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투자를 하는 중에 계속 주식형 ETF와 뮤추얼펀드만 말씀을 드렸죠? 제가 아직 사실 채권투자를 통해 재미를 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STIP이라고 Treasury Inflation-Protected Securities (TIPS)에 투자하는 ETF를 추천하는데요. 제가 아직까지는 채권에 적극적이지 않기도 하고 그냥 VOO와 SCHD 로 잘 나눠놓으면 되는 것 같아서 많이 하지는 않는데요 나중에 현금이 필요한 시점에는 STIP을 현금 대용으로 투자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채권이기 때문에 금액이 막 오르거나 하지는 않지만 5년 이내에 현금을 사용해야 한다면 여기에 투자해 놓는 것이 방법이 될 것 같아요.
한국인들이라면 이휘소 박사님에 대해서 존함은 들어봤겠지만 이 분에 대해서는 거의 제대로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노벨상 얘기는 많이 들어도 어떤 사람이 어떤 업적으로 받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요. 미국에서는 그 해에 노벨상이 수상되면 자세히 그 업적에 대해 꽤 오랜동안 여러 언론을 통해 나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영어 이름은 Benjamin Whisoh Lee입니다.
이휘소 박사님에 대해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연구에 동조하다가 피살된 것으로 다들 짐작하지만 강주상 교수님의 “이휘소평전”에서는 이휘소 박사님이 군사정권에 매우 반대하셔서 어떤 협조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나옵니다.
저는 이 분의 업적에 대해 제가 조사한 대로 나누려고 합니다.
이휘소 박사님은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셔서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재직중 도미하셔서 마이애미 대학교 학사, 피츠버그 대학교 석사 및 펜실베니아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전공은 입자물리학이고 Higgs boson, Higgs mechanism이 이휘소 박사님으로 부터 기인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연구내용은 Guage Theory와 Charm Quark에 대한 연구입니다.
Guage Theory는 1964년 “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하셔서 “Higgs Mechanism”으로 이어지도록 기여를 하셨습니다. 참고로 Higgs Mechanism은 2013년 Peter Higgs와 François Englert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업적입니다. 또한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Gerardus ‘t Hooft의 연구방향이 바뀌도록 조언했다고 하고 200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Hugh David Politzer는 수상소감에서 당시 입자물리학자 커뮤니티는 Benjamin Lee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언급을 했을 정도입니다.
Charm Quark는 1975년 이 입자의 질량을 계산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1977년에는 Cosmology에 대한 무거운 Neutrino 질량에 대한 lower bound에 대한 논문을 내셨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분의 연구는 핵무기를 만드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일리노이주 고속도로에서 대형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신 것은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 때가 1977년 6월 16일이었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마지막 유고 논문은 1977년 3월말에 제출되어 9월에 출간되었습니다.
1960년대-70년대는 대한민국은 아직 무슨 연구를 할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외국 유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죠. 이휘소 박사님께서 오랜동안 살아계셨더라면 더 많은 과학적 공헌을 하셨을텐데 참 아쉽네요. 아래는 이휘소 박사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위에 보이는 빛바랜 사진은 이태규 교수님께서 KAIST 화학과 석좌교수로 88세 생신 기념으로 출간한 이태규 박사전기 (1990년)에 있는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우장춘 박사님, 이태규 교수님, 리승기 교수님이십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인에게 과학, 공학을 가르치는 것은 극히 규제를 하고 있어서 당시 제대로 대학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대학에서는 주로 사범대학이 있었을 뿐 4년제 대학으로 정식 대학교육은 아직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세분은 일본 교토에서 함께 계셨는데요. 당시에 이태규 교수님은 교토제국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시고 나중에 프린스턴 대학교에 양자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다시 도미하셨습니다. 해방후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로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태규 교수님은 초대 문리대 학장으로 부임하셔서 젊은 교수님들을 유치하셨는데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 문제로 큰 파동을 겪게 되고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사직하거나 월북을 하게 됩니다. 이태규 교수님께서 이 때 크게 좌절하시고 미국 유타대학교로 오셔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KAIST (당시는 한국과학원 KAIS) 설립을 위해 귀국하셔서 KAIST 화학과를 만드셨습니다. 이태규 교수님은 Eyring-Lee Theory라는 새로운 양자물리화학 이론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리승기 교수님은 교토제국대학교 공업화학과에서 고분자화학을 전공하시고 그동안 비날론 (Vinalon – Vinylon이라고도 함)이라는 새로운 수용성 고분자를 개발하셔서 이 공로로 교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리승기 교수님도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으로 부임하셨으나 이태규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설치안 문제로 파동을 겪으셨고 한국전쟁 때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김일성의 친서에 설득당해서 북한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1950년대 남한에는 변변한 화학공업시설이 없었던 반면에 북한에는 함경남도 흥남에 일본자본에 의해 설립된 화학공장이 있어서 여기에서 합성섬유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날론 공장이 아직도 북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어 생산된다고 합니다.
