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내와 막내딸과 함께 보스턴에 있는 감자탕 집에서 감자탕과 보쌈을 맛있게 먹고 딸은 Heytee에서 자기가 먹고 싶은 티를 사고 우리 부부는 빵집에서 맛있는 빵을 사서 집으로 왔습니다. 원래는 Natick이라는 곳에 있는 일식 부페에 가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주말에는 먹기 힘들 것 같아서 유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내일 다시 가야할 것 같군요.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즐거운 기쁨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요즈음 김호연 작가님의 ‘불편한 편의점2’를 두번째 읽고 있는데 지난 번과 달리 정독을 하면서 만약 내가 이 책을 쓴다면 어떻게 썼을 것인가? 라는 창작자의 마음으로 읽고 있어서 시간은 더 오래 걸리지만 아주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어서 너무나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리나’를 영어원서로 주문을 해서 도착하면 이 책도 여러번 정독을 할 생각입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이미 영어원서를 한번 읽었는데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어 번역으로 가장 잘되었다고 평가되는 책을 사서 주문을 매겼습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참 흥분이 되는군요.
그리고 요즈음 돌싱글즈7이 시작을 해서 보고 있는데요 방송에 나오는 편집된 화면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방송까지 나와서 다시 시작하려는 10명의 돌싱 남녀들을 보면서 응원을 하게 됩니다. 이번 돌싱글즈 7기에도 좋은 짝이 나오길 바랍니다.
설겆이를 하면서 우연히 듣게된 Youtube 방송이 2011년 1월 30일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무언가를 가지면 정말 행복한가?’라는 다큐가 있는데 이걸 듣다가 금동건님의 사연을 접하게 되어서 오늘 금동건님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려고 합니다.
위의 다큐 중에서 10:00-19:15까지 부분이 금동건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금동건님 (64세) 은 환경미화원이신데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시를 쓰십니다. 금동건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도 언론을 통해서 알려져 있습니다. 4년전에 유퀴즈 온더블럭에도 나오셨더군요. 금동건님은 2006년에 시인으로 등단하시고 지금까지 20년간 환경미화원으로 사시면서 느끼시는 일상을 시로 써 오시는 시인이십니다.
“오늘도 사랑스러운 쓰레기들을 잘 모셨다.“
공부를 고등학교까지 밖에 하지 못해 끝나지 않은 공부의 연속이라 생각하신다고 합니다.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돌아보고 헝클어졌던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하고 공부의 연속입니다.”
호계천 근처에 있는 3평 남짓 크기의 컨테이너이다. 그가 일하는 회사와 가깝다. 일이 끝나면 이곳에 와서 시를 쓴다. 환경미화원이라는 직업에서 시인으로 돌아오는 작은 집이다. 여기서 하루를 돌아보고 글을 쓴다.
11살 소년 때 자갈치시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그는 2006년에 월간 ‘시사문단’으로 등단하고, 2007년에 첫 시집을 내면서 ‘자갈치의 아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후 ‘꽃비 내리던 날’ ‘詩를 품은 내 가슴’ ‘엄마의 젖무덤’ ‘비움’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아팠어요. 20대와 30대를 병마와 싸우면서 보냈답니다. 수염은 구안와사가 왔을 때 그 모습을 가리기 위해 길렀는데, 이젠 제 스타일이 됐어요. 병에 시달리면서 꿈도 희망도 다 잃고 이렇게 죽는 것 아닌가 절망했던 저를 살린 것이 시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해봤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지금 이 일을 하는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아내입니다. 쓰레기를 수거하면서 일기를 계속 썼는데 어느 순간 시가 되더라구요.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썼어요. 일기를 쓰듯이 시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점차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생각들이 시가 됐습니다. 시는 저를 살게 하고, 버티게 하고, 존재하게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님도 제가 시를 쓰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저의 등단과 두 번째 시집까지 보셨지요. 제게 남긴 유언이 ‘빚지지 마라’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마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필하지 마라’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비우는 환경미화원이다/ 그러므로 거리엔 아침 햇살 가득 채워주는 시인이다”
저도 요즘 한동안 제 나름대로 시에 대해 공부를 좀 해 보았는데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동건님은 일기를 쓰시다가 그것이 시로 변하셨다고 하는군요. 저도 이렇게 글을 열심히 쓰다 보면 혹시 시로 변할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도 한 분의 시인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배워 봅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선선했어요. 아이들이 집에 와서 좀 쉬고 있는 중에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Eastern Golf Course로 18-hole golf를 치러 갔습니다. 한분의 미국인이 함께 치게 됐는데 이제까지 함께 쳤던 사람 중에 가장 잘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하고 치다 보니 뭐 정신없이 친 것 같습니다. 18-홀을 3시간 30분만에 마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자기 게임을 하지 못한 저와 아내는 사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잘 치는 사람과 치는 것도 쉽지 않군요. 어릴 때부터 쳤던 사람이라고 하고요 50대로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장타였고 버디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버디를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더군요. 파 (Par)만 해도 좋다고 하던 제 모습을 생각하며 반성을 좀 했던 것 같습니다.
Bucket List를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왜냐하면 이미 59개나 되는 버킷리스트가 모두 다 넣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제부터 어떤 유튜브를 보다가 생각을 해보니 아직도 더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스턴에는 버클리음대 (Berklee College of Music)이 있는데요 김동률이나 싸이 등이 여기 출신들이고요 재즈뮤직을 배우는 곳인데 예전에 한인교회를 다닐 때에 청년 중에서 버클리음대를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 당시에는 사실 잘 몰랐는데 여기가 알고 보니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더군요. 한국에서는 실용음악이라고 하던가요?
어제 처음 본 영상인데요 Jason Lee라는 20년차 색소폰 주자가 졸업한지 10여년전만에 버클리음대에 가서 교수님들과 Jam을 하는 영상이 있었는데 너무 부러웠습니다.
