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ube 중에 정말 들어볼 만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가끔은 보석같은 강의가 있습니다.
오늘은 강팔용 한국청지기 아카데미 대표이 “크리스찬에서 은퇴는 없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번 블로그는 크리스찬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라고 생각하시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 크리스찬은 영원히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초기 크리스찬들이 그 어려운 박해를 겪으면서도 배교보다는 순교를 택했죠. 우리는 순교를 하거나 배교를 강요당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구요?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잊고 현재의 삶을 즐기는데로 빠져버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강팔용 대표님께서 하시는 강의를 잘 들어보시면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으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지 아실 수 있을 거에요.
저도 이 분의 강의와 John Piper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크리스찬에게 은퇴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모든 크리스찬들께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In God We Trust b/c God Is With Us!
Unretirement에 대해 블로그를 쓰는 중인데요 예전에 Youtube에서 “은퇴”라고 검색어를 치면 대부분의 얘기는 정말 우울해서 보지 않는게 더 좋았을걸 할 때가 정말 많았어요. 돈 문제, 상실감 뭐 이런게 주를 이뤘던 것 같고요 저는 은퇴를 당한 분들의 사례를 보면서 그런 사례가 혹시 퇴직을 해야 하는 분들께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좀 의아했어요.
그러던 중에 찾은 Youtube가 하나 있는데요. “거누파파네” 입니다.
여기서 거누는 건우라는 유기견의 이름이에요. 여기의 아버지가 거누파파이시고 주인공이세요. 이 분이 죽 지방에서 근무하시다가 퇴직을 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셔서 유기견을 임시보호하던 가족들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얘기를 막내딸이신 최세화님이 Youtube에 올리면서 화제가 된 사이트입니다. 거누파파님은 딸딸이 아빠이십니다. 아! 딸이 최고죠!!
거누파파님께서 경상도 걸걸한 어투로 말씀을 하시지만 마음은 참 따뜻한 분이라는 게 느껴지고요 이 분은 정말 그냥 쉬고 싶으셨데요. 지금 퇴직을 하시고 4년이 지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일을 계속하시는 중이신데 본인은 은퇴하고 논다고 말씀을 하세요.
여하튼 이 분의 영상 중에서 퇴직 4년차가 전하는 영상이 있어요. 그걸 좀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퇴직 1년차 영상이에요.
다음에 3년차 영상이고요.
마지막으로 최근에 찍으신 4년차 영상입니다. 다 보시기 싫으시면 4년차 영상만 보셔도 됩니다. 이 분이 1년차부터 4년차까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올리신게 있거든요.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 때 Hiring Manager가 얘기해 준 Tip을 중심으로 Research Presentation을 준비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가지 테마로 준비를 하는데요. 처음 것과 두번째 것은 다른 Research에 대한 것이에요. 예를 들면 첫번째 것은 박사과정 중 한 어떤 연구 둘째 것은 최근에 한 중요한 연구 이런 순인거죠.
보통 발표를 하기 전에 얘기를 하시면 좋지만 요즘에는 발표 중간에 보통 질문이 많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당황하지 마시고 발표 중간에 질문이 오면 잘 대답하시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발표 연습은 당연히 많이 하셔야 하는데요 저는 이 부분이 중요한 커리어코치가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One-on-one Interview의 경우에는요 인터뷰 전에 스케줄을 보내주잖아요? 먼저 일단 Linkedin에서 그 분들을 다 찾아서 친구신청을 하시는게 좋아요. 어차피 다 만날 예정이지만 먼저 찾아보는거죠. 그러면서 그 분들의 이력을 일단 연구를 하세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결국에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슨 질문을 그 사람에게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각 사람에 맞는 질문을 준비하시는게 좋아요.
만약 동료의 경우에는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된 동기, 일한지 얼마나 됐는지? 좋은점 나쁜점? 출퇴근은 어떤지 등등 실질적인 것을 물어보시면 좋고요.
만약 나보다 낮은 직급의 경우에는 혹시 매니지를 해야할 수도 있으니까 일하면서 어떤 점을 매니저에게 원하는지, 무슨 연구를 하는지 등을 물어보시면 돼요. 사실 낮은 직급은 좀 쉬운 면도 있어요.
어려운 사람이 높은 직급의 경우인데요 Hiring Manager는 이미 제 편이에요. 그러니까 Hiring Manager와 만나시면 오늘 어떤 사람과의 면접이 중요할지 슬쩍 질문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Hiring Manager에게 이것은 부탁을 하세요. 인터뷰 끝나고 Interviewers에게 Thank-Note를 보내고 싶은데 그 분들의 Email을 알려줄 수 있는지요? Thank-Note 중요하거든요.
