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TONIAN (66) 임윤찬 독주회 – J S Bach 골트베르크 변주곡 BWV988 을 들은 감동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부터 결혼식 참석차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습니다. 역시 보스턴 날씨가 캘리포니아 보다는 서늘하군요. 이런 날에 피아니스트 임윤찬님의 독주회가 있어서 오늘 저녁 보스턴 심포니 홀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독주회를 혼자 하는 것이고 보스턴에서 하는 한번 뿐인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자리가 3층까지 꽉 찼더군요.

이번에 연주한 노래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BWV 988이었습니다. 이 노래를 초연한 분의 이름이 요한 고틀리프 골트베르크라고 해서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이 노래는 임윤찬님의 스승이신 손민수 교수님의 인생 연주곡이라고도 합니다. 역시 그 스승의 그 제자네요.

오늘 들은 변주곡은 뭐랄까 임윤찬님이 자신의 음악 세계에 점점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변주곡은 일정한 화성 진행에서 변형을 시키는 것이어서 연주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악기는 잘 모르지만 예전에 합창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곡이 같은 가사를 계속 반복하고 변주하는 노래였거든요. 그래서 피아노 연주는 합창보다 더 어렵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배경에는 러시아의 백작의 불면증이 배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백작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를 위해 골트베르크가 연주를 하곤 했는데 바흐에게 자신의 불면증을 위해 골트베르크가 연주할 수 있는 노래를 작곡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흐는 본래 변주곡의 단조로움 때문에 변주곡 작곡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백작의 불면증을 위해서는 변주곡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해서 이 변주곡을 작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피아노가 흔치 않고 두개의 건반을 가진 챔발로가 주로 연주되었는데 이 노래도 챔발로로 연주하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연주는 14개의 변주곡으로 연주가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마치 연습곡을 연주하던 것처럼 연주가 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앞선 변주곡을 마치 다시 하나로 웅장하게 연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연주가 되었고 가장 마지막에는 다시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제가 기악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 건 처음 겪는 경험이었는데 제 아내는 여러 차례 눈물이 났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어서 좀더 남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1시간 반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진행되는 임윤찬님의 연주를 들으면서 온 몸과 온 감각이 호강하는 느낌이 들었고 뭔가 다른 차원의 인생 경험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옆자리에 저의 치과 의사 가족과 함께 앉게 되어서 같이 들었고요 오랜만에 교회 후배 내외도 만나는 복을 누렸습니다. 역시 한국인들이 거의 대부분 그 자리를 채운 것 같더군요. 모든 감동이 있었습니다.

BOSTONIAN (65) 김경천 장군님 – 일본육사 기병중위 출신 연해주 항일독립군 장군 (1888-1942)

2025년 10월 13일 (월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Winston Churchil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 국사를 배운 바 있지만 여전히 새롭게 배워야 할 잊혀진 역사와 영웅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 배우게 됩니다. 오늘 소개할 분은 김경천 (1888-1942) 장군이라는 분입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해 알게 된 건 고작 어제입니다. 이렇게 무지한 제자신을 느낄 때에는 정말이지 한심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당 이회영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40만원 (지금 돈으로 약 650억원에서 2000억원 상당)의 거금을 만들어 최초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가문입니다. 이 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신흥강습소를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훈련생들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하게 되는데 당시 남만삼천이라는 세분의 교관이 계셔서 신동천 (본명 신팔균), 지청천 (본명 지석규) 그리고 김경천 (본명 김광서)의 3분이십니다. 신동천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2기 졸업생이었고 김경천 장군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3회 졸업생이자 기병 중위였으며 지청천 장군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6회 졸업생이자 보병 중위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에 “뛰는 김좌진, 남만삼천이면 산천초목도 두려워 떤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광주고려인마을, 김경천 장군 세미나에 ‘남만산천’ 후손 한자리에 – 남도일보 9/5/2023

김경천 장군께서는 1888년 대한제국

김경천 장군님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영상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KBS에서 2012년 방영한 역사스페셜 –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의 영상입니다.