이 버클리음대가 제 직장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엄청 가깝죠? 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세계적인 재즈 학교에서 공부하면 얼마나 좋겠는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입학은 직장인으로서 부담스럽지만 온라인으로 배우는 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론 공부부터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Music Theory나 Voice Technique 같은 것 그리고 Songwriting 같은 건 배워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몇일 전에 우연히 발견했고 깜-짝 놀란 분이 계셔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조완규 박사님이신데요 1928년생이시니까 올해 97세이십니다. 현재 국제백신연구소에서 지금도 출근해서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 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사실 유튜브 디시인사이드 ‘지식인 초대석’에서 였는데요. 2차례에 걸쳐서 인터뷰 영상이 있습니다.
2025년 여름, 국제백신연구소에서 만난 조 박사는 아흔이 넘은 고령에 나이를 잊은 듯 또박또박한 말투와 유머, 그리고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과학은 이성적인 희망의 언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그는 TV 화면 속 고통받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백신 연구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현재도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 직함으로 연구소에 출근하며 연구사업을 돕고 있는 조 박사는 백신 개발이 인류 공동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위생 수준은 높아졌지만, 아직도 개발도상국 아이들은 백신이 하나 없어 죽습니다. 이들도 백신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조 박사는 매일 아침 공원을 걷는다. 언덕길 70미터, 운동시설까지 포함해 하루 1만보가 기본이다. 고령에도 스마트폰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해 기자에게 보여준 액정 화면에는 아직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7000보를 훌쩍 넘긴 수치가 측정돼 있었다. “2003년부터 하루도 안 쉬고 운동을 했어요. 성북동 살 땐 삼청동까지 뛰고, 관악산 중턱을 오르내렸습니다.”
소식(小食)도 건강 유지의 비결 중 하나다. “빵 한 조각, 주스, 우유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삶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래 살려고 애쓰는 건 아닙니다. 다만 눈 감는 순간까지 건강하게, 사랑하는 가족에게 민폐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게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렇게 오랜동안 과학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사시는 한국인이 계시다는게 저에게 참 본이 되네요. 저도 이 분처럼 활동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뉴잉글랜드도 8월에 접어들었네요. 어제 업스테이트 뉴욕에 다녀왔는데요 비가 많이 왔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씨가 제법 선선했습니다. 어제 대학에 다니는 막내딸을 학교에서 부터 보스턴까지 6시간 가까이 운전을 함께 하고 왔는데 집에 오는 길에 딸 아이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해서 들려 달라고 했더니 의외로 K-Pop을 트는거에요. 깜짝 놀랐습니다. 본래 보스턴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만 해도 Pop Song은 들었지만 K-Pop은 듣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대학에 가서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한인 2세들과 어울리다 보니 요즘은 한국 문화에 좀더 많이 다가가는 것 같아서 아빠로서 안심도 되고 여러모로 기분이 좋습니다.
여러명의 MZ 세대 가수들 노래를 들었는데요 저도 많이 아는 노래여서 신기하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 딸과 제가 감성적으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함께 들었던 노래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데이식스의 예뻤어, 이무진의 청춘만화, 한로로의 노래 등이었습니다.
비가 점점 많이 와서 사실 운전은 쉽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함께 노래를 듣고 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무사히 도착을 했어요. 그리고 하루가 지났는데도 마음에 K-Pop에 대한 잔상이 남았는지 하루 종일 음악을 찾아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나는 어떤 노래를 좋아하지? 라고요. 그래서 생각을 하는 중에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지드래곤의 ‘삐딱하게”에 대해 얘기를 좀 하고 싶어졌습니다. 삐딱하게는 지드래곤의 솔로2집 쿠데타 (2013) 의 더블 타이틀 곡 중 하나인데 이 노래는 제가 들을 때마다 가사와 음율이 제가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삐딱하게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내버려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버럭버럭 소리쳐 나는 현기증 내 심심풀이 화 풀이 상대는 다른 연인들 괜히 시비 걸어 동네 양아치처럼 가끔 난 삐딱하게 다리를 일부러 절어 이 세상이란 영화 속 주인공은 너와나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외로운 저 섬 하나 텅텅 빈 길거리를 가득 채운 기러기들 내 맘과 달리 날씨는 참 더럽게도 좋아
너 하나 믿고 마냥 행복했었던 내가 우습게 남겨졌어 새끼손가락 걸고 맹세했었던 네가 결국엔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내버려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짙은 아이라인 긋고 스프레이 한 통 다 쓰고 가죽바지, 가죽자켓 걸치고 인상 쓰고 아픔을 숨긴 채 앞으로 더 비뚤어질래 네가 미안해지게 하늘에다 침을 칵 투박해진 내 말투와 거칠어진 눈빛이 무서워 너 실은 나 있지 두려워져 돌아가고픈데 갈 데 없고 사랑하고픈데 상대 없고 뭘 어쩌라고 돌이 킬 수 없더라고
너 하나 믿고 마냥 행복했었던 내가 우습게 남겨졌어 새끼손가락 걸고 맹세했었던 네가 결국엔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내버려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오늘밤은 나를 위해 아무 말 말아줄래요 혼자인 게 나 이렇게 힘들 줄 몰랐는데 (그대가 보고 싶어) 오늘밤만 나를 위해 친구가 되어줄래요 이 좋은 날 아름다운 날 네가 그리운 날 오늘밤은 삐딱하게
저도 살면서 삐딱하게 막 화날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너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뻥 뚤리고 기분이 상쾌해 집니다. 제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그럴까요? 삐딱하게는 지드래곤이 작사와 작곡을 한 노래입니다. 자신의 노래인거죠. 본래 싱글2집을 낼 때 타이틀을 쿠데타라고 한 이유가 자신의 음악이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구요. 항상 발전하려고 애쓰는 지드래곤의 노력에 항상 박수를 보내고 계속해서 오래 오래 좋은 노래를 남겨 주기를 바라고 나이가 아주 많이 들을 때까지도 우리 곁에서 계속 좋은 가수로 성장하면서 사랑받는 가수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한편 최근에 지드래곤이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 노래 ‘삐딱하게’를 쓰게 된 계기가 강산에님의 ‘삐딱하게’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이라고 했다는데요. 그 영상은 아래에 있습니다.