Hiring Manger보다 높은 직급의 경우에는 좀 큰 그림에서 질문을 준비하는게 좋아요.
예를 들면, 이 팀의 향후 3-5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이 팀에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그 분에게도 이전 직장과 비교해서 (보통 경력이 많으니까) 지금 회사가 좋다고 생각하는점은?
이런 것을 물어보시면 좋아요.
Lunch interview의 경우에는 식사는 거의 포기하신다고 생각하시고 간단한 식사를 시키세요. 너무 많이 드셔야 하면 인터뷰를 망칠 수 있으니까 간단한 샐러드나 연어 같은걸 시키세요.
여기까지 하시고 잘 집에 오시면 됩니다. 인터뷰가 끝나면 됐는지 되지 않았는지 대강 감이 오실거에요.
어떤 경우에는 Lab Tour같은 것도 시켜줍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답글을 남겨주시면 연락을 드리고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보스턴에서 함께 일할 날을 기대합니다. Cheers!!
여기에 더해서 좀 전문적인 과학 혹은 의학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Medical Writer라고 하는데요. 이에 대한 협회도 있습니다.
Medical Writer가 하는 일은 홍보용 제작물을 쓰는 것부터 미디어에 글을 쓰는 것까지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저는 좀 어린학생들 혹은 과학자로 커리어를 찾고자 하는 대학원생이나 포스닥 들을 위한 Medical Writer가 되고 싶은 나름의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젊은 세대에게 마음이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Medical Writer가 되려면 다소 저널리스트의 마음가짐이 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Science Illustrator와 Medical Writer가 합쳐지면 청년들에게 쉽게 Science Career에 대한 이해를 얻어내고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좀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좀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단 그래서 글을 좀 계속 쓰는 중이에요.
일단은 한국어로 블로그를 쓰고는 있는데요. 어느 정도 JinsooLim.com이 안정이 되면 따로 영어 블로그를 새로운 계정으로 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버킷리스트는 현재 진행형인 셈이죠.
요즘 저보다 연소한 분들의 세바시나 Ted Talk을 좀 많이 듣고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이드신 분들의 경륜있는 말씀도 좋지만 젊은 분들이 어떤 경지에 오르는 건 상당한 노력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좀더 경청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모험을 하는 그 분들의 말씀이 많이 다가옵니다.
박재민 배우님의 세바시 강연이 좋더라구요. 도전과 성장 – 저도 계속 도전하며 성장하려고 합니다.
박재민님은 오랜동안 과정을 쌓는법을 이미 알고 실천하고 계셨더라구요. 저는 이제야 좀 알게 되었는데 말이죠. 정말 많은 분들이 저의 스승이라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네요.
Medical Writer를 위해 앞서 나가려고 해요. 모두 화이팅입니다. 자기만의 버킷리스트를 써보세요. 화이팅!!
컨디션이 나쁘거나 회식 약속 등 정말 불가피한 상황에는 어떻게 하는지 묻자, “그럴 때는 체육관에 가서 역기를 한 번 들었다 내려놓고 그냥 가는 것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며 좋은 습관을 이어가는 방법”
“운동은 결코 시간의 낭비가 아니고, 시간의 효과를 더 증대시켜주는 것”
김종순 교수는 전공 학문을 넘어 운동 지식을 통한 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내 및 국제 퍼스널트레이너 자격증도 여러개 획득했으며 실버세대들의 운동이 건강 자체만을 위한다기보다는 ‘행복’과 연결시키기 위한 고리가 없는지 부터 ‘건강’, ‘노동생산성’ 및 ‘행복’을 효과적으로 증대시키는 원리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저술하려고 했다.
한국과학기술에 대해 새롭게 메뉴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국과학기술자들이 이룬 중요한 과학적 업적들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아직은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자세히 연구하고 쓸 수 없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면 제 스스로 한국과학기술 연구자가 되어 좀더 학술적인 의미의 연구를 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의: 참고로 제가 지금부터 쓰는 것은 제가 나름 인터넷에 의존한 자료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향후 추가 연구에 의해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검증하여 최대한 사료에 맞는 내용으로 수정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 – 두분의 과학기술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사람 중 김감불은 양인이었고 김검동은 노비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분은 조선시대 연산군 때의 사람입니다. 시대가 이미 얄궂습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이었으니까요. 연산군이 폐위된 후 연산군 때에 있었던 모든 것들은 반란의 적폐가 되고 말았죠. 여기에서 불행의 씨앗이 시작이 됩니다.
이 두분의 이야기는 연산군 일기 연산군9년 (1503년) 5월 18일편에 짧게 나온다고 합니다.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종 김검동이, 납[鉛鐵]으로 은을 불리어 바치며 말하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猛灰]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속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시험해 보라 하였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납 (연)으로 은을 순수하게 정제할 수 있는 (불릴수 있는 으로 표현) 기술 – 그래서 “연은분리술“이라고 합니다.
