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역사 (4) – 이휘소 박사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한국인들이라면 이휘소 박사님에 대해서 존함은 들어봤겠지만 이 분에 대해서는 거의 제대로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노벨상 얘기는 많이 들어도 어떤 사람이 어떤 업적으로 받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요. 미국에서는 그 해에 노벨상이 수상되면 자세히 그 업적에 대해 꽤 오랜동안 여러 언론을 통해 나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영어 이름은 Benjamin Whisoh Lee입니다.

이휘소 박사님에 대해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연구에 동조하다가 피살된 것으로 다들 짐작하지만 강주상 교수님의 “이휘소평전”에서는 이휘소 박사님이 군사정권에 매우 반대하셔서 어떤 협조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나옵니다.

저는 이 분의 업적에 대해 제가 조사한 대로 나누려고 합니다.

이휘소 박사님은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셔서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재직중 도미하셔서 마이애미 대학교 학사, 피츠버그 대학교 석사 및 펜실베니아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전공은 입자물리학이고 Higgs boson, Higgs mechanism이 이휘소 박사님으로 부터 기인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연구내용은 Guage Theory와 Charm Quark에 대한 연구입니다.

Guage Theory는 1964년 “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하셔서 “Higgs Mechanism”으로 이어지도록 기여를 하셨습니다. 참고로 Higgs Mechanism은 2013년 Peter Higgs와 François Englert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업적입니다. 또한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Gerardus ‘t Hooft의 연구방향이 바뀌도록 조언했다고 하고 200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Hugh David Politzer는 수상소감에서 당시 입자물리학자 커뮤니티는 Benjamin Lee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언급을 했을 정도입니다.

Charm Quark는 1975년 이 입자의 질량을 계산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1977년에는 Cosmology에 대한 무거운 Neutrino 질량에 대한 lower bound에 대한 논문을 내셨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분의 연구는 핵무기를 만드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일리노이주 고속도로에서 대형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신 것은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 때가 1977년 6월 16일이었습니다. 이휘소 박사님의 마지막 유고 논문은 1977년 3월말에 제출되어 9월에 출간되었습니다.

1960년대-70년대는 대한민국은 아직 무슨 연구를 할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외국 유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죠. 이휘소 박사님께서 오랜동안 살아계셨더라면 더 많은 과학적 공헌을 하셨을텐데 참 아쉽네요. 아래는 이휘소 박사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역사 (3) – 이태규 박사와 리승기 박사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화학을 전공한 이유로 일단 화학자들에 대해 먼저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위에 보이는 빛바랜 사진은 이태규 교수님께서 KAIST 화학과 석좌교수로 88세 생신 기념으로 출간한 이태규 박사전기 (1990년)에 있는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우장춘 박사님, 이태규 교수님, 리승기 교수님이십니다).

일제시대에 조선인에게 과학, 공학을 가르치는 것은 극히 규제를 하고 있어서 당시 제대로 대학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대학에서는 주로 사범대학이 있었을 뿐 4년제 대학으로 정식 대학교육은 아직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세분은 일본 교토에서 함께 계셨는데요. 당시에 이태규 교수님은 교토제국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시고 나중에 프린스턴 대학교에 양자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다시 도미하셨습니다. 해방후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로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태규 교수님은 초대 문리대 학장으로 부임하셔서 젊은 교수님들을 유치하셨는데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 문제로 큰 파동을 겪게 되고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사직하거나 월북을 하게 됩니다. 이태규 교수님께서 이 때 크게 좌절하시고 미국 유타대학교로 오셔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KAIST (당시는 한국과학원 KAIS) 설립을 위해 귀국하셔서 KAIST 화학과를 만드셨습니다. 이태규 교수님은 Eyring-Lee Theory라는 새로운 양자물리화학 이론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리승기 교수님은 교토제국대학교 공업화학과에서 고분자화학을 전공하시고 그동안 비날론 (Vinalon – Vinylon이라고도 함)이라는 새로운 수용성 고분자를 개발하셔서 이 공로로 교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리승기 교수님도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으로 부임하셨으나 이태규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설치안 문제로 파동을 겪으셨고 한국전쟁 때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김일성의 친서에 설득당해서 북한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1950년대 남한에는 변변한 화학공업시설이 없었던 반면에 북한에는 함경남도 흥남에 일본자본에 의해 설립된 화학공장이 있어서 여기에서 합성섬유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날론 공장이 아직도 북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어 생산된다고 합니다.