너무 착하게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네 너무 훌륭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네 TV를 봐도 라디오를 틀어봐도 삐따기의 모습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네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는 삐따기 조금 삐딱하면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네 조금 삐딱하면 손가락질 하기 바쁘네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바르다고 하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 가는데 삐딱 (하게) 삐딱 (하게) 삐딱 삐딱 (하게) 삐딱 삐딱 (하게) 삐딱 (하게) 삐딱 (하게) 그가 서 있는 땅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네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 기울여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 기울여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 기울여 깨어나서 일어나서 눈을 뜨고 귀 기울여 나나나나 예예 조금 삐딱하면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네 조금 삐딱하면 손가락질 하기 바쁘네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바르다고 하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 가는데 삐딱 (하게) 삐딱 (하게) 삐딱 삐딱 (하게) 삐딱 삐딱 (하게) 삐딱 (하게) 삐딱 (하게) 그가 서 있는 땅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네 그가 서 있는 땅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네 그가 서 있는 땅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네 삐딱 하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아내와 저는 그동안 Boston Symphony Orchestra에서 하는 조성진,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공연에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이번에는 Tanglewood에서 하는 Lang Lang의 피아노 공연을 보러 가기로 예약을 해서 이곳에 처음으로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편도로 2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꽤 장거리 여행이었습니다. 오후 2시에 하는 오케스트라를 보기 위해 오전 10시 조금 넘어서 출발을 했는데요 가는 길도 길었지만 비도 조금이나마 내리더군요. 다행히 주차가 힘들지는 않아서 1시 조금 넘어서 점심 식사를 하고 공연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공연은 Boston Symphony Orchestra가 연주하는 큰 공연이었는데요 은퇴한 분들이 매우 많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공연은 중국인 Lang Lang의 피아노 협주가 있었는데요 Saint-Saëns Piano Concerto No. 2을 23분간 연주했습니다. 저는 이 연주를 처음 들었지만 너무나 좋았고요. 역시 Lang Lang은 듣던대로 Performance의 천재적인 기질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섬세한 피아노 연주를 선보여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앵콜곡까지 아주 잘 들었습니다.
Intermission이 끝나고 BSO에서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생활의 추억’을 들었는데요 4분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세우고 Flute과 Clarinet soloists 들이 너무나 연주를 딱 맞게 해 주셔서 연주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마치 새들이 재잘대듯이 연주를 해 주셨습니다.
아내와 함께 이렇게 좋은 연주를 듣게 된 것이 참 좋았고요. 역시 교향곡은 현장에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Tanglewood가 오고 가는데 5시간이나 드는 장거리이다 보니 자주 가기는 어렵겠다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다만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입니다.
Tanglewood는 1934년부터 시작한 연주의 오랜 내공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다가 세이지 오자와가 상임지휘자로 있을 때 Sony에서 투자를 했다고 합니다. 세이지 오자와는 무려 30년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최장수 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그 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영향은 지금도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은 세상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과 뿌듯함 그리고 성취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서 누군가가 어떤 새로움을 만일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제가 독서를 통해서 얻게된 그 무언가가 묻어나기 때문이 아닐지 모를 일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어느 기간동안 글을 쓰고 나서 다시 돌아 와서 그 글을 다시 읽게될 때에 무언가 뿌듯함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빈곤함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고요. 그렇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저는 항상 제자신의 정신적 빈한함을 항상 느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최근에 저는 다시 책을 들고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죠.
이번 주에는 세권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요 그 책들을 읽고 남은 저의 감정과 생각들을 블로그에 남기는 편이 훗날의 제자신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얼마전에 Youtube 강연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이민애 교수님이셨던 것 같아요.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소설을 읽을 때에는 작가의 삶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리고 이번주에 읽은 세권의 소설과 함께 알게된 세분의 소설가님들의 삶에 대한 저의 공부 결과를 이 곳에 함께 풀어볼까 합니다.
먼저 신경숙님의 ‘엄마를 부탁해’입니다. 엄마를 부탁해는 제가 몇년전에 읽었던 책이고 이번에 두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신경숙님은 전북 정읍에서 1962년에 태어나셔서 1979년부터 구로공단 근처의 전기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야학을 통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셨는데요 그 때 선생님이셨던 최홍이 선생님의 조언을 받고 1984년에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5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시면서 등단을 하신 분이십니다. 신경숙님께서 어머니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던 건 오래 전이셨는데 글이 잘 나가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다가 2007년에 ‘리진’이라는 소설을 쓰시면서 공부를 많이 하시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비로소 쓰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생일을 위해 서울에 사는 아들들과 딸들을 방문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오시다가 서울역 지하철에서 어머니를 아버지가 놓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아들대로 딸들은 딸들대로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고 회상하면서 엄마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그런 이야기에요. 특히 엄마가 잠시 마치 영혼과 같이 등장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그 부분에서 엄마의 남모를 사랑에 대한 얘기, 엄마의 자녀들에 대한 마음들도 그려집니다. 이 책을 제가 읽으려고 생각했던 이유는 곧 8월이 되면 저의 어머니의 추모일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 추모일을 준비하면서 다시금 저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다시 들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많이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어머니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아버지 즉 남편이죠. 항상 아내보다 멀찍이 앞장서서 걸으며 발걸음을 맞추지 않으며 평생을 살아왔고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며 살았던 남편입니다. 나중에 반성을 하지만 소용이 없죠. 저도 이 남편의 입장에서 제 아내를 다시 돌아봤다고 할까요? 그런 마음이 들어서 이 책을 읽고 아내에게 좀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 같습니다.