이 기술은 현대 과학기술로 말하면 “녹는점 차이를 이용한 물리화학적 비철금속정제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납은 원자기호가 Pb인데 녹는점이 섭씨 327.5 도입니다.
은은 원자기호가 Ag인데 녹는점이 섭씨 961.8 도 입니다.
녹는점 차이가 3배나 차이가 나죠?
보통 광석에는 납이 함량이 주로이고 은은 적습니다. 납의 녹는점이 은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납의 녹는점 이상 – 즉, 섭씨 327.5도 이상의 고온 – 으로 광석에 열을 주면 납은 서서히 녹아 나오게 되고 순수한 은만 남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요 조선 중기 당시 기술로 섭씨 327.5 도 이상의 고온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은이 되었는지 아직 납 뿐만 아니라 다른 금속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정말 순수한 은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녹임이 아닌 여러 단계의 정제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나름 정교한 공정개발을 한 셈이에요.
김감불과 김검동, 두분의 과학기술자는 이 기술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에게 알리기 전에 수많은 반복실험과 공정최적화 실험을 해서 정말로 순수한 은을 만들 수 있는 연은분리술 (회취법) 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연산군 앞에서 한 실험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총애하던 장녹수의 가문이 이 기술을 이용해서 은을 분리하는 광산을 만들어 큰 부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저의 연구가 아니므로 가설로 남깁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이 광산은 폐쇄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고 난 뒤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증거가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9일)
일본 시네마현에 있는 이와미 은광(石見銀山)은 세계적인 은광 유적으로 유명하고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526년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가 조선에서 경수(慶寿)와 종단(宗丹)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연은분리법을 습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일본의 은광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어 한 때 전세계 은화의 1/3을 일본 은광에서 재련한 은이 사용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일본의 이러한 비약적인 은광산업의 결과 일본의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고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주류입니다.
김감불과 김검둥이라는 두분은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양인과 노비로 천한 계급이었지만 이분은 우리 역사상 중요한 화학기술자였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면 후배 화학자로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1503년 5월 18일: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다(銀可足用)”며 흡족해하고 닷새 뒤에는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는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캐도록 지시한다. 또한 공조판서 정미수 (1456-1512, 56세)가 민간에 채굴을 허용 하는 대신 세금을 내게하는 채은납세제(採銀納稅制)와 행장을 발급하라고 건의했으며 연산군은 이를 시행한다. 당시 납부 금액은 채굴하는 한 사람 당 1일에 은 1냥이었다.
연은분리법이 고안되기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은을 얻는 방법은 (1) 중국에서 구리와 은을 분리하는 방법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2) 다른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광석을 태운 다음 재에서 은을 걸러내는 원시적인 방법이 주를 이뤘고, 따라서 은의 생산량은 미진한 상태였다. 연은분리법은 이전에 중국에서 사용하던 회취법보다도 더 효율적이었으며, 더 많은 은을 산출할 수 있었고, 명나라의 실용서 <천공개물> 등에 소개되면서 널리 퍼졌다.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가고 중종이 즉위한 1506년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은광 채굴을 금지시킨다.
1507년 4월: 연은분리법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후 몇몇 대신들은 재정 부양을 위해서 민간에 은 채굴을 다시 허용하자고 요청해 민간에 은광 채굴이 일시 허용된다.