2012년 영상을 찍을 당시 김경천 장군님의 막내 따님이신 김지희님이 생존해 계셨고 증손녀인 김올가님께서 할머니의 말씀 “네가 러시아어도 할 수 있고 한국어도 할 수 있으니 김경천 장군님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해 주길 바란다”라는 것을 듣고 김경천 장군님이 묻히신 카자흐스탄의 장소를 찾는 이야기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분의 유해는 수많은 다른사람들과 함께 묻힌 상태여서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영상은 김경천 장군의 증손녀인 김올가님이 국회방송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신 우당 이회영 박사님의 손자이신 이종찬 회장님이 김올가님을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김올가님의 바램이 나오는데요 하나는 김경천 장군님의 백마탄 동상을 만들어서 제막하고 싶다는 것이고 영화제작이나 만화제작 등을 통해서 김경천 장군님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뉴스를 보니 김올가님께서 심장 수술을 받으셔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시네요.

‘백마탄 김경천 장군’ 증손녀, 생활고에 투병까지… 도움의 손길 절실 – 경북도민일보 7/7/2025

김올가님이 2019년에 증조할아버지인 김경천 장군님께 쓰신 편지가 있어서 전문 링크와 함께 일부를 나눕니다.

옛 소련땅서 독립운동 김경천 장군님께 증손녀 김올가 올림 – AsiaN 6/15/2019

할아버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어요. 그 모진 세월, “백마를 타고 일제 침략자들을 무찌르던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을까요. 2005년 할아버지의 일기가 발견됐어요.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피눈물로 쓰신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었어요.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동서양에 전쟁이 전개되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3성과 시베리아에 자연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백만의 우리 민족으로 세계에 대해서는 정의와 인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능히 혈전을 벌여 열강의 호의를 얻을 것이며, 독립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직전인 1919년 3월 1일에 쓴 일기였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멀리 내다보셨다니!

1919년에 이미 2차세계대전과 독립의 가능성을 이미 예견하고 계셨고 이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뛰어들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다. 동아일보도 1923년 7월 23일 확인 보도 – 교육N시민 2/3/2021

1983년 (사)한국독립유공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항일투쟁의 영웅 진짜 김일성 장군(1888~1925년 실종)의 이름은 김경천(金擎天) 이며, 본명은 金光瑞(김광서), 일명 金日成(김일성)으로 밝혀졌다. 그는 1910년 일본 육사(제23기 기병과)를 졸업하고 기병중위(기마부대)로 근무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1919년 6월 6일 청산리전투의 명장 지청천(池靑天: 일명 지석규, 당시 일본군 중위)장군과 함께 근무지인 서울(당시 京城)을 탈출, 평안북도 신의주를 거처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있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1919년 12월 무기획득을 위해 시베리아로 가자, 마침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을 상대로 1922년 10월까지 수많은 전투를 벌인 것으로 인해 항일투쟁의 상징이고 전설적인 독립군 영웅인 ‘김일성 장군’으로 칭송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의 왕실부대인 백군과 연합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항한 러시아 적군과 김경천 장군이 이끄는 고려해방군이 연합하여 많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22년 일본이 러시아에서 물러나게 되고 이 때부터 러시아 적군은 오히려 고려해방군을 해산하고 1925년 이후 김경천 장군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 1942년에 러시아 정부에 스파이 혐의를 쓰고 시베리아 노역형을 받다가 병으로 돌아가신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김경천 장군님이 일본 유학시절부터 1920년까지 쓰신 일기인 경천야일록 (擎天兒日錄)이라는 일기가 발견되어 김경천 장군의 삶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천아일록을 번역하여 출간한 김병학 교수님의 논문이 있어서 링크를 합니다.