두번째 책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글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생 가능하면 당파나 정쟁에 휩싸이지 않으며 멀찍이 비교적 낮은 관직으로 인생을 살았던 분이더군요. 이 분이 1780년 44세 때 5월부터 10월까지 청나라 연경에서 북경까지 돌아보며 느낀 점을 쓴 책이 바로 이 열하일기입니다. 연암의 해학과 신문물에 대한 수용성을 엿볼 수 있어서 좋은 그런 책입니다. 저는 고미숙님이 쓰신 책을 읽었는데요 중간 중간 자세한 소개가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본래는 연경에서 황제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요 황제가 연경에서 북경으로 오라는 연통을 주면서 여행이 꽤 긴 여정이 됩니다. 북경쪽으로 오게 되면서 티베트와 몽고에 대한 청나라 황제의 경계심이랄까 경외심 같은 걸 연암은 느꼈다고 하고요. 아마 그 당시 티베트는 매우 강성했던 것 같아요. 황제가 라마불교 승려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죠. 그러면서 이 승려에게 꼭 인사를 하라고 명을 내리는데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전통이어서 이게 어려운 거에요. 거기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진족과 한족 사이의 갈등 구조에 대해서도 연암은 서술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참 이상한 얘기를 해요. 소경이 눈을 떴는데 길을 못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다시 눈을 감으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에는 유럽과 이슬람에서 들어오는 다양한 문물이 있었는데요 이런 걸 받아들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위정자들이 청나라를 무시하는 풍조였기 때문에 그리고 오랑캐를 업신여기는 행태 등으로 인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으로 보았던 문제를 애둘러서 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났습니다. 실학자로서 느끼는 어려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책은 김호연님의 ‘불편한 편의점2’를 읽었어요. 이 책은 어느날 제 아내가 어떤 분으로 부터 받아서 집에 가져와서 제가 읽게된 책인데요 숙대앞 청파동 Always 편의점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불편한 편의점1을 못 읽은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요. 김호연님은 이 책을 쓰기까지 4권의 소설을 쓰셨는데 매우 호응이 적어서 한때 소설을 쓰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전혀 편의점을 할 수 없는 선배가 하는 편의점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불편함을 느끼면서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되셨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 4만부 정도만 팔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백만부가 팔리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불편한 편의점2에 나오는 상황은 코로나 시국입니다. 그래서 사실 더 우울할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죠. 정육식당 주인, 고등학생, 연극배우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운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도우면서 인생의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하는 힘을 주고 나아가게 하죠. 김호연님께서 어떤 분을 통해 ‘비교는 암이고 걱정은 독이다’라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다고 해요. 여기에도 이 얘기가 나옵니다. 비교는 암이니까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 걱정은 독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때 그 때 즐겁게 살아라.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이 곳에 나오는 수많은 군상들은 모두 매우 어려워요. 하지만 그 어려움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죠. 코로나 시국에 얼마나 어두웠습니까? 그 어두웠던 코로나 팬데믹 당시의 일들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도 당시 백신개발을 하면서 너무나 힘들었는데 백신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루머들에 대해서도 나왔고 한국정부의 다양한 시책이 자영업자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들이어서 이에서 겪는 어려움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어떤 정육식당 가족의 이야기는 참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김호연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요 여기에 나오는 염사장님처럼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어머니를 기억하며 이런 소설을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세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능하면 정독을 하려고 노력을 했고요. 소설가님들께서 새로운 단어를 알려주실 때 기쁜 마음으로 온라인 사전을 뒤지고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요 그래도 ‘한국어가 모국어인데도 모르는 단어가 이렇게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책들을 다시 책꽂이에 꽂아 놓아야 겠네요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내 가족의 소중함을 항상 되새기고 ‘열하일기’를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불편한 편의점2’를 통해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서로 조금씩 도울만한 여유를 갖는다면 희망을 가지고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책 익는 세상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세분의 작가님들과 캐릭터를 통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싱그러운 월요일 오후네요. 아침 일찍부터 아내와 함께 18-hole golf course를 돌고 오후에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회사에 Wellness vacation 라는 휴가가 있는데요 이 휴가가 매년 이틀이 있다는데 곧 이 휴가가 사라진다고 해서 지난주부터 부랴부랴 쓰는 중입니다. 그래서 마침 오늘 그 마지막 이틀째를 쓰는 중이에요. 당연히 일은 없지요.
마침 날씨도 오늘은 그리 덥지가 않고 선선합니다. 지금 화씨로 77도니까 섭씨로는 25도 정도 되죠. 여름 날씨 같지 않고 가을날씨같은 느낌마저 드는 오후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Porch에 앉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Porch에서 앉아 있으면 우리 마당과 이웃에서 넘어온 나무들이 울창하게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는데 입사귀들이 각자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구요 길게 늘여진 나뭇잎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마치 손을 펴고 손가락을 흔들듯이 오무렸다 늘였다를 반복하고요 소나무는 잔잔하게 마치 눈썹을 지그시 감은 듯한 노인처럼 잔잔하게 위아래로 살며시 움직입니다. 찌르래기 소리가 한참이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상공에 나타나서 지나가다 보니 모든 소리를 비행기 소리가 잠시 먹어 버렸네요. 저희 집 근처에 공항이 있는데요 이 공항에 개인 비행기들이 오고 가곤 합니다. 비행기 소리가 사라지니 다시 나뭇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마치 산내음 같은 싱긋한 향기에 맞추어 다양한 자연의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신선노름이 따로 없죠.