남북 분단이라는 민족비극에 의해 비록 이태규 교수님은 남한으로 리승기 교수님은 북한으로 가시게 되었지만 두 분 모두 해방 초기 유년기에 있던 남북한의 화학 인재를 양성하고 산업화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신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분과 함께 우장춘 교수님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신 관계로 일본어를 사용하시고 일본식 습관을 사용하는 것이 초기에 많은 오해를 불러온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대학교 설치안 파동을 겪을 때 이태규 교수님과 리승기 교수님 모두그런 문제로 동료 교수들 (사실 젊은 교수들) 로 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과학기술역사 (2) – 이삼평과 심당길의 일본도자기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고려청자, 이조백자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도자기 기술은 예로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요 기록이 없다보니 할 수 없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가게 된 두 도자기 장인에 대해 소개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위에 사진인 2014년에 일본에 포로로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꽃을 피우신 이삼평 선생님심당길 선생님의 전시회가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는 포스터를 옮겨온 것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번의 전쟁을 통해 일본에서는 조선의 도공을 많이 납치해서 일본으로 잡아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분들의 삶이 굉장히 고되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시겠지만 실제로 이 분들을 데려간 일본에서의 대접은 달랐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로 인해 양인에 머물렀지만 일본에서는 장인으로 모셔서 일반인에게 없는 성을 부여하고 또한 지금은 사당까지 만들어서 지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삼평 선생님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의 조선도공(陶工) 납치계획에 따라 사가(佐賀) 나베시마번(鍋島藩)에 의하여 1594년 또는 1596년경에 일본에 끌려가, 처음에는 가라쓰(唐津) 근방에 상륙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쿠고가라쓰(多久古唐津)는 바로 이삼평 선생님에 의해서 시작된 가라쓰도자기입니다. 그 뒤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아스미산(泉山)에서 백자광(白磁礦)을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삼평 선생님은 일가족 18명과 함께 이곳에 이사하여 도향(陶鄕)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고, 이후 30여년 안에 이곳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을 이루었습니다. 이때까지 아리타는 두메산골로 1590년대의 지도에는 지명이 전혀 나와 있지 않던 곳이었으나 1680년대의 지도에는 아리타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삼평과 함께 납치되었던 도공은 155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리타명산(有田皿山)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이곳은 대도향(大陶鄕)으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에도(江戶) 후기로 오면 이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일본 여러 지방의 자기 중 단연 제일로 손꼽히게 발전하였고 이마리항(港)을 통하여 널리 수출되었습니다.

아리타도자기의 특징은 아리타 내산제요(內山諸窯)와 외산제요(外山諸窯)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산의 제요는 이삼평 선생님이 발견한 백자광 아스미산의 도석(陶石)과 시라카와산(白川山)의 유석(釉石)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삼평선생님의 지휘 아래 번청(藩廳)이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주문에 의한 상등품의 제작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주로 개물류(蓋物類), 도발극상(兜鉢極上)의 침향호류(沈香壺類), 회석상(會席床)의 식기류, 세공(細工)의 향로류(香爐類) 등이 제작되었습니다.

초기 이마리는 단순한 조선식 백자이며, 고(古)이마리는 아리타 백자로 바뀐 일본 최초의 백자였습니다. 또, 아리타 외산제요는 지주나 상인들의 일상 식기류를 주로 구웠고, 제품의 대부분은 청자·청화백자·백자 등으로 서민적입니다. 또한 대발류(大鉢類)로부터 유합(油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을 가진 것으로 초문(草文) 등을 그린 자유분방한 작품이 많습니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아리타·이마리 도자기는 기계화의 근대화된 기법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현재 크고작은 백수십 개의 가마가 설치되어 최대의 도향으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도조(陶祖) 이삼평 선생님의 기념비는 아리타마을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의 뒷산에 위치하여 아리타도업(有田陶業)의 장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심당길 님의 후손은 지금도 “심수관 (沈壽官)“이라는 이름으로 15대째 일본의 도기 장인 집안을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심당길선생님은 정유재란 때 시마즈요시히로(島津義弘)에 의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가셨고 일본 사스마도기(薩摩燒)를 개창하셨습니다.