경천아일록은 1888년 김경천이 출생한 때부터 1919년 만주 망명까지는 수기형식으로, 1920년부터 1925년 말까지는 일기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연해주 지역 항일운동가 김경천 장군이 1920년대에 기록한 경천아일록은 2005년 무렵에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 까라간다 주에 거주하는 김경천 장군의 막내딸 지희씨를 비롯한 유가족이 까라간다 정보국 문서보관소에 찾아가 김경천의 유품을 일부라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자 그 기관에서 서류뭉치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김경천 장군이 쓴 일기 경천아일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경천 장군님의 유가족들이 오랜기간 수차례에 걸쳐 김경천 장군님의 유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 일기 경천아일록이 발견된 것입니다.

1919년 초여름 망명에 성공한 이후부터 1922년 여름 빨치산 전투를 끝낼 때까지 3년간의 기록은 항일투쟁사에 대단히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고도로 훈련된 군인답게 그는 극한적인 체험까지도 절제된 언어를 사용해 간결하게 표현하고 전투요도까지 그려 넣어가면서 당시 연해주 한인 항일빨치산들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허나 그 절제된 언어 속에서는 숨길 수 없는 한인 빨치산 전사들의 피와 눈물과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부하에 대한 김경천의 연민과 애정이 절절히 흘러나온다. 그 외에도 만주와 노령을 넘나들면서 마주치는 세태나 국제정치를 보는 안목, 당시 연해주와 만주에 걸쳐 널리 존재하던 우리 독립단이 처한 환경, 그곳에 산재하는 우리 고시대의 유적들, 우리 유민이 살아가는 모습 등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김경천이 대단히 우려하며 기록해놓은, 소비에트 적위군이 함께 피를 나눈 동료였던 우리 한인빨치산 부대를 몇 차례에 걸쳐 참살한 사건 등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김경천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만한 합리적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 보면 당시 고려인사회가 이와 같은 사건에 빌미를 제공할 만한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2008년 김 예브게니씨가 발급받은 증명서를 토대로 최근에 확인해본 결과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묘소는 김경천 한 사람만 묻힌 무덤이 아니라 당시 그 수용소에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한 죄수들이 집단으로 묻혀있는 공동묘지다. 당국은 시신은 모아두었다가 1주일에 한 번씩 차에 싣고 가서 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경천 장군의 유해만 따로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거자료를 더 찾아 보완하고 세밀하게 확인하여 반드시 유해를 찾아 한국으로 봉환해야 할 것이다.

김병학 교수님 논문 이후로 김경천 장군님의 생애에 대해 좀더 자세히 전반적으로 다룬 논문이 있어서 링크를 올립니다. 전남대학교 윤선자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김경천의 결정에 아버지와 형은 찬성하지 않은 것 같다. 그해 여름 대한제국의 陸軍 副領으로서 도쿄를 방문한 김성은은 동생 김경천의 육군유년학교 입학을 반대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공병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교관으로 근무하였지만, 김성은은 동생의 육군유년학교 입학을 반대하였다. 대한제국의 당시 정세를 보건데 군인은 그다지 희망적인 진로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경천 장군님의 아버지와 형 모두 군인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당시 상황과 일본 정세를 잘 알고 있던 아버지와 형은 모두 군인이 되지 말고 공업을 배우도록 종용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 같습니다.

학교는 일제의 박해와 중국 지방 당국의 압력으로 1919년 11월 폐교하였다. 그러므로 김경천이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을 담당할 수 있었던 시간은 길어도 4개월여에 지나지 않았다...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922년 11월 <연해주 고려혁명군과 한인빨치산부대 군사혁명소비에트의 해산과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의 명령 799호>가 내려졌다. 러시아내전 이후 러시아 적군의 후원을 얻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려 했던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연해주의 모든 한인의병대들이 해산되면서 수청의병대도 해산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 시대인 1937년에 벌어진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대한 논문을 하나 남겨 놓으려고 합니다. 김경천 장군님과 그 가족들이 카자흐스탄에 살게 된 이유가 바로 이 고려인 강제이주정책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김경천 장군님의 생가터에 표지석이 만들어 졌는데 이 표지석 제막식에서 증손녀 김올가님이 말씀하시는 영상이 있습니다. 중간에 눈물로 말을 잇지 못하는데 곁에 계시는 이종찬 광복회장님이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 제막식에는 우당 장학회가 참여했습니다.

