중에 대학부에 가서 배운 단어 중에 저에 대한 하나님을 잘 설명한 단어 하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은 준비하신다.

시간이 지나 결국 대학입시의 날이 되었고 저는 시험을 무사히 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치른 몇일 후 점수를 받게 되었고 당연히 학력고사 만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았지만 그래도 고2때까지 공부는 좀 하는 편이어서 대학을 아주 못 갈 성적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저를 대학에는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고 제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담임선생님과 애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희 학교는 강남8학군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3개 대학에 반에서 20-25등까지는 보내려는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노력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담임선생님도 저를 연세대나 고려대 정도는 보내려고 하셨는데 문제는 저의 대입성적이 저조했고 저의 상황이 전액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루는 저를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성적이라면 연세대 원주캠퍼스에 있는 보건학과에 가면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보건학과를 졸업하면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어. 여기에 지원해 보자!”

하지만 저의 생각은 좀 달랐어요. 아버지의 부도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만약 정말 만약 대학을 갈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고 공부기간이 짧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의미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외할아버지는 당시 중풍을 앓고 계셨는데 삼촌이 한의사가 되어서 가업을 잇기를 원하셨지만 한의대에 가지 않고 일반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고 계셨기 때문에 많이 상심하신 상태였어요. 저는 편찮으신 외할아버지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한의대를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하셨어요.

당시에는 전국에 한의대가 있는 대학은 5개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 전기에 있는 대학은 3개밖에 되지 않았어요. 제일 좋은 대학은 경희대학교 한의대였고 두번째는 원광대학교 한의대였습니다. 그리고 대구한의대라는 단과대학이 있었습니다.

제 머리속에는 조금이라도 입학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에 지원할 필요가 있어서 원광대학교 원서를 얻어야 했어요. 교보문고에서 원광대학교 원서를 교부한다고 해서 두번이나 찾으러 갔지만 어쩐 일인지 2천여장의 원서는 금방 동이 나버려서 저는 원광대학교 원서는 손에 쥐지 못하고 대구한의대 원서만 간신히 얻은 상태였어요. 그날까지 원서를 얻지 못하면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조급해 하며 종로에서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제 마음속에 드는거에요.

“경희대로 가자! 경희대 한의대에도 가능성이 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는 교보문고로 가던 발길을 180도 돌려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경희대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삶이 180도 바뀌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어요. 이미 시간이 2시를 넘어서고 경희대학교에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찾는데 애를 먹어서 5시쯤 되어서야 경희대학교에서 마침내 원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밤 경희대와 대구한의대 원서를 가져온 저를 보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깜짝 놀라셔서 한참동안 아무말도 못하셨어요. 그러더니 아버지께서 갑자기 생각이 나셨는지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 한번 해보자.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지원을 해보자!”

저의 결정을 들으신 담임선생님은 펄쩍 뛰셨습니다. 안된다는 거에요. 왜 연세대 보건학과를 가면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어려운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모험을 거느냐는 거였죠. 그것도 그럴 것이 경희대학교 한의대는 서울대생도 자퇴하고 다시 입학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곳이었고 평생이 보장되는 그런 곳이었어요. 예과2년 본과4년 합쳐서 6년만 공부하고 졸업하면 개업해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학부모들과 수험생 사이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이렇게 펄쩍 뛰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저희 아버지도 완강하셨어요. 저를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담임선생님과 각을 세우시고 저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주셨지요. 지금도 그 날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싸우시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어요. 결국 담임선생님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아신듯 원서를 던져 놓으시고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저는 경희대학교 한의대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지망을 어디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어요.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2지망은 화학과가 어떻겠니? 화학과에 가면 화학회사나 교사도 될 수 있고 제약회사에 다닐 수도 있어.”

아버지는 화공약품회사를 하셨기 때문에 화학전공자가 아니었던 것이 한이셨던 모양이에요. 아마 그래서 화학과로 저를 이끄신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저는 사실 화학보다는 물리를 더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원서를 들고 경희대 접수대로 갔는데 그 접수하는 분이 원서를 가만히 보시더니 저에게 그러시는거에요. 화학과 수원이요? 서울이에요?

알고보니 화학과가 서울캠퍼스와 수원캠퍼스에 있는데 그 사실도 처음 알았지만 저는 당연히 제가 서울캠퍼스에 지원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수원캠퍼스에 있는 화학과로 지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무원의 도움으로 저는 1지망 한의과 2지망 화학과로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 발표가 나기 하루 전에 저는 고열이 흐르며 많이 아팠습니다. 지원을 하고 나니 한의과의 경쟁률이 너무 높았습니다. 거의 기적이 있지 않고는 합격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이제 정말 대학은 안되나보다!’라고 생각이 들은 나머지 저는 그날밤 너무나 많이 아팠습니다. 꿈을 잃은 자의 마지막 절규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교회에는 경희대 한의과 교수이신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 분을 통해 부모님은 제 이름이 한의과 명단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아셨다고 해요.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저로서는 이 시간이 제 평생에 꿀 수 있는 마지막 대학입시의 꿈의 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다음날 아버지와 저는 경희대의 발표장으로 갔고 역시 한의과에는 아무리 몇번을 봐도 제 이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낙심하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아버지가 크게 저를 부르시는거에요.