1598년 12월, 시마즈요시히로에 의해 남원 등지에서 심당길과 박평의를 비롯하여 40여인이 피랍되어 가고시마현 구시기노시마하라(串木野島平)에 상륙하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심당길(沈當吉)은 청송 심씨로 남원근교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족은 1603년 구시기노(串木野)로부터 현재의 히오키군 히가시 이치키죠 미야마(日置郡 東市 來町 美山) 나에시로가(苗代川)에 이주하여 나에시로가와(苗代川燒)를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 심당길은 박평의와 함께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白土)를 발굴하여 오늘날의 사쓰마도기를 개창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흙은 조선의 흙과 달라서 이 백토를 발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쓰마번주는 이들을 사무라이급(士班)으로 예우를 하였으며, 이들이 구워낸 도자기에 사쓰마의 번명(藩名)을 붙여 “사쓰마도기(薩摩燒)”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후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가면서, 조선도자기의 흐름과 기예를 계승·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873년 제12대 심수관은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쌍을 출품하여 서구세계에 사쓰마도기의 수출이 시작되어 ‘사쓰마웨어’라는 이름은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가 될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제14대 심수관은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遠太郞)가 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1988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조선 도공과 포로를 귀국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조선에 돌아가면 여러 어려움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급의 대접을 받고 있어서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도자기 기술은 무기화학재료를 이용한 중요한 기술이며 이 도자기에서 사용한 화로는 나중에 제철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의 도공들도 기록이 있으면 좋겠지만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Bucket List (8) – Photo-microscopy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다보면 현미경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현미경으로 보는 미세한 세계가 참 예술이거든요. 저의 경우는 Crystallography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미세 결정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미세한 현미경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작업하는 것을 Photo-Microscopy라고 해요.

Nikon에서는 매년 Small World Contest를 하는데요 올해의 수상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 아름답죠? 저만 아름다운가요?

저는 이런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Photo-Microscopy를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예를 들면 김한겸 현미경 사진작가님이 YTN 사이언드에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참 하고 싶은게 많죠? 저는 태생이 쉬지 못하는 성격이 아닌가 싶어요.

당뇨운동사례 – 걷기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당뇨인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의사선생님들이 권하는 운동이 “걷는 것”인데요 어찌하다보니 비교적 늦게 말씀을 드리게 되었네요.

아래 이상우님의 사례를 통해서 걷기로 당뇨를 극복한 이야기를 보여드립니다. 걷기를 할 때는 좀 빠른 경보하듯이 하셔야지 너무 느리게 하시면 아마 운동효과가 그리 높지는 않은 것 같아요.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 걷기 전에 준비운동을 맨손체조로 하시고요.
  • 동반자로 강아지와 함께 걸으셨네요.
  • 매운 음식의 초장에 설탕이 많이 들어있는 것은 팁이에요. 가능하면 초장같은 것은 드시지 않는게 좋아요. 저도 비빔밥을 먹을 때 초장은 섞지 않습니다.
  • 결심이 중요하다고 하셨죠 – 매일 거르지 않고 음식도 조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요.

걷는 것은 가장 하기 쉬워 보이지만 매일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기도 합니다. 저는 주위에서 걷기를 매일 하시는 분은 잘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니까 추우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매일 걸으실 수 있는 분께는 걷기를 추천합니다.

혹시 매일 걷기가 어려우시거나 밖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시는 경우에는 Treadmill을 사서 집에서 걸으시는 것도 저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당뇨인 여러분께 걷기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저는 계단오르내리기를 매일 하고 있어서 특별히 걷지는 않습니다.

나의 운동 일지 (9) – 계단 오르내리기

노잼투자 (5) – FXAIX & FNILX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그동안은 너무 Vanguard 제품 위주로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 Fidelity 제품도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보통 ETF는 세글자입니다. SPY, VOO 이런 식으로요.

Mutual fund는 5글자입니다. 오늘 소개할 FXAIX와 FNILX 같은게 뮤추얼펀드죠.

ETF와 Mutual Fund의 차이는 ETF는 정수로 주를 살 수 있는데 뮤추얼펀드는 분할구매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VOO를 사시고 남는 잔액으로 FXAIX나 FNILX를 사실 수 있는거죠.