제가 요즈음 시와 소설, 수필 같은 문학에 꽂혀 있어서 Youtube 강연으로 듣고 있는데요 그러던 중에 경상북도에서 열린 문학모임에서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께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하신 영상이 있어서 어제 들었는데 구수하기도 했지만 이 분의 진심이 느껴지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오늘 글을 써야 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2년 전에 대구문학관에서 인문예술과학특강 ‘2023 문학, 꽃피다’라는 강연에서 김주영 소설가님께서 80대의 노구를 이끄시고 강연을 하신 것이 있어서 전체를 모두 들었습니다.
김주영 선생님은 경북 청송에서 어린시절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아주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밤늦도록 일을 하시고 쌀을 구해 오셔서 아들만 먹이고 자신은 굶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정식 결혼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탄생이 아주 불행한 그런 태어남인데, 그러면 서도 어머니는 나 하나를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하셨어 요. 일화가 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배가 고프죠. 그러니까 찬장이나 솥을 뒤져보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물 을 먹습니다. 그러면 한 30분 동안 배가 불러요. 나중에는 배가 고프죠. 해가 지고 나도 어머니가 나타나 질 않아요. 집 툇마루에서 해질 때까지 어머니를 기 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잠이 들어요. 잠이 들었다 깨 보면 부엌에서 삭정이 부러뜨리는 소리가 나요. 어머니가 어디 가서 한 됫박 되는 양식을 구해 와서 밥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밥을 퍼주죠, 먹으라고. 어머니는 안 먹어요. 가만 보면, ‘난 먹었다’ 하면서 남은 건 내일 아침에 나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하루 종일 굶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게 무척 가슴 아팠는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아, 어머니가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박목월, 김동리 선생님등이 세우신 서라벌 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에서 박목월 교수님께 11편의 자작시를 드리고 평가를 듣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박목월 교수님의 답변은 뜻밖에도 시는 어렵겠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군대를 다녀 오신 후 소설가로 진로를 수정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시인이 되고자 했죠.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시를 11편을 써가지고,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박목월 선생님한테 보냈어요. 하늘과 같은 박목월 선생님께, 제가 시 쓴 겁니다 하면서 한 번 봐주십시오 했더니 고맙게 받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드리고 난 다음에 열흘이 지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께 시를 보내 드렸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자네 운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시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눈앞이 하얘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알겠습니다 하고 얼굴이 정말 하얗게 되서 나가가지고 생각했죠. 아, 내가 멋모르고 덤벼들었구나하면서 하늘같은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그대로 수용을 한 겁니다. 이래서 내가 어쩐지 압니까? 학교를 그만둬버렸습니다. 군대에 입대를 했어요. 군에서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시인 될 자격이 없다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닭을 잡자, 그래서 수필을, 산문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지금 내가 소설가가 된 동기가 됩니다.
김주영 선생님의 소설은 하층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객주’라는 10권 분량의 장편소설이죠. 서울신문에서 5년간 연재된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위해서 현장조사를 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 현장을 답사해야 된다는 것, 선생님으로 인해서 많은 후배 작가들이나 제자들한테 어떻게 보면 지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 현장조사, 답사를 왜 철저히 하냐면 작품 속의 현장감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거 맞구나, 하는 생각을 어떤 그런 작품과 접촉성을 강화시켜 주는 것 같아요.
객주를 9권까지 연재하시고 갑자기 절필선언을 하셨습니다. 글이 더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죠. 그리고 20년이 지나서 마지막 10권째를 다시 서울신문에서 연재해서 마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의 장편소설을 위해 거의 30년이 걸린 것입니다. 너무나 그 끈기가 대단하지 않아요? 김주영 선생님은 국어사전을 항상 가지고 다니시고 카메라와 노트를 가지고 주로 노인들을 인터뷰하시는데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노트해 놓았다가 사전에서 찾아 보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주영 선생님의 소설은 어렵다고요. 모르는 단어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거죠. 우리말인데도 그렇게 모르는 단어가 많다고 하시네요.
『객주』 같은 경우에도. 어떻게 보면 30년 만에 10권째 완결편을 냈다는 것은 웬만한 뚝심 아니면 안되었을텐데, 9권을 쓰시고는 왜 그때 멈추셨어요?
그때가 아마 한국에 신문연재 사상 없었던 일인데, 9권 째 끝나는 지점에서 한국 최고 원고료를 받았습니다. 신문연재 할 동안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그런데 9권 째 분량을 쓰고 나니까 진이 확 빠지는 거예요. 더 못 쓰겠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신문 임영숙 문화부장한테 더 못 쓰겠습니다 이러니까, ‘그러지 말고 한 5개월 정도 시간을 줄테니까 계속 쓰라’ 하더라구 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끝마치는 게 좋겠다 라고 했는데 임부장이 뭐라고 했냐하면 ‘더 쓰고 싶을 때 반드시 얘기해라. 다른 신문에 가면 안 된다.’ 그렇게 얘기 하는 거예요. 알았다고 하고는 한 20년 흘렀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푸쉬킨에 대한 러시아 여인들이 3,4일 걸려서 꽃을 놓고 간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그것이 작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시베리아에 유배를 갔을 때 어떤 어려운 소녀에게 건네준 시가 러시아 여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위로가 된다는 것이죠.