1508년: 단천에서 은이 많이 나는데 이걸 군민들이 무단으로 캐서 통사(通事)에게 팔고 통사가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지고 가는 일이 있다며, 즉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고 있으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자 중종은 이를 단속할 강직한 사람을 보내 관리 감독하게 하고 단천의 은은 1년간 나라에서 사용할 분량만큼만 캐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한다.(중종실록 7권)
1521년 8월: “금물(禁物)을 교역한 자는 김형석만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천(端川)에서 생산되는 연광(鉛鑛)을 취련(吹鍊)하여 은을 만들기 때문에 은 값이 매우 저렴하였는데 지금은 전보다 점차 비싸졌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북경으로 가는 통사(通事)들이 많이 갖고 가서 중국에 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은을 생산하는 곳이 있을지라도 실로 우리 나라의 이익은 아닌 것입니다. 단천에 은(銀)이 생산되는 곳은 관(官)이 지정한 곳뿐이 아니고 곳곳에 있습니다. 선왕(先王)의 제도에 산림천택(山林川擇)을 비록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였으나, 또한 엄금(嚴禁)하여 씀씀이를 절약하였으니 아마 생산에 한계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은을 산출(産出)하는 각처의 공천(公賤)으로 하여금 채취(採取)해서 공(貢)으로 바치게 하여 불시(不時)의 수요(需要)에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항상 이 일을 계청(啓請)하고자 하였으나, 말하는 사람이 재리(財利)를 말한다고 비난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감히 주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관원을 보내서 감독하여 채취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국용(國用)에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종실록 42권, 중종 18년(1521년) 8월 27일 병오 1조]
1523년 8월 11일: 통사(通事)들이 법금(法禁)을 어기고 단천(端川)의 은(銀)을 가져가므로 중국 사람들이 다 ‘단천의 은이 아니면 안된다.’ 하니, 만일 중국에서 공납(貢納)을 요구하면 그 폐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사사로 가져가는 금은(金銀)·주옥(珠玉)에 대해서는 본디 그 법금이 있으니, 이제 다시 더욱 밝혀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사신도 아울러 다스리소서. 또 공무역(公貿易)은 긴요하게 관계되는 물건이 아니니 수량을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행차에 있어서 법금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더욱 밝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신도 아울러 죄주도록 하라. 공무역도 적당히 줄이도록 승전(承傳)을 바치라.” 하였다.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8월 11일 무신 1조]
1523년 9월: 신이 전에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서 단천(端川)에서 은(銀)을 캐는 일을 보았습니다. 은을 캐는 구멍은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이 깊고 또 그 구멍이 매우 좁아서 겨우 세 사람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은을 캘 때에는 벌거벗고 코를 막고 목구멍을 가리고 횃불을 밝히고서 들어가니, 구멍 안에 오래 들어가 있지 못하고 곧 다시 나오는데, 형색(形色)이 죄다 변하여 산 기색이 아주 없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각 고을에 사는 공천(公賤)을 시켜 그 신역(身役)을 갈음하여 캐게 하므로 민폐가 없을 듯하나, 캐는 것은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사람을 사서 대신하니, 단천 백성이 홀로 그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은 항산(恒産)이 없어 산전(山田)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므로 가난하기가 다른 도(道)보다 갑절 심한데, 봄·가을로 은을 캐면 백성의 힘이 다하여 유리(流離)하게 될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한 두해쯤 걸러서 캐게 하여 힘을 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9월 12일 기묘 1조]
1526년: 일본의 긴잔큐키(銀山日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1526년 히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慶寿, 게이주)와 종단(宗丹, 소탄)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하여,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에 관한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은광석에 납이 다량으로 섞여 있던 이와미 은광에서 이 연은분리법 전래는 일본의 은 생산을 대량으로 증가시킨다. [이와미 은광의 역사]
1529년 7월: 형조(刑曹)가 아뢰기를, “김감불(金甘佛)과 홍의강(洪義江)의 일은 본도(本道) 【평안도(平安道).】 의 계본(啓本)에 의거 예조(禮曹)에서 추고, 결안(結案)을 올리고 본조로 하여금 조율(照律)하게 하였습니다. 김감불 【김동난(金同難)의 사촌이다.】 은 마필(馬匹)만 훔쳐 중국 사람에게 주었고, 자신은 아직 우리 나라에 있으니 사죄(死罪)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발꿈치를 자르고 얼굴에 자자(刺字)하여 전가(全家)를 먼 섬에 영속(永屬)시켜 노예로 삼는다는 율(律)로 조율하였습니다. 홍의강은 뇌물을 받고 김동난(金同難)을 고의로 놓아준 것으로 공초(供招)을 받았었으나, 결안할 때에는 범연(泛然)히 공초를 받은 탓으로 뇌물을 받고 고의로 놓아주었다는 말이 없어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다시 추고하여 귀일시킨 다음 결안을 고쳐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김감불의 일은, 당초 김동난을 추문하면 자기가 말을 훔친 일이 탄로날까 우려되었기 때문에 먼저 놓아보내고 싶어서 홍의강에게 청하여 놓아보낸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홍의강은 뇌물을 받고 고의로 놓아주었다 하여 일죄(一罪)로 조율하였다. 감불은 먼저 의견을 내어 고의로 놓아보낸 사람인데도 도리어 홍의강의 죄보다 낮다. 몰래 금물(禁物)을 매각한 죄 또한 무거운 것인 바, 지금 이 조율은 온당치 못한 것 같다. 공사(公事)에 의거하여 조처하고 또 삼공에게 의논하라.” [중종실록 65권, 중종 24년 (1529년) 7월 7일 경자 2번째기사]
1533년 6월: 한효원은 아뢰기를, “신이 전에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보았는데, 은을 캐는 일은 과연 상의 분부처럼 압사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은이 난다는 말을 듣고 그 근처 사람들을 추문(推問)하였으나 굳게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신(刑訊)까지 하면서 철저히 추문한 뒤에야 사실대로 공초(供招)하였고 캐어 보니 과연 은이 있었습니다. 전에 캔 곳보다 더 많았습니다만, 많은 백성들이 몰래 캐어 가므로 지금은 바닥이 났다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은이 나는 곳이 한 곳뿐이 아닙니다. 단, 국금(國禁)이 이와 같기 때문에 캐지 못하는 것이지, 백성에게 캐서 팔게 한다면 캐기는 쉬울 것입니다.” 하고, 장순손은 아뢰기를, “국금이 비록 빈틈이 없다지만 부경하는 사신 일행 중에 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자가 없어서 함경도로 들어가는 부상대가(富商大賈)는 모두가 은 캐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합니다. 신들은 생재의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1533년) 6월 24일 을미 1조]
단천에서 나는 품질 좋은 은 때문에 여러 폐단들이 나타났는데 은을 캐기 위해 깊게 파고 들어가다 구멍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압사하는 사고도 꽤나 많았다. 또 단천 현지에서는 납을 은으로 잘 정제해 보냈는데 이것이 덩어리의 형태로 가공될 때 일부 장인들이 그 안에 다른 것을 넣고 은을 겉에 씌워 유통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어차피 무게를 따지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말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게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은이 단천에서만 나는 것은 아닐텐데 단천에서만 채굴하다보니 폐단이 크고 그곳의 백성들만 고통받고 있으니 다른 곳에서도 채굴 시험을 해보라는 명이 나오기도 한다.