남북 분단이라는 민족비극에 의해 비록 이태규 교수님은 남한으로 리승기 교수님은 북한으로 가시게 되었지만 두 분 모두 해방 초기 유년기에 있던 남북한의 화학 인재를 양성하고 산업화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신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분과 함께 우장춘 교수님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신 관계로 일본어를 사용하시고 일본식 습관을 사용하는 것이 초기에 많은 오해를 불러온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대학교 설치안 파동을 겪을 때 이태규 교수님과 리승기 교수님 모두그런 문제로 동료 교수들 (사실 젊은 교수들) 로 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려청자, 이조백자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도자기 기술은 예로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요 기록이 없다보니 할 수 없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가게 된 두 도자기 장인에 대해 소개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위에 사진인 2014년에 일본에 포로로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꽃을 피우신 이삼평 선생님과 심당길 선생님의 전시회가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는 포스터를 옮겨온 것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번의 전쟁을 통해 일본에서는 조선의 도공을 많이 납치해서 일본으로 잡아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분들의 삶이 굉장히 고되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시겠지만 실제로 이 분들을 데려간 일본에서의 대접은 달랐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로 인해 양인에 머물렀지만 일본에서는 장인으로 모셔서 일반인에게 없는 성을 부여하고 또한 지금은 사당까지 만들어서 지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삼평 선생님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의 조선도공(陶工) 납치계획에 따라 사가(佐賀) 나베시마번(鍋島藩)에 의하여 1594년 또는 1596년경에 일본에 끌려가, 처음에는 가라쓰(唐津) 근방에 상륙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이삼평 선생님에 의해서 시작된 가라쓰도자기입니다. 그 뒤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아스미산(泉山)에서 백자광(白磁礦)을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삼평 선생님은 일가족 18명과 함께 이곳에 이사하여 도향(陶鄕)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고, 이후 30여년 안에 이곳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을 이루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리타는 두메산골로 1590년대의 지도에는 지명이 전혀 나와 있지 않던 곳이었으나 1680년대의 지도에는 아리타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삼평과 함께 납치되었던 도공은 155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리타명산(有田皿山)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이곳은 대도향(大陶鄕)으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에도(江戶) 후기로 오면 이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일본 여러 지방의 자기 중 단연 제일로 손꼽히게 발전하였고 이마리항(港)을 통하여 널리 수출되었습니다.
아리타도자기의 특징은 아리타 내산제요(內山諸窯)와 외산제요(外山諸窯)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산의 제요는 이삼평 선생님이 발견한 백자광 아스미산의 도석(陶石)과 시라카와산(白川山)의 유석(釉石)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삼평선생님의 지휘 아래 번청(藩廳)이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주문에 의한 상등품의 제작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주로 개물류(蓋物類), 도발극상(兜鉢極上)의 침향호류(沈香壺類), 회석상(會席床)의 식기류, 세공(細工)의 향로류(香爐類)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초기 이마리는 단순한 조선식 백자이며, 고(古)이마리는 아리타 백자로 바뀐 일본 최초의 백자였습니다. 또, 아리타 외산제요는 지주나 상인들의 일상 식기류를 주로 구웠고, 제품의 대부분은 청자·청화백자·백자 등으로 서민적입니다. 또한 대발류(大鉢類)로부터 유합(油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을 가진 것으로 초문(草文) 등을 그린 자유분방한 작품이 많습니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기계화의 근대화된 기법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현재 크고작은 백수십 개의 가마가 설치되어 최대의 도향으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도조(陶祖) 이삼평 선생님의 기념비는 아리타마을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의 뒷산에 위치하여 아리타도업(有田陶業)의 장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심당길 님의 후손은 지금도 “심수관 (沈壽官)“이라는 이름으로 15대째 일본의 도기 장인 집안을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심당길선생님은 정유재란 때 시마즈요시히로(島津義弘)에 의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가셨고 일본 사스마도기(薩摩燒)를 개창하셨습니다.
1598년 12월, 시마즈요시히로에 의해 남원 등지에서 심당길과 박평의를 비롯하여 40여인이 피랍되어 가고시마현 구시기노시마하라(串木野島平)에 상륙하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심당길(沈當吉)은 청송 심씨로 남원근교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족은 1603년 구시기노(串木野)로부터 현재의 히오키군 히가시 이치키죠 미야마(日置郡 東市 來町 美山) 나에시로가(苗代川)에 이주하여 나에시로가와(苗代川燒)를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 심당길은 박평의와 함께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白土)를 발굴하여 오늘날의 사쓰마도기를 개창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흙은 조선의 흙과 달라서 이 백토를 발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쓰마번주는 이들을 사무라이급(士班)으로 예우를 하였으며, 이들이 구워낸 도자기에 사쓰마의 번명(藩名)을 붙여 “사쓰마도기(薩摩燒)”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후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가면서, 조선도자기의 흐름과 기예를 계승·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873년 제12대 심수관은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쌍을 출품하여 서구세계에 사쓰마도기의 수출이 시작되어 ‘사쓰마웨어’라는 이름은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가 될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제14대 심수관은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遠太郞)가 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1988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조선 도공과 포로를 귀국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조선에 돌아가면 여러 어려움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급의 대접을 받고 있어서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도자기 기술은 무기화학재료를 이용한 중요한 기술이며 이 도자기에서 사용한 화로는 나중에 제철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도공들도 기록이 있으면 좋겠지만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