“합격했다! 합격했어! 화학과에 합격했어! 축하한다! 정말 수고가 많았다! 축하한다! 축하해!”

하며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시며 저의 등을 두드리셨습니다. 이게 제가 화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얘기에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화학이라는 학문. 고등학교 화학선생님은 무조건 외우라고 이론보다는 암기법만 가르치셔서 저는 그 때까지 화학이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국사같은 학문일거라고 생각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입학을 하게 된 저는 이제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화학과에 들어왔으니 이 화학과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든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아니면 다른 식으로 돈을 벌어서 어떻게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야하는 길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저에게 이미 재수는 안된다고 말씀을 하시고 현재 입학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종용을 하는 상황이었어요.

대학입학이 결정된 후 겨울에 대학부의 첫번째 수련회가 있었는데 이 수련회 강사 목사님은 최이우 목사님이라는 분이셨어요. 이번 수련회는 금식 수련회여서 3일간 금식을 하는 것이었는데 수련회가 끝나는 날 목사님께서 새로운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3일간 금식 수련회를 했는데 이 금식기간을 40일로 늘여서 아침만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이렇게 해서 저는 40일간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아침식사를 먹을 돈도 없었기 때문에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매일 12시가 되기 까지 그 전날 6시부터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의 기도제목은 한가지 였습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대학 입학 후 제가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고 도서관은 4년간 제가 보낸 저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입학하자마자 저는 일반화학 (General Chemistry) 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어요. 다행히 일반 물리 (General Physics)와 일반생물 (General Biology)도 수강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역시 일반물리가 가장 재미있었고요. 일반화학은 그 다음이었어요. 그래도 그나마 공부를 해보니 일반화학이 그동안 알던 암기과목이 아니라 나름의 원리와 이론이 있는 과학이라는 것을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점점 화학이라는 학문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몇개월이 지나고 나서 2학년 선배가 도서관에 처박혀있는 저를 불러서 갑자기 두분의 KAIST선배를 소개시켜 주시는 것이었어요. 그 중 한분은 경희대학교 화학과에서 최초로 KAIST에 가신 이태석 박사님이셨고 다른 한분은 그 분의 후배로 역시 KAIST에서 조기박사로 박사과정을 하시고 계신 김경수 박사님이셨어요. 당시에 KAIST가 경희대 바로 옆 홍릉캠퍼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마침 학교에 잠깐 들르신 것인데 2학년 선배님이 저를 눈여겨 두셨다가 이 분이 오셨을 때 소개를 해 주신 것이었죠. 사실 그 때 저는 화학과 동기들 9명과 함께 2학년 전공서적인 유기화학 (Organic Chemistry) 원서를 함께 읽으면서 스터디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 선배님들이 저를 찾은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 자리에서 뜻밖에 제안을 해 주셨어요. 이태석 박사님께서 겨울방학 기간동안 우리를 근처 카페에서 데리고 유기화학책 스터디를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저로서는 너무나 감사했죠. 영어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이 개념이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KAIST에서 조기박사로 박사과정을 하시는 대선배님이 무료로 커피를 사주시면서 스터디를 해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든든한 것이겠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1학년 겨울방학동안 매주 1 Chapter씩 16주간에 걸쳐서 스터디를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을 했지만 하나 둘 떨어져 나가서 결국 저와 2명의 친구가 끝까지 남게 되었고 이 친구와 저는 졸업때까지 전액장학금 1명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가 되게 됩니다. 그렇게 이태석 박사님과 즐거운 겨울방학을 지내고 난 후 유기화학 첫 강의를 듣는 순간부터 저의 머리속은 갑자기 유기화학의 모든 원리가 차곡차곡 정돈되기 시작했고 매번 1등을 놓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다른 전공과목에서도 저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특히 물리화학 (Physical Chemistry)를 잘했고 다른 두개의 전공과목도 공부를 잘해서 2학년까지 전체 수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선배님때까지 전통이 하나 있었는데 매년 한명씩 1-2학년 전체수석은 졸업 때까지 전액장학금을 주는 삼의원장학금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당연히 우리 때에는 제가 그 대상자가 되었는데요 무슨 일인지 그 해 부터는 학부생을 주는 대신 대학원생을 주기로 결정이 되어 버려서 저는 이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저는 나머지 2년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 때까지 계속해서 수석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게 되면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 하신 100일간의 철야기도와 수련회와 함께 한 40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도록 저를 기도로 준비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KAIST 선배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제가 가장 최상의 조건에서 전공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셔서 대학 졸업까지 무사히 (?) 전액장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이 뿐이 아니셨어요. 이후에도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길로 이미 인도하신 큰 계획을 가지고 저를 계속해서 인도해 주셨어요.

고3 시절 1학년때 맞았던 아버지의 부도, 대학입시를 위한 100일 학무모 철야기도회, 경찰과의 극한 대치의 날, 함석헌 선생님의 두권의 책, 40일간의 아침금식기도, 경희대학교 화학과에 2지망으로 입학하고 KAIST 선배님이신 이태석 박사님께 배울 수 있었던 16주간의 즐거웠던 스터디 생활 등등…

너무나 모든 과정이 마치 자로 잰듯이 정확히 계획된 놀라운 하나님의 준비하심..

이 준비하심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오히려 점점더 커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