1537년 7월: 은광 개발을 하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사례가 나온다. 그 중 하나인 중종실록에는 종4품 판관으로 있었던 유서종(柳緖宗)이라는 사람이 일본인을 끌어들여 연은분리법을 유출했다는 내용이다. 유서종이 실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의주 판관(義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일가가 패란된 일이 많아 조관에 합당치 않으니 개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1537년) 7월 16일 계사 1조]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은 유서종 일가가 모반에 관여된 일이 있으므로 조관(朝官, 조정의 관직)에 임명하기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조정에서 이 유서종이라는 사람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539년 7월: 그리고 이어 2년 뒤 유서종이 왜인과 접선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헌부가 유서종의 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여 왕에게 고한 내용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주 판관(全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김해(金海)에 있을 때 사인(私人)을 거느리고 바다 밖의 가덕도(加德島)에서 수렵하다가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모(金某)에게 체포된 일이 있었고 또한 서울 부상(富商)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접주(接主)시키는 한편, 왜노(倭奴)를 끌어들여 우리 나라 복장으로 갈아 입히고 매매(買賣)를 하도록 한 후에 병사(兵使) 김순고(金舜皐) 에게 청하기를, 나에게 공문(公文)을 준다면 가덕도에 들어가서 왜병을 포착해 올 수 있다고 하였으나 병사가 들어주지 않고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유서종의 계획은 자기 집에 왕래하는 왜인을 죽여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변방에 말썽을 일으켰으니 이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조옥에 내려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윤7월 1일 병신 2조]
“유서종이라는 관리는 가덕도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으로 동래 현령에게 걸린 전과가 있으며,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을 접대한 적도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일본 사람을 위장전입시켜 거짓된 공을 쌓고자 했으니 중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고 보고한 것이다. 정확한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지만 끝에 일본인을 죽이려다 어떻게 이야기가 샌 모양이다.
1539년 8월: 이 사건에서 연은분리법이 관여된 것은 다음 기록에 나온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유서종(柳緖宗)은 잘못이 많으니 죽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刑訊)하라. 다만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일이 증거가 없으니 지적할 수는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이 죄를 법에 비추어보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 다만 상인(商人)을 불러 접주(接主)시킨 것과 ‘나에게 공문(公文)을 달라고 한 일’로 조율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을 따지지 않고 수없이 형신하여 끝까지 추문해야 하겠는가? 삼공에게 하문하라. 윤은보가 의논한 유서종이 범한 죄는, 당초에 대간이 아뢴 것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든 죽을 죄는 예(列)로 보아 반드시 먼저 증거를 조사해서 그 단서를 얻은 뒤에 비로소 본인을 국문하는 법인데, 서종이 범한 죄는 사간(事干)을 조사하지도 않고 먼저 본인을 조사하여 신문(訊問)을 두 차례나 하였으니, 중한 죄수를 조사하여 국문하는 예(列)에 어긋나는 것 같다. 서종이 만일 시골 집에서 쇠를 불려 은을 만들고 심지어 왜노(倭奴)에게 그 방법을 전습시켰다면 이웃집에서 반드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니, 서종의 집에서 가까운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하여 실증(實證)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홍언필이 의논한 유서종을 국문하자는 일은, 처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조정의 관원으로서 심지어 납을 불려 은을 만들어서 마치 장사꾼과 같이 했으니 여러번 형신을 받더라도 죄가 남을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잘못 형벌이나 신문을 받아서 죽게 한다면 이는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다만 법사(法司)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요 또 죄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으니, 우선 국문만 하다가 일이 장차 밝혀진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 (1539년) 8월 19일 계미 1번째기사]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한 고급 기술이었는데, 이를 일본에 유출한 것은 큰 문제가 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민간에 많이 있었다.