김올가님의 소원대로 김경천 장군님의 백마탄 동상도 제막되고 영화와 만화 등도 나와서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이 무지하지 않고 김경천 장군님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68) 김부규님 – 인생2막 개척자들 인터뷰한 책 발간한 공무원 작가

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이번주는 좀 바쁘게 시간을 보낸 한 주였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아주 바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요. 10월 들어 몇주간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긴장을 한 탓인지 몇번 휘청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꾸준히 운동도 하고 거의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 나름대로 건강 관리를 하는데도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역시 당할 재간이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내와 함께 지인 분과 18홀 골프를 치고 왔습니다. 오늘도 새로 만나는 분과 함께 라운딩을 했는데 아주 골프를 잘 칠 뿐만 아니라 성격도 좋아서 즐겁게 골프를 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간 골프장은 단풍이 제법 풍성히 물들어 있어서 내가 골프를 치는지 단풍 구경을 하러 온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카트를 타고 주로 다니기는 했지만 후반에는 카트에서 내려서 많이 걸으며 주의 경관도 감상하고 잔듸도 밟으며 공도 치며 즐겁게 운동을 했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요즘 아내와 차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하는 대화는 은퇴에 대한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제가 은퇴를 하겠다고 거의 매일같이 아내에게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사실 최근에 직장을 옮긴 이후부터는 새로운 직장과 하는 일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지 은퇴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진 상태인데 이제는 아내가 오히려 저에게 은퇴 준비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하고 저는 그걸 듣는 입장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객전도가 된 상황이고 자업자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2막에 대해 좀 검색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의 주인공 “김부규”님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에 대한 몇편의 기사와 책을 출간하시는 것, 그리고 오마이뉴스에서 연재기사를 내시는 것 등을 보게 되면서 김부규님의 삶의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부규님에 대한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인생 2막을 준비하려 선배 퇴직자 찾아다니다 책까지 출간…“배우려면 두려움 없어야” – 서울경제신문 2/24/2025

김부규(59) 씨는 퇴직을 앞둔 이들이 길잡이로 삼을 사례집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인생 2막을 먼저 시작한 100명의 선배를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김 씨는 2015년 퇴직 준비를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정년까지는 10년이 남아 있었지만 선배들이 “퇴직 준비는 10년 전부터 해야 한다”고 강조한 터였다. 주말마다 도서관을 찾아 퇴직과 노후 준비, 재취업에 관한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어 내려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그의 눈을 번쩍이게 하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도서관을 찾은 지 2년 만이었다. 퇴직 후 프랜차이즈 피자 가게를 창업한 중장년이 쓴 그 책에는 자영업자가 보내는 하루하루의 치열한 일상이 담겨 있었다.

글쓰기가 낯설었던 그는 지역 도서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수강하고, 인터뷰 요령을 공부하며 인터뷰어가 되기 위해 1년간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렇게 2019년 그의 퇴직자 인터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는 인생 2막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몸으로 부딪쳐 봐야 한다는 주의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는 ‘체험 삶의 현장’을 방불케 한다고. 현장감을 살려서 글을 전달할 기회가 되기도 해 양봉장과 고추 농장 등 경험할 수 있다면 최대한 직접 찾아가 일손을 도우며 현장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궁금한 직종이 있다면 수소문해 발굴하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도 관련 인물이 눈에 띄면 주저하지 않고 섭외를 시도한다. 우연히 ‘산야초 팝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붙인 사진관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들어가 ‘약초꾼으로 전직하시냐’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 기자 직함이 찍힌 명함 한 장도 없으니 거절당하기 일쑤. 그는 클리어 파일에 인터뷰 기사를 하나하나 출력해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6년간 카페, 철학원, 화물운송업, 양봉업, 귀농, 사회복지사, 시설 경비원 등 총 52명의 인생 2막 개척자를 만나 52가지의 직업 세계를 탐구했다. 그 결과물이 2022년에 출판한 ‘퇴직, 두렵지만 희망은 있다’이다. 그는 이를 개정해 ‘퇴직 후 나는 다른 일을 한다’도 출판했다.

