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1/2025 (월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싱그러운 월요일 오후네요. 아침 일찍부터 아내와 함께 18-hole golf course를 돌고 오후에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회사에 Wellness vacation 라는 휴가가 있는데요 이 휴가가 매년 이틀이 있다는데 곧 이 휴가가 사라진다고 해서 지난주부터 부랴부랴 쓰는 중입니다. 그래서 마침 오늘 그 마지막 이틀째를 쓰는 중이에요. 당연히 일은 없지요.
마침 날씨도 오늘은 그리 덥지가 않고 선선합니다. 지금 화씨로 77도니까 섭씨로는 25도 정도 되죠. 여름 날씨 같지 않고 가을날씨같은 느낌마저 드는 오후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Porch에 앉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Porch에서 앉아 있으면 우리 마당과 이웃에서 넘어온 나무들이 울창하게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는데 입사귀들이 각자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구요 길게 늘여진 나뭇잎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마치 손을 펴고 손가락을 흔들듯이 오무렸다 늘였다를 반복하고요 소나무는 잔잔하게 마치 눈썹을 지그시 감은 듯한 노인처럼 잔잔하게 위아래로 살며시 움직입니다. 찌르래기 소리가 한참이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상공에 나타나서 지나가다 보니 모든 소리를 비행기 소리가 잠시 먹어 버렸네요. 저희 집 근처에 공항이 있는데요 이 공항에 개인 비행기들이 오고 가곤 합니다. 비행기 소리가 사라지니 다시 나뭇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마치 산내음 같은 싱긋한 향기에 맞추어 다양한 자연의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신선노름이 따로 없죠.
제가 요즈음 시와 소설, 수필 같은 문학에 꽂혀 있어서 Youtube 강연으로 듣고 있는데요 그러던 중에 경상북도에서 열린 문학모임에서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께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하신 영상이 있어서 어제 들었는데 구수하기도 했지만 이 분의 진심이 느껴지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오늘 글을 써야 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2년 전에 대구문학관에서 인문예술과학특강 ‘2023 문학, 꽃피다’라는 강연에서 김주영 소설가님께서 80대의 노구를 이끄시고 강연을 하신 것이 있어서 전체를 모두 들었습니다.
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 ⑪>- 길 위의 작가 김주영 – 경북기록문화연구원 8/25/2021
김주영 선생님은 경북 청송에서 어린시절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아주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밤늦도록 일을 하시고 쌀을 구해 오셔서 아들만 먹이고 자신은 굶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정식 결혼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탄생이 아주 불행한 그런 태어남인데, 그러면 서도 어머니는 나 하나를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하셨어 요. 일화가 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배가 고프죠. 그러니까 찬장이나 솥을 뒤져보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물 을 먹습니다. 그러면 한 30분 동안 배가 불러요. 나중에는 배가 고프죠. 해가 지고 나도 어머니가 나타나 질 않아요. 집 툇마루에서 해질 때까지 어머니를 기 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잠이 들어요. 잠이 들었다 깨 보면 부엌에서 삭정이 부러뜨리는 소리가 나요. 어머니가 어디 가서 한 됫박 되는 양식을 구해 와서 밥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밥을 퍼주죠, 먹으라고. 어머니는 안 먹어요. 가만 보면, ‘난 먹었다’ 하면서 남은 건 내일 아침에 나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하루 종일 굶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게 무척 가슴 아팠는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아, 어머니가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박목월, 김동리 선생님등이 세우신 서라벌 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에서 박목월 교수님께 11편의 자작시를 드리고 평가를 듣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박목월 교수님의 답변은 뜻밖에도 시는 어렵겠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군대를 다녀 오신 후 소설가로 진로를 수정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시인이 되고자 했죠.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시를 11편을 써가지고,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박목월 선생님한테 보냈어요. 하늘과 같은 박목월 선생님께, 제가 시 쓴 겁니다 하면서 한 번 봐주십시오 했더니 고맙게 받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드리고 난 다음에 열흘이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께 시를 보내 드렸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자네 운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시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눈앞이 하얘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알겠습니다 하고 얼굴이 정말 하얗게 되서 나가가지고 생각했죠. 아, 내가 멋모르고 덤벼들었구나하면서 하늘같은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그대로 수용을 한 겁니다. 이래서 내가 어쩐지 압니까? 학교를 그만둬버렸습니다. 군대에 입대를 했어요. 군에서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시인 될 자격이 없다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닭을 잡자, 그래서 수필을, 산문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지금 내가 소설가가 된 동기가 됩니다.
김주영 선생님의 소설은 하층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객주’라는 10권 분량의 장편소설이죠. 서울신문에서 5년간 연재된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위해서 현장조사를 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 현장을 답사해야 된다는 것, 선생님으로 인해서 많은 후배 작가들이나 제자들한테 어떻게 보면 지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 현장조사, 답사를 왜 철저히 하냐면 작품 속의 현장감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거 맞구나, 하는 생각을 어떤 그런 작품과 접촉성을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아요.