푸시킨의 시를 예로 들 수 있죠.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마라’ 하는 시가 있지 않습니까? 그 시가 원래는 잡지나 신문에 발표됐던 시가 아니었습니다. 푸시킨은 그 당시에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집니다. 거기 유배지 농장에서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아주 누추하고 무식했던 그 소녀가 고생고생을 하면서 농장 일을 하는 거 예요. 그래서 그 아가씨한테 종이를 한 장 달라고 해서 그 시를 써 준 겁니다. 그게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하는 시입니다. 그 시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지 1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 러시아에 살고 있는 그 주부들이나 할머니들이 자기 집 텃밭에서 기른 꽃을 꺾어다가 푸시킨의 동상 앞에 바치고 가는 겁니다. 시골에서 모스크바에 올라오는 가정 주부들이 자기 집 텃밭에서 기른 생화를 기차를 타고 사흘, 나흘 걸려서 바치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시 한 편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뭡니까? 그게 바로 위로입니다.
김주영 선생님께서 가장 최근에 인터뷰하신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셨습니다. 이제 연세가 많으시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대도 이 노트 한 권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객주(客主)’라는 소설과 그걸 쓰는 일에 미쳐 있었지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경북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지난 21일 만난 김주영(85) 소설가가 ‘객주’ 육필 원고를 들어 보였다. 대학 노트에 3mm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새까맣게 들어차 있었다. 언뜻 까만 점이 촘촘히 찍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 말 조선 팔도를 누빈 보부상의 생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대하소설 ‘객주’(1984년 출간 당시 총 9권)가 이런 대학 노트 20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주영은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4년 9개월간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객주’를 연재했다. 연재 시작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 개 넘는 시골 장터를 돌아다녔다. 연재 중에도 노트를 갖고 장터를 누비며 사람들을 만났다. “족히 500명 넘게 만났을 겁니다. 장터에 앉아 있다가 흥미로운 사람이 보이면 따라가서 막걸리를 사주었습니다. 한 주전자를 나눠 마시면 온갖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지요.”장이 파한 밤이 오면 여인숙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글을 썼다. 대학 노트에 초고를 쓰고, 그 내용을 다시 원고지에 옮겼다. “엎드려서 원고지 70~80매를 그냥 써내려 갔어요. 미쳐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한 주간 쓴 글 묶음을 인근 신문지국에 가져다주면, 지국에서 원고를 본사로 부쳤다. 문학관 3층 전시실에는 이때 그의 생활을 형상화한 마네킹이 전시돼 있다.
이제 막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소설가 지망생이 언제쯤 김주영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글을 쓸 수 있게 될까요?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어렵게 자랐으면서도 항상 웃으시는 김주영 선생님의 끈기있는 인생을 보면서 제가 부러워한다는 점을 이곳에 남깁니다. 꼭 오랜동안 귀감이 되어 주시고 좋은 소설 계속 써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객주 10권을 꼭 읽어야 겠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걸 이 분의 그림이 잘 표현한 것 같아서 따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붙여 넣었습니다. 향기나는 인생님의 글도 매우 잘 쓰셔서 제가 덧붙일 것이 없을 정도이지만 제 나름대로 글을 좀 써보려고 합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에 대해 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성이라는 점, 어떻게 이 분들이 사회의 편견을 극복했을까? 에 대해 궁금했던 것도 있고요. 한두번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제가 직접 궁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에 이 두분의 인생에 대해서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하고 나서 이 글을 쓴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제가 요즈음은 Biotech에 대해 별로 글을 안 쓰고 한국 얘기를 많이 쓰네요. 올해 제가 한국에 못가거든요. 아마 그래서 더 이런 글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16세기에 조선에 살았던 분으로 시인이자 화가였습니다. 신사임당이 허난설헌보다 약 60년전에 태어났죠. 신사임당은 47년을 사셨고 허난설헌은 27년을 사셨습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이라는 폐쇄된 소국에서 이런 분들이 나오기는 너무나 어려운데요. 이 분들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집안 분위기가 중요했습니다. 신사임당의 집안은 외가의 영향이 큰 집안 분위기였습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이 다섯이었는데 모든 딸에게 글을 가르쳤고 시와 그림에 탁월했던 둘째딸 신사임당의 재능을 아껴서 그런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사위로 홀어머니와 살며 아직 급제를 하지 않은 이원수와 결혼을 시키게 됩니다. 이원수는 그릇이 큰 사람이어서 신사임당이 옳은 말을 하면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신사임당은 집안에 딸만 있는 관계로 이원수는 결혼 후부터 처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들이 신사임당이 자신의 재능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신사임당은 47세에 심장병으로 죽게 되고 율곡 이이는 크게 방황을 해서 한때는 승려가 되겠다고까지 했는데 이 때에는 신사임당의 어머니 즉 율곡 이이의 외할머니께서 이이를 돌봐 주셨다고 합니다.
반면 허난설헌은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나이고 허봉의 여동생이었는데 허난설헌의 아버지인 허엽도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글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은 어려서 부터 시에 큰 재능을 보였는데 이미 8세때부터 라고 합니다. 허난설헌의 12살 위 오빠였던 허봉은 일찌기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중국에 왕래를 많이 했는데 그 때마다 좋은 시가 있으면 허난설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남편 복이 없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시할아버지가 영의정을 하고 시아버지가 동부승지를 한 명망있는 집안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사임당과 달리 시집살이를 하도록 나라에서 바꾸게 되면서 시집살이를 하는 첫세대로 살게 되었다고 하고 그 남편이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하면서 외도를 계속 하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서 친정 아버지, 오빠 그리고 딸과 아들이 차례로 병으로 죽게 되면서 허난설헌은 매우 상심하게 됩니다.
결국 허난설헌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모두 친정이 강릉입니다. 강릉에 꼭 한번 가봐야 겠네요. 아래는 허난설헌에 대한 좋은 동영상이 있어서 링크를 올립니다.
이번 주는 다른 주와 달리 조금은 여유로운 (?)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약간 징크스가 될 수도 있는데요 편안하다고 하면 다음주는 보통 엄청 바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냥 망중한 (忙中閑) 정도로만 나누죠.