1540년 9월: “이제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계본(啓本)을 보니 ‘진상하는 은(銀)의 수량을 항상 1천여 냥으로 표준삼아 왔는데, 올해는 여러 곳에서 연철(鉛鐵)을 캔 수량이 전례(前例)에 비하여 5분의 1도 안 되므로 정해진 기한까지 앞으로 한 달 동안 일을 하더라도 수량을 채울 수 없으며, 단천(端川)의 은을 채취해 오던 곳은 연맥(鉛脤)이 이미 끊어졌다.’고 하였다. 만약 예년의 수량대로 채취하라고 한다면 민폐가 적지 않을 것이니 예년의 수량에 구애되지 말고 현재 채취한 수량만으로 제련하여 올려보내라고 공조에 이르라.” [중종실록 93권, 중종 35년(1540년) 9월 10일 무술 1조]
이 시점에서는 단천의 은도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단천의 은을 채굴하지 말라는 명까지 내려진다.
1542년 6월: “근래 왜인들이 잇달아 은을 가지고 와서 나라에서 무역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국용(國用)이 부족하지 않다. 단천(端川)에서 은을 캐는 폐단이 많다고 하니, 5년을 한도로 하여 캐지 못하도록 하라. 민간에서 만약 몰래 채굴한다면 나라의 법이 엄중하지 않게 되니 엄히 금지하라.” [중종실록 98권, 중종 37년(1542년) 6월 9일 무자 1조]
일본의 은광 역사
조선의 기술자들이 전래한 연은분리법은 이와미 은광에서 크게 성공하여,
1533년에 이미 인근의 다른 은광들에까지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1562년에는 모리(毛利) 가에 의해 은광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은광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은광은 다이묘들의 전략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로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관백(關白)이 되어 은광을 모리 가와 공동 관리하게 되었으며 도요토미 사후에는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 권리가 넘어갔다.
에도 막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누에바 에스파냐의 은광에서 주로 행해졌던 수은-아말감 공정(Amalgamation process)을 도입하여 생산량을 더욱 늘리려 했다. 수은-아말감 공정은 은광석을 부순 뒤 바닷물과 수은을 섞어 아말감을 침전시킨 뒤에 수은을 증발시켜 은만 남기는 방법이다. 이는 일본에 ‘수은 흘려보내기(水銀流し; 스이긴나가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일부 광산에서 채용되었으나, 결정적으로 일본에서는 수은 산출이 적어 값이 매우 비쌌고, 이 시점에는 이미 연은분리법이 각지에 뿌리내리고 있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17세기에 이르러 이와미 은광의 은 산출량은 연 수십 톤에 달했으며, 일본 내 본격적으로 은본위제도가 확립되었고 조선 및 청나라와의 교역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덕분에 일본은 17세기 초 세계 3위의 은 생산국가로써 은 본위제 체제의 큰 손으로 떠올랐으며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촉진시키는 커다란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제 이번주 목요일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카타르 월드컵 경기 우루과이전이 시작되는데요. 꼭 이겨서 16강 이상의 목표를 이루길 기원합니다. 월드컵 때가 되면 온 나라가 하나가 된 느낌이 들어서 참 좋습니다. 올림픽 때에는 아무래도 경기종목이 여러가지다 보니까 그런 느낌이 없는데 월드컵은 모두 축구만 쳐다보고 있으니 단합이 훨씬 쉬운 것 같아요. Go Korea!!
순수과학 전공자로 그리고 바이오텍 전문가로 미국에서 살면서 인생2막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적는 중입니다. 예전에 중고등학생 때 국사시간에 가끔 과학자나 기술자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고 공부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장영실 이야기 – 지금도 한국에서 장영실 상이라는 것이 있죠.
최무선 이야기 – 화포 발명 이야기
거북선 이야기 – 이순신 장군의 여러 전투에 쓰인 배이지만 우리에게 추측만 무성할 뿐 증거는 없는..
실학자 정약용 이야기 – 수원성 축조 등
금속활자 이야기 – 구텐베르그 보다 200년이 빨랐다는 그런데 조선시대에서는 별로 안 썼다는..
이런 것이 보통 전해져 오는 얘기이죠.
제가 대한민국의 과학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한가지 질문 때문이에요.
“대한민국의 과학과 과학은 정말 이것밖에 안될까?“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교과서에 나오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다만 대한민국의 과거에도 좋은 과학자, 기술자가 있었는데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증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조선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사학자이지 과학자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 것 같아요.