FXAIX와 FNILX는 둘다 Fidelity의 S&P500 추종 Mutual fund에요. FXAIX의 expense ratio는 0.01%이고 FNILX의 expense ratio는 0.00%입니다. 그러니까 없다는 얘기죠.

둘다 S&P500 추종 뮤추얼펀드이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어요.

당뇨운동사례 – 자전거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당뇨인 여러분이 당뇨를 극복하시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하시는게 중요합니다. 당뇨를 실제로 극복하신 분들은 모두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게 중요함을 강조하고 계세요.

아래의 글은 자전거타기를 통해서 당뇨를 극복하신 사례입니다. 저는 자전거 대신에 Rowing Machine을 하고 있지만 가끔 실내자전거를 타기도 합니다.

나의 운동일지 (7) – 로잉머신

한규식님은 마라톤도 하시고 자전거도 하시니까 초인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요. 어떤 극한의 운동을 한다는 측면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찾아서 게속 하시고 있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셨으면 해요. 이것 말고도 쉬운 것도 또 올릴 예정이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마라톤이나 자전거를 타는게 우리에게 꼭 안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Unretirement (9) – 크리스찬에게 은퇴는 없다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Youtube 중에 정말 들어볼 만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가끔은 보석같은 강의가 있습니다.

오늘은 강팔용 한국청지기 아카데미 대표이 “크리스찬에서 은퇴는 없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번 블로그는 크리스찬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라고 생각하시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 크리스찬은 영원히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초기 크리스찬들이 그 어려운 박해를 겪으면서도 배교보다는 순교를 택했죠. 우리는 순교를 하거나 배교를 강요당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그런데 그것이 잘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구요?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잊고 현재의 삶을 즐기는데로 빠져버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강팔용 대표님께서 하시는 강의를 잘 들어보시면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으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지 아실 수 있을 거에요.

저도 이 분의 강의와 John Piper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크리스찬에게 은퇴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모든 크리스찬들께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In God We Trust b/c God Is With Us!

Unretirement (8) – 거누파파 사례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Unretirement에 대해 블로그를 쓰는 중인데요 예전에 Youtube에서 “은퇴”라고 검색어를 치면 대부분의 얘기는 정말 우울해서 보지 않는게 더 좋았을걸 할 때가 정말 많았어요. 돈 문제, 상실감 뭐 이런게 주를 이뤘던 것 같고요 저는 은퇴를 당한 분들의 사례를 보면서 그런 사례가 혹시 퇴직을 해야 하는 분들께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좀 의아했어요.

그러던 중에 찾은 Youtube가 하나 있는데요. “거누파파네” 입니다.

여기서 거누는 건우라는 유기견의 이름이에요. 여기의 아버지가 거누파파이시고 주인공이세요. 이 분이 죽 지방에서 근무하시다가 퇴직을 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셔서 유기견을 임시보호하던 가족들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얘기를 막내딸이신 최세화님이 Youtube에 올리면서 화제가 된 사이트입니다. 거누파파님은 딸딸이 아빠이십니다. 아! 딸이 최고죠!!

거누파파님께서 경상도 걸걸한 어투로 말씀을 하시지만 마음은 참 따뜻한 분이라는 게 느껴지고요 이 분은 정말 그냥 쉬고 싶으셨데요. 지금 퇴직을 하시고 4년이 지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일을 계속하시는 중이신데 본인은 은퇴하고 논다고 말씀을 하세요.

여하튼 이 분의 영상 중에서 퇴직 4년차가 전하는 영상이 있어요. 그걸 좀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퇴직 1년차 영상이에요.

다음에 3년차 영상이고요.

마지막으로 최근에 찍으신 4년차 영상입니다. 다 보시기 싫으시면 4년차 영상만 보셔도 됩니다. 이 분이 1년차부터 4년차까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올리신게 있거든요.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일보에 이 가족들의 유기견 입양이야기가 나온게 있습니다.

“이 시끼 안돼” 하던 아빠, 유기견 건우에 녹았습니다 [인터뷰] 유기견 임시보호 유튜버, ‘거누파파네’ 이야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339260&code=61171811&cp=nv

이 분이 Youtube도 계속 하시고 AIDE라고 자격증도 따시고 부업도 하세요. 중요한 건 이 분은 즐겁게 그리고 의미있게 인생을 사시고 계신다는 거에요.