Blog를 쓰다 보니 이 중에 과연 얼마나 진정한 내 얘기일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토스트기로 빵 한 조각을 굽고요 당이 없는 아몬드 우유를 한잔 따라 마십니다. 빵이 구워지면 아몬드 우유 한잔과 함께 자연스럽게 저의 Porch로 가서 의자에 앉아 빵과 우유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죠. 평화롭지 않나요?
바람 소리를 듣다 보면 자연에서 들려오는 많은 소리가 따스한 여름 바람을 타고 함께 제 피부로 다가와 지나쳐 갑니다.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소중한 하루가 시작된다는 기쁨이랄까 하는 감정과 함께 빵 한조각이 주는 포만감과 아몬드 우유가 주는 단백질의 기운이 저의 하루를 힘차게 이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단했던 저녁이 가고 새로운 아침이 되었을 때 그 새 아침을 여는데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양식이로군요.
그리고 컴퓨터와 책들을 몇권 들고 나옵니다. 사실 요즈음은 소설을 읽고 있는데요 제가 읽고 있는 소설들은 제가 처음 읽는 소설은 아니에요. 저는 여러권을 다양하게 읽는 다독 (多讀)을 하지 않고 한권을 여러번 읽는 다독 (多讀)을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읽을 때는 아주 빠르게 읽고요 두번째 읽을 때부터는 아주 정독을 합니다. 사전을 찾아가면서 모르는 단어를 체크하기도 하고요 앞으로만 나가는 게 아니라 뒤로 다시 가서 읽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책을 오래 읽게 되겠죠. 한권을 여러번 읽으면 처음 읽을 때와 달리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보통 소설가들이 책을 쓰는 기간이 짧게는 몇개월이겠지만 길면 몇년간 묵혔다가 쓰기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걸 생각하면 책을 그냥 한번 읽고 다른 책으로 옮겨 가기에는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책을 여러번 읽다보면 그 깊이를 파고 들어가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읽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얼마 전부터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을 쓴다기 보다는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군요. 일단 제목을 붙이고 시작을 한 소설이 두세편이 됩니다. 어떤 건 좀 나갔고요 어떤 건 조금밖에 나가지 않더라구요. 마치 Blog 쓸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부터 무슨 얘기를 써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쓴다기 보다는 글이 가는대로 쓰는 중이기 때문에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요. 지금까지는 등장인물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에요.
일단 초짜이니까 중편,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을 쓰려고 하는데요. 단편 소설이 보통 A4 용지로 7페이지에서 15페이지 정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일단 그10페이지 정도 분량의 단편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쓸 수 있게 된 건 생택쥐페리가 많이 도움이 됐어요. 생택쥐페리가 비행조종사로 살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는 걸 알고 부터 저도 그냥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단편소설을 신춘문예에 출품할 목적은 아니고요 단편소설이 완성되고 퇴고되면 제 Blog에 올릴 생각이에요. 어디라도 공개가 되면 세상에 알려진 거니까요. 그러면 소설가죠. ㅎㅎ
소설을 쓰는데 Google drive가 아주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공간도 아주 충분하고요 무료니까 너무 좋네요. 여러편의 word document를 열 수 있어서 좋고요 그리고 초기 화면에 여러 화면이 동시에 뜨니까 그걸 보면서 제가 제 작품으로 찾아 들어가게 되더군요. 소설을 쓰면서 제가 좀 더 넣고 싶은게 몇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그림이에요. 아니면 사진도 좋고요. 그런데 제가 그린 그림이나 제가 찍은 사진을 넣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소설이니까 사진보다는 그림이 좋겠죠? 바라기는 각 페이지마다 좀 상징적인 (?) 그림이나 삽화를 하나 넣어 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이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게 제가 그림을 정~말 못 그리거든요. 혹시 그림 잘 그리는 분이 계시면 알려 주시면 협업 (?)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그냥 광고하고 있죠? 그림이 아니라면 Caligraphy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시 (詩) 에요. 소설 속에 시가 좀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소설과 시는 좀 다른데요. 하지만 작가가 얘기하는 Story line에서 시적인 면이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원래 시인이었다고 해요. 평생 시를 쓰다가 소설로 처음 쓴게 닥터 지바고라고 해요. 이 작품으로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분이 시만 쓰다가 소설로 쓴게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되니까 이 뒤에 미국 CIA가 가담했다는 Conspiration theory도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런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시인이다 보니까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주인공 유리 지바고도 의사이면서 시인이거든요. 그리고 소설의 느낌이 시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는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와 소설이 함께 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제 소설에 시가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Bucket list 중에서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기가 있는데요 이건 내년 봄부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는 계획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해요.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보니 한국어를 많이 잊게 되었어요. 단어도 많이 생각나지 않고요. 모국어인데 몇 안되는 단어가 점차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도 들었고요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많을수록 삶이 풍성해 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저는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겠죠. 참고로 제가 고등학교 때 가장 못한 과목 두개를 꼽으라면 하나는 화학이고 하나는 국어였는데 화학은 제가 화학자가 되면서 아주 정복 (?)을 멋지게 했으니까 이제 국어를 남은 여생 힘차게 배워 보고 싶어요.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쓸 때에도 도움이 되지 해가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혹시 국어국문학과 공부를 하면서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소설을 쓰면서 제가 사는 삶이 더 풍성해 진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요. 저는 저의 삶에 대한 자전적 소설을 쓰려고 해요. 그리고 좀더 공부가 되어서 중편과 장편소설까지 쓸 수 있는 필력이 된다면 한국의 과학자의 삶에 대한 소설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너무 먼 미래의 꿈이겠죠. 이제 햇병아리 초짜 초절정 하수 소설가의 시작이니 언제 장편 대하소설을 쓰겠어요. 하지만 일단 방향은 그렇다 이겁니다. 흠하하.