인생 2막의 경로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심 분야의 책을 읽는 겁니다. 책에 길이 있어요. 저도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았어요. 저는 현직에 있으며 준비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충분히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휴대폰에 여러 어플을 다 설치해 봅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키오스크도 마찬가지고 인스타, 엑스(구 트위터) 등도 다 다룰 수 있어요. 배우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해요. 일단 해보는 거죠.”

[화제] 현직 공무원이 은퇴자들의 새 일자리 다룬 책 출간 – 서울신문 2/11/2022

11일 김 팀장에 따르면 2025년 12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그도 다른 사람들 처럼, 퇴직 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해 고민을 많이 했던 ‘예비 퇴직자’이다. 선배들로 부터 “퇴직 10년 전 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그는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인생 선후배들이 주위에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을 다룬 정보가 의외로 너무 없었다. 틈틈히 도서관을 다니면서 여러 책을 보며 퇴직 후 직업을 고민하던 그는 어느날 ‘먼저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어 치킨 가맹점 사장, 귀농인, 시내버스 운전사, 양봉농장 운영주, 화물차주, 개인택시 운전사, 편의점 대표, 행정사, 공인중개사, 대리운전기사 등 주변 지인 부터 하나 둘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로는 지인의 지인 소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 인터뷰를 했다. 퇴직 또는 전직 후 성공적으로 새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의 솔직하고도 ‘생생한 경험담’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됐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타인들과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인터뷰 내용을 공유하기로 마음먹고 2019년 가을 부터 2년여에 걸쳐 20명의 인터뷰를 완료했고, 21번째 부터는 한 온라인 매체에 연재 중에 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앞길이 보였다. 김 팀장의 올해 목표는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TV프로그램인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이다. 내년엔 제2권 출간도 계획 중에 있으며, 이후 글씨기 공부를 더 해서 소설 집필에 도전할 생각이다. 글쓰기는 2018년 부터 시작해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연습하면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부규님은 현직 공무원이신데 올해 12월에 정년퇴직을 하시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10년 전인 2015년부터 은퇴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틈틈이 읽으셨는데 그 중 어떤 분의 체험 이야기를 읽으시고 이를 직접 찾아가서 인터뷰하기로 하셨다는군요. 인터뷰를 시작하시기 전에 글쓰기 교육이나 인터뷰에 대한 공부를 1년간 하시고 2019년에 인터뷰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터뷰가 쉽지 않죠. 김부규님은 그분들의 삶의 현장에서 일을 돕고 체험을 하시면서 직접 부딪혀 보면서 글을 써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특이점인 것 같고 이 분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글이 쓰여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책을 읽는 것이 모든 일의 가장 첫번째 길이라는 것을 김부규님을 통해 다시금 배우게 됩니다.

김부규님은 오마이뉴스에 2021년 9월부터 현재까지 43분의 인생2막 이야기를 연재하고 계십니다.

퇴직 후 새 인생 개척한 소시민 이야기 – 오마이뉴스 김부규 참여기자

김부규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현명한 은퇴자들’ 유튜브 채널에서 인터뷰 한 내용이 있군요.

첫번째 인터뷰 중에서 와닿는 말씀은

  • 관심분야 5 권의 책을 읽으라는 것이고 그 중에 관심 있는 분야가 생기면 그에 대해 15-20권 정도 책을 읽으면 길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될 것이다. 만약 그래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책읽기를 시작하면 된다.

두번째 인터뷰 중에서 가슴에 와닿는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공부하고 경험해 봐야 한다. 좋아해야 어려움이 올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노는 위주의 취미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생산적인 활동을 할 때 오래간다. –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느낌을 가지려면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해야 보상도 받게되고 일을 통해 또다른 즐거움을 누릴수도 있고 주위에 베풀 수도 있다. 따라서 생산적인 활동은 삶의 의미를 크게 느끼게 할 수 있다.
  • 직장생활에서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조금 여유있게 길게 시간을 보면서 여유를 가지고 은퇴 이후를 준비해야 넓게 볼 수 있다.