객주를 9권까지 연재하시고 갑자기 절필선언을 하셨습니다. 글이 더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죠. 그리고 20년이 지나서 마지막 10권째를 다시 서울신문에서 연재해서 마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의 장편소설을 위해 거의 30년이 걸린 것입니다. 너무나 그 끈기가 대단하지 않아요? 김주영 선생님은 국어사전을 항상 가지고 다니시고 카메라와 노트를 가지고 주로 노인들을 인터뷰하시는데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노트해 놓았다가 사전에서 찾아 보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주영 선생님의 소설은 어렵다고요. 모르는 단어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거죠. 우리말인데도 그렇게 모르는 단어가 많다고 하시네요.
『객주』 같은 경우에도. 어떻게 보면 30년 만에 10권째 완결편을 냈다는 것은 웬만한 뚝심 아니면 안되었을텐데, 9권을 쓰시고는 왜 그때 멈추셨어요?
그때가 아마 한국에 신문연재 사상 없었던 일인데, 9권 째 끝나는 지점에서 한국 최고 원고료를 받았습니다. 신문연재 할 동안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그런데 9권 째 분량을 쓰고 나니까 진이 확 빠지는 거예요. 더 못 쓰겠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신문 임영숙 문화부장한테 더 못 쓰겠습니다 이러니까, ‘그러지 말고 한 5개월 정도 시간을 줄테니까 계속 쓰라’ 하더라구 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끝마치는 게 좋겠다 라고 했는데 임부장이 뭐라고 했냐하면 ‘더 쓰고 싶을 때 반드시 얘기해라. 다른 신문에 가면 안 된다.’ 그렇게 얘기 하는 거예요. 알았다고 하고는 한 20년 흘렀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푸쉬킨에 대한 러시아 여인들이 3,4일 걸려서 꽃을 놓고 간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그것이 작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시베리아에 유배를 갔을 때 어떤 어려운 소녀에게 건네준 시가 러시아 여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위로가 된다는 것이죠.
푸시킨의 시를 예로 들 수 있죠.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마라’ 하는 시가 있지 않습니까? 그 시가 원래는 잡지나 신문에 발표됐던 시가 아니었습니다. 푸시킨은 그 당시에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집니다. 거기 유배지 농장에서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아주 누추하고 무식했던 그 소녀가 고생고생을 하면서 농장 일을 하는 거 예요. 그래서 그 아가씨한테 종이를 한 장 달라고 해서 그 시를 써 준 겁니다. 그게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하는 시입니다. 그 시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지 1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 러시아에 살고 있는 그 주부들이나 할머니들이 자기 집 텃밭에서 기른 꽃을 꺾어다가 푸시킨의 동상 앞에 바치고 가는 겁니다. 시골에서 모스크바에 올라오는 가정 주부들이 자기 집 텃밭에서 기른 생화를 기차를 타고 사흘, 나흘 걸려서 바치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시 한 편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뭡니까? 그게 바로 위로입니다.

김주영 선생님께서 가장 최근에 인터뷰하신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셨습니다. 이제 연세가 많으시죠.
노트 20권에 3㎜ 글씨로 까맣게 채운 ‘객주’ 초고… “세상 다 줘도 못 바꿔” [나의 현대사 보물] [45] 소설가 김주영 – 조선일보 6/25/2025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대도 이 노트 한 권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객주(客主)’라는 소설과 그걸 쓰는 일에 미쳐 있었지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경북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지난 21일 만난 김주영(85) 소설가가 ‘객주’ 육필 원고를 들어 보였다. 대학 노트에 3mm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새까맣게 들어차 있었다. 언뜻 까만 점이 촘촘히 찍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말 조선 팔도를 누빈 보부상의 생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대하소설 ‘객주’(1984년 출간 당시 총 9권)가 이런 대학 노트 20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주영은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4년 9개월간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객주’를 연재했다. 연재 시작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 개 넘는 시골 장터를 돌아다녔다. 연재 중에도 노트를 갖고 장터를 누비며 사람들을 만났다. “족히 500명 넘게 만났을 겁니다. 장터에 앉아 있다가 흥미로운 사람이 보이면 따라가서 막걸리를 사주었습니다. 한 주전자를 나눠 마시면 온갖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지요.” 장이 파한 밤이 오면 여인숙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글을 썼다. 대학 노트에 초고를 쓰고, 그 내용을 다시 원고지에 옮겼다. “엎드려서 원고지 70~80매를 그냥 써내려 갔어요. 미쳐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한 주간 쓴 글 묶음을 인근 신문지국에 가져다주면, 지국에서 원고를 본사로 부쳤다. 문학관 3층 전시실에는 이때 그의 생활을 형상화한 마네킹이 전시돼 있다.
이제 막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소설가 지망생이 언제쯤 김주영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글을 쓸 수 있게 될까요?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어렵게 자랐으면서도 항상 웃으시는 김주영 선생님의 끈기있는 인생을 보면서 제가 부러워한다는 점을 이곳에 남깁니다. 꼭 오랜동안 귀감이 되어 주시고 좋은 소설 계속 써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객주 10권을 꼭 읽어야 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