Unretirement 목표를 이루려면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건강이 악화되어서 퇴직과 함께 아무 일도 못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혹시 건강으로 인해 퇴직을 하셔야 하는 분들은 거누파파네의 영상을 보시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커리어코칭 (10) – On-Site Interview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이제 드디어 On-Site Interview (최종 회사 방문 면접)까지 왔습니다. 여기까지 하면 이제 거의 다 온거죠.

바이오텍 연구직의 On-Site Interview는 보통 이런 순서로 진행됩니다.

  • Research Presentation 45분 발표 15분 Q&A
  • 30분씩 One-on-One interview with key people
  • Lunch interview with peers

각각에 대해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앞에 있는 Research Presenta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프리젠테이션을 잘하고 질문에 잘 답변을 하셨으면 70% 이상은 이미 밥이 다 되신 상태에요.

Research Presentation 준비할 때 Hiring Manager와의 지난번 Phone Interview에서 물어보라고 했죠?

커리어코칭 (9) – Phone Interview

그 때 Hiring Manager가 얘기해 준 Tip을 중심으로 Research Presentation을 준비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가지 테마로 준비를 하는데요. 처음 것과 두번째 것은 다른 Research에 대한 것이에요. 예를 들면 첫번째 것은 박사과정 중 한 어떤 연구 둘째 것은 최근에 한 중요한 연구 이런 순인거죠.

보통 발표를 하기 전에 얘기를 하시면 좋지만 요즘에는 발표 중간에 보통 질문이 많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당황하지 마시고 발표 중간에 질문이 오면 잘 대답하시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발표 연습은 당연히 많이 하셔야 하는데요 저는 이 부분이 중요한 커리어코치가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One-on-one Interview의 경우에는요 인터뷰 전에 스케줄을 보내주잖아요? 먼저 일단 Linkedin에서 그 분들을 다 찾아서 친구신청을 하시는게 좋아요. 어차피 다 만날 예정이지만 먼저 찾아보는거죠. 그러면서 그 분들의 이력을 일단 연구를 하세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결국에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슨 질문을 그 사람에게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각 사람에 맞는 질문을 준비하시는게 좋아요.

만약 동료의 경우에는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된 동기, 일한지 얼마나 됐는지? 좋은점 나쁜점? 출퇴근은 어떤지 등등 실질적인 것을 물어보시면 좋고요.

만약 나보다 낮은 직급의 경우에는 혹시 매니지를 해야할 수도 있으니까 일하면서 어떤 점을 매니저에게 원하는지, 무슨 연구를 하는지 등을 물어보시면 돼요. 사실 낮은 직급은 좀 쉬운 면도 있어요.

어려운 사람이 높은 직급의 경우인데요 Hiring Manager는 이미 제 편이에요. 그러니까 Hiring Manager와 만나시면 오늘 어떤 사람과의 면접이 중요할지 슬쩍 질문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Hiring Manager에게 이것은 부탁을 하세요. 인터뷰 끝나고 Interviewers에게 Thank-Note를 보내고 싶은데 그 분들의 Email을 알려줄 수 있는지요? Thank-Note 중요하거든요.

Hiring Manger보다 높은 직급의 경우에는 좀 큰 그림에서 질문을 준비하는게 좋아요.

예를 들면, 이 팀의 향후 3-5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이 팀에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그 분에게도 이전 직장과 비교해서 (보통 경력이 많으니까) 지금 회사가 좋다고 생각하는점은?

이런 것을 물어보시면 좋아요.

Lunch interview의 경우에는 식사는 거의 포기하신다고 생각하시고 간단한 식사를 시키세요. 너무 많이 드셔야 하면 인터뷰를 망칠 수 있으니까 간단한 샐러드나 연어 같은걸 시키세요.

여기까지 하시고 잘 집에 오시면 됩니다. 인터뷰가 끝나면 됐는지 되지 않았는지 대강 감이 오실거에요.

어떤 경우에는 Lab Tour같은 것도 시켜줍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답글을 남겨주시면 연락을 드리고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보스턴에서 함께 일할 날을 기대합니다. Che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