항상 느끼지만 기록을 남기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록을 잘 남기는 나라가 있어요. 예를 들면 옆나라 일본이에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침략과 일제시대를 겪어서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잘 알지만 사실 조선의 과학이나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결국 일본 자료를 찾아보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어요. 그만큼 일본 학자들이 기록을 소중히 해 왔다는 증거죠.
독일, 프랑스, 영국과 같은 나라에도 기록들이 많이 있고 그런 기록들이 잘 보존되고 계승되었기 때문에 사실 지금 미국이 과학 강국이 된 밑바탕이 되었거든요. 이들은 계속 자신들의 과학자를 연구하고 있어요. 이미 연구가 많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해 연구논문을 발표하거나 묶어서 책을 내서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 오히려 중국이나 이집트, 이탈리아, 터어키 같은 나라들은 자신들이 가진 좋은 역사와 과학사에 대해 오히려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 과학사 – 특히 조선 과학사 – 의 경우에는 연구할 내용이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노벨상이 발표될 때가 되면 언론에서 그것에 대해 한국의 어떤 교수님들이 가능성이 있다는 둥 설레발이 치다가 막상 다른 나라 사람들이 받게되면 곧바로 사그라지곤 하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 선조들 중에도 좋은 과학자들이 정말 많이 계셨어요. 다만 잘 모르고 그 분들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좋은 과학자들이 계속 묻히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KAIST 석사과정을 입학하기 위해 최종면접인 교수님들 면접이 있었어요. 그 때 두 그룹으로 교수님들이 나뉘어서 면접을 갔는데 어떤 방에 갔더니 굉장히 노교수님께서 계시는데 질문은 하지 않으시고 과자만 드시고 계시면서 저를 쳐다보셨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 그 분이 대한민국 해방 이후에 남한의 과학을 세운 “이태규 교수님“이시고 그 분과 동경대학교에서 함께 배운 “리승기 교수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북한의 과학을 세우셨다고요.
이태규 교수님은 자제분도 미국에서 교수님으로 계신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태큐 교수님에 대해 얼마나 연구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실상이 이렇다보니 그 이전 조선시대 과학기술자에 대한 연구는 당연히 몇몇 잘 알려진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일뿐 나머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게 아닌가 해요.
“대한민국 과학사 연구“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사명처럼 느껴집니다. 역사연구에 대해 제가 아직 아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보니 접근하는 것도 잘 모르겠는데 이에 대해 좀더 공부를 하고 연구도 해보고 싶어요.
저에 대한 소개글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저는 독일에서 1년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회사는 당시에 University of Regensburg 안에 상주하고 있어서 저는 회사 생활과 함께 독일 대학생활(?)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횡재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아래는 제가 가장 좋아하던 University of Regensburg의 대학내 호수입니다. 점심 식사 후 이 곳에서 잠시 쉬면서 가족과 보낸 시간이 기억나네요. 아름답죠?
제가 있던 곳은 Munich이 속해있는 Bayern주의 도시 중 하나였어요. 과거에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요. 그 유명한 “푸른 도나우강”이 유유히 흐르는 강 옆에 제 집이 있어서 그곳의 여러곳을 다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아우토반 여행 (Autobahn Travel)”이었어요. 아우토반은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속도가 무제한인 고속도로에요. 아돌프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에서 전차가 빠른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우토반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아우토반은 정말 예술입니다. 넓은 도로는 4차선 이상인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우토반은 편도 2차선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도 사고 하나 본 적이 없어요.
무제한 속도에 대해 감이 잘 안오실 수 있는데 어느 정도냐면 차가 분명히 없어서 1차선에 들어가잖아요? 그럼 어느새 제 뒤에 차가 나타나서 헤트라이트를 마구 깜빡거리고 있습니다. 천천히 갈려면 비켜라 이거죠.
아우토반의 1차선을 달리려면 보통 시속 200km 이상은 기본이고요 독일사람들은 240km 정도까지 속도를 내더라고요. 그래서 독일사람들은 당시에 오토매틱 차보다는 기어변속장치가 있는 차를 선호해서 오토매틱 차는 5% 시장 점유율도 안되었습니다. 저는 BMW320i 10년된 중고차를 타고 다녔는데요. 이 차가 참 신기한게 소리가 굉장히 크고 무거워서 일반도로를 다닐 때는 좀 과한 느낌이 드는데 아우토반에서 속도를 무제한으로 올리고 나면 아주 조용해지고 그 승차감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요.