한국에서 주로 공부했고 직장 생활도 하다가 미국에 넘어와 산 지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많은 경험을 했어요.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하고요 다른 사람들도 제가 행운아라고 많이들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일에서 저는 제가 가진 재능이나 실력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행운아라고 항상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행운을 누리며 사는 분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는 행운아라는 마음으로 살아 갑니다.
그런데 그 행운아가 겪었던 수많은 불운 (?)과 고난을 말 못하는 느낌이 저를 항상 조여왔던 것 같아요. 어떨 때에는 뜬 구름 없이 친구들에게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모두를 당황 시킨 적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런 말을 하고 나면 항상 지나고 후회했어요. ‘그 말을 괜히 해 가지고…’ 이렇게요. 그런데 그래도 이 얘기를 어딘가에 쓰기는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에세이를 쓸까 했는데 그건 너무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좀 세상에 나자신을 벌거벗은 채 드러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어쩌면 저 자신을 너무 미화 (?)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어요. 그래서 대신에 저와 같거나 제가 가지고 싶었던 어떤 Character를 창조해서 거기에 저의 못다한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단편소설 아니 소설을 쓰기 시작한거죠.
그리고 시도 쓰고 있어요. 얼마전에 첫 시를 발표했죠. 두번째 시도 써 놓기는 했는데 발표를 할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세번째 시도 쓰는 중인데 글이 마춰지지를 않아요. 누군가에게 제 시를 발표한다고 해서 무슨 감흥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요 큰 기대는 하지 않는데 제자신을 위해 쓰는거에요. 기억에 담아 두려고요. 저의 당시의 진짜 감정을 시로 남겨서요. 시를 써 보니까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었어요.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별말을 다 하네요. 이만 이번 글은 마치려고 합니다. 저의 꿈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있네요.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삶에도 꿈이 전진하시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979년 야간인 서울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던 열일곱살 여공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반성문을 쓰라는 벌을 받았다. 1주일 동안 무단결석을 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은 학교를 다시 나온 여공에게 “어떤 얘기라도 좋으니 네 얘기를 써 봐라.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거라. 대신 학교는 빠지지 말아라”고 말했다. 여공은 대학노트에 20쪽이 넘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반성문 대신 이 글을 받아든 선생님은 “소설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작가 신경숙(48·사진)씨와 최홍이(69) 서울시 교육의원의 아름다운 사제(師弟) 스토리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으면 소설가로서는 더 풍요롭게 작업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역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그 한 장의 종이로 리진의 일생을 모두 내가 채워 넣었어요. 그 시간은 내게 개화기 시대의 조선과 유럽을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했고, 실존했으나 사라진 어떤 인생을 소설가로서 그려내는 충만한 시간이기도 했죠. 《리진》을 쓰면서 처음으로 소설 쓰는 근육 같은 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생각만 하고 쓰다가 멈추기를 계속했던 《엄마를 부탁해》도 《리진》을 내고 나서 쓸 수 있었으니까요.”
“내 반성문이 적힌 그 노트를 돌려주며 선생님이 ‘너는 소설가가 돼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던 그 말씀만 기억나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이었지, 시인이 될 것인지, 소설가가 될 것인지 그 외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암담했던 나에게 정말 별이 쏟아지는 듯한 말씀이었어요.”
작가가 된 후로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을 때는요. “《풍금이 있던 자리》에 수록된 단편들을 쓰던 시기였어요. 스물두 살에 등단했지만 서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작품 쓰는 일에 온전히 시간을 내준 적 없이 살았어요. 계속 이렇게 지내면 서른이 돼서 너무 허탈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딱 1년만, 작품 쓰는 일에 몰두해보겠다며 다음 날 일터로 나가던 방송국을 그만뒀어요. 나에게 1년의 시간을 준 것이죠. 살 것 같았어요. 1년이 지난 해가 마침 아버지 회갑 때라 책이 나와서 아버지 회갑상 앞에 바쳤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독자들이 많이 읽어줬습니다.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뿐더러 독자들 덕분에 넓은 책상과 작업실까지 갖게 되었고 전업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됐죠.”
최홍이는 1969년 공주교대를 졸업한 후 같은 해 중등교원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중등학교 3곳을 거쳐 1979년 영등포여자고등학교에 부임했다. 당시 영등포여고 교장은 “최 선생은 서울대도 안 나왔잖아요, 4년제 정규대학도 못 나왔으니 야간반을 맡으라”고 했다. 최홍이는 “당시는 야속했지만 열의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다”며 “야간반을 맡지 않았더라면 신경숙이라는 인재를 만날 수 없었겠죠”라며 진주를 찾은 인연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최홍이는 “경숙이뿐 아니라 그 시절 만났던 제자들은 모두 시대를 함께 나눈 분신 혹은 동료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소설가 신경숙은 그의 장편 ‘외딴방’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힌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서울로 올라와 외딴방에 살며 구로공단 전자부품회사에 다니던 10대 소녀의 젊은 날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작품 속 ‘나’는 공장에 다닌 지 1년 만에 산업체야간학교에 입학하지만 주산·부기 위주의 커리큘럼에 흥미를 잃고 방황한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이는 최홍이 국어교사다. ‘나’의 글재주를 눈여겨본 그는 “주산은 안 놓아도 된다”며 평론이나 시 보다는 소설 쓰기를 권한다. 이후 ‘나’는 최홍이 교사가 건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설 습작에 들어간다. 야학은 신경숙을 소설가로 만든 ‘인큐베이터’였던 것이다.
신경숙 작가님께서 15세때 정읍에서 서울로 올라 오셔서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주경야독을 하고 소설을 습작하면서 소설가로 성장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신경숙님의 책이 좀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신경숙 작가님의 소설을 전작주의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