김부규님은 근 10년간 책을 통해 공부하고 계속 시도하시면서 길을 찾아가는 방식을 몸소 체득하신 분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부터는 또 어떤 삶을 사실지 기대가 되어 부러우면 지는거다에 모셨습니다.

BOSTONIAN (64) 손흥민 선수의 137경기 A매치 최다출전 신기록을 축하합니다.

2025년 10월 11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저는 “손흥민”이라는 대한민국 등번호 7번 선수를 사랑하는 팬의 마음으로 그리고 손흥민 선수 자신이 가장 기쁜 순간 중 하나로 2025년 10월 10일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기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남자축구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주장이라는 것의 무게는 주장 완장을 차 본 선수가 아니라면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박지성 선수가 주장 완장을 찬 모습을 기억하고 현 월드컵 감독인 홍명보 감독의 선수 시절에도 주장 완장을 찬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는 이제까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선배 거인들의 어깨를 넘어 후배들을 위한 새로운 거인이 되어가는 중요한 우리의 자산이 되어 가고 있고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비록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나라 중 하나인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과의 홈경기 평가전에서 5대0 이라는 큰 점수차로 지기는 했지만 사실 이런 점수차가 우리 팬들에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고 기억해 보신다면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거스 히딩크 감독님도 하도 5대0으로 지다 보니까 별명이 “5대0″이라고 불린 치욕적인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서 어쩌면 반드시 넘어가야할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전경기를 보지 못하고 하이라이트로만 보았슴에도 많은 비가 오는 와중에서 고군분투한 우리 캡틴 손흥민 선수가 전방에서 홀로 브라질 수비수 여러명을 상대하며 외롭게 싸우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 대표팀에서 손흥민 선수가 전방 공격수로 경기장에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상대팀이 느끼는 부담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경기를 현장에서 직관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축구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차례의 경기를 통해 손흥민이라는 탁월한 공격수가 우리의 주장으로 경기를 이끌 때에 상대팀이 아무리 강팀이라 할지라도 손흥민 선수를 한명의 수비수에게 맡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제 경기에서도 손흥민 선수 주위로 3명 이상의 수비수가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대단한 선수를 우리가 자랑스럽게 볼 수 있고 그로인해 대한민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팬들 모두는 즐거운 흥분으로 경기를 보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장거리 비행을 한지 얼마되지 않아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혼신을 다해 뛰어 주었고 그로 인해 더 큰 점수차가 날 수도 있었던 경기가 5대0으로 마무리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후방에서 수비하던 김민재, 조현우 선수가 막아낸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 핫스퍼의 주장으로 있다가 팀을 옮기는 결정을 할 때 미국 LAFC로 옮기는 결정을 한 배경에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 주장으로서의 마음가짐과 고려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LA는 미국 서부 끝에 있어서 한국과 가장 가깝고 무엇보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이 열리는 미국에 있습니다. 이런 결정들을 할 때 대표팀이라는 생각, 주장이라는 생각에 대한 의지가 없이 자신만을 위한 결정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 손흥민 선수가 2025년 지금 순간을 지나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를 생각할 때 저는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예선 마지막 경기 독일전에서 마지막 두번째 골을 넣기 위해 수십미터를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마침내 가까스로 골을 넣었던 그 순간이 기억에 매우 오래 남습니다. 이 골은 손흥민만이 할 수 있는 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경기 순간은 언제 보아도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어제 137경기 대표팀 A 매치 최다출전기록을 이룬 손흥민 선수를 위해 노컷뉴스는 4장의 사진을 실었습니다.