독일은 9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네델란드, 벨기에, 폴란드, 덴마크
그러다 보니까 여행하기가 너무 좋은 나라에요. 물론 많은 분들이 유럽여행을 많이 해 보신 건 알아요. 하지만 살면서 여행을 하는 것과 단기로 여행을 하는 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매주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매주 여행을 다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독일대학교는 학비가 무료에요. 외국인에게도 무료입니다. (Baden Wuttenberg주만 제외하고요).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도 독일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의료보험도 국민의료보험이라서 보험료가 엄청 쌉니다. 매월 학생은 60유로 정도 내면 됐던 걸로 기억해요. 과거에는 독일어를 반드시 해야 독일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서 독일 유학이 힘들었지만 제가 있던 2000년대 초부터는 그마저 바뀌어서 강의는 모두 영어로 진행을 해서 독일어 필수는 없어졌어요. 독일이 한가지 단점은 물값이 엄청 비싸요. 빨래 잘못하면 한달에 500유로 이상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세탁기는 꼭 독일제를 쓰시길 권합니다. 전기료도 좀 많이 나오지만 물값보다는 괜찮은 편입니다.
저의 회사 직원이 당시 회사 파견으로 독일 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에 있었고 결국 박사학위도 받았는데 저는 그 친구가 참 부러웠어요.
제가 마침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바로 독일에 가게 되었는데요. 독일인들이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겼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하하.
2003년에 독일을 떠나서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데요 떠나온 이후로 한번도 독일에 다시 가보지는 못했어요. 다시 한번 가서 1년이나 2년정도 독일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지내보고 싶습니다.
가끔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어요. 제 나름대로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하기는 하는데 정말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달이 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요즘에는 한국에도 과학전문기자나 의학전문기자들이 많이 있고 그 협회도 생겼던데요 그래도 그 분들의 일이 정말 많은 비과학자 (일반인) 들에게 잘 전달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은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해는 없는지.
이런 생각들이 좀 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과학적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좀 해 봤어요.
소설은 좀 너무 길어서 다 읽지 않으면 좀 어려울 것 같고요 시의 경우도 있기는 한데 너무 함축된 언어를 쓰거나 과학적 언어가 들어가면 오히려 난해할 수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예술 – 미술이나 음악 – 로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깜찍한 생각을 해 봤어요.
Science Illustrator나 Medical Illustrator라는 직업이 있더라구요. 이건 좀 Digital Art이긴 한데요 일단 과학적, 의학적인 지식이 밑받침이 되어야 해요. 저같은 전공자에게 좋은 일이 될 것 같더라구요. 특히 요즘에는 논문도 Digital Art, Animation이 많이 들어가야 하거든요. 또 바이오텍의 기술을 전달할 때에나 뉴스, 미디어에 기사를 낼 때에도 Science Illustration나 Medical Illustrator의 노력이 많이 들어가게 되고 점점 이 직종이 중요해 지지 않을까 해요.
더구나 AI가 미래에 Art를 대신 해 줄 수 있다고도 하던데 결국 AI가 잘되려면 질좋은 정보가 엄청 많이 필요하거든요 이런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할 수 있어서 그런 장점도 있고 자신만의 전시회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 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름 공부를 하고 있어요. 이거야말로 저의 예술적 호기심과 과학적 호기심의 교집합이 만드는 이상적인 2막 인생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좀 꿈이 많죠.
미국질병관리국 (CDC – Center for Disease Control)에서 만든 mRNA vaccine에 대한 Science Illustration을 링크합니다.
한국에서는 골프가 굉장히 비싼 운동이지만 미국에서는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골프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오히려 실내에서 해야하는 테니스가 더 비싸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잘 아시다시피 제가 시간 드는 운동을 싫어하는데요 이 골프는 시간이 들지만 하고 있어요. 사실 시작한 건 몇년 안되고요 아내의 성화때문에 시작하게 되었어요. 나중에 부부가 함께할 취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길래 뭐 그것도 그럴듯하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시작을 해서 이제는 매주 주말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후에 한번씩 함께 합니다.
최근에는 예일대학교에서 부터 오랫동안 알던 부부가 있어서 함께 나가는데 마음도 맞고 좋은 것 같아요. 제 친구들은 원래 저보다 훨씬 오래전에 골프를 시작했는데요 저는 기회는 많아도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것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해보니까 이것도 좋은 걷기 운동인 것 같아요.
저는 골프를 푸시 카트 (Push Cart)를 미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골프를 치려면 차를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저는 보통 골프 손수레 (카트)를 밀고 다니거든요. 이게 18-홀을 돌려면요 꽤 걸어요. 이게 유산소운동에 딱 적합하더라 이 말이죠. 일단 공을 치고 그 공이 간 곳으로 카트를 계속 끌고 다니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골프를 푸시카트를 밀고 다니는 운동이라고 하는거에요. 아래에서처럼요. 노동처럼 보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