‘A매치 최다 출전 137경기’ 손흥민[노컷네컷] – 노컷뉴스 10/10/2025

마지막 우비를 입고 응원하는 대한민국 붉은악마 응원단 앞에서 온몸에 비를 맞은 손흥민 선수가 왼쪽에 주장완장을 차고 관중석을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당연히 137경기가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아니죠. 지금부터 본인만의 새로운 기록을 위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손흥민 선수에게 저는 언제나 그리고 오랜동안 영원한 팬으로 남아서 응원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손흥민 선수 – 137회 최다A매치 출전 기록과 대한민국 월드컵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헌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노벨화학상 – 2025년 일본 北川進 (Kitagawa Susumu) 교수님의 MOF (Metal Organic Framework) 연구를 축하드리며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10월이 되니 스웨덴에서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연일 계속되는군요. 작년에는 우리나라의 한강 작가님이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을 하셨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다른 상도 관심이 있겠지만 저로서는 이번 화학상 수상자 중 한분이신 일본 교토대학교의 北川進 (Kitagawa Susumu) 교수님과 그분의 연구성과 그리고 이분에 대한 일본 현지의 언론의 기사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2024년까지 일본에서 공식적인 통계로 30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는데 올해 벌써 두분을 배출함으로써 교토대학교에서만 10명으로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낸 대학교가 되었습니다. 교토대학교에서 1949년에 湯川 秀樹 (Yukawa Hideki, 1907-1981) 교수님이 핵물리학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신 이후부터 2025년 현재까지 70여년간 꾸준히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연구 업적과 문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 수 없어서 부러울 따름입니다.

영어권 뉴스에서는 北川進 교수님 보다 다른 두분의 수상자에 대한 연구 업적을 좀더 얘기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한해에 벌써 두명의 노벨상이 나왔다는 뉴스는 있지만 北川進 교수님의 업적에 대해서는 역시 일본 언론이 좀더 세심하게 연구 결과라든지 그분의 성장 배경 등에 대해서 얘기하는 기사가 훨그의 연구의 전환점은 1979년 교토대학 대학원을 마친 후 대학의 조교로 임명되었을 때였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계산을 통해 화학 물질의 성질과 화학 반응을 해명하는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실험실에서는 금속 이온과 유기 분자로부터 화합물을 합성하는 완전히 다른 주제가 주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실험실 장비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신 장비를 갖춘 의과대학에 밤에 사용해달라고 요청하고 밤새도록 실험을 했습니다. 조교로서 집안일로 바빴습니다만, 그 가운데서도 학생의 전문 분야를 꿰뚫어 보거나 동기를 부여하고 연구를 맡기는 방법을 배웠습니다.씬 많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일본 언론 특히 요미우리신문의 연재기사를 가지고 北川進 교수님에 대해 배워 보고자 합니다.

北川進 교수님, Richard Robson 교수님, Omar M. Yaghi 교수님의 2025년도 노벨화학상에 대한 내용은 노벨위원회에서 아래에 정리해서 올려 놓았습니다.

Scientific Background to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2025 – METAL–ORGANIC FRAMEWORKS – The Nobel Committee for Chemistry

그리고 키타가와 교수님의 최초 보고인 1992년 논문은 아래에 링크를 했습니다.

Synthesis of the Novel Infinite-Sheet and-Chain Copper(I) Complex Polymers

74세이신 키타가와 스스무 교수님에 대한 요미우리신문의 연재 기사를 올립니다.

노벨 화학상 키타가와 스스무 교토 대학 특석 교수 진로와 연구의 어려움… “아이디어는 참신할 때까지 두들겨 맞는다” -요미우리신문 10/82025

키타가와 교수님 연구의 전환점은 1979년 교토대학 대학원을 마친 후 대학의 조교수로 임명되었을 때였습니다. 본래는 계산을 통해 물질의 성질과 화학 반응에 대한 연구를 했지만 교수가 되고나서 금속이온과 유기분자로 부터 화합물을 합성하는 새로운 연구주제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일본도 실험실 장비가 부족한 상태여서 최신장비가 있는 의대에 가서 밤을 새워 실험을 하기도 했고 지도하는 학생들의 장점을 파악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연구를 맡기는 것 등도 배워 나갔다고 합니다. 수많은 노력 끝에 합성한 화합물에 수많은 구멍이 생겼고 이 구멍을 가스를 빼내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1997년에 논문에 발표를 했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초기에 국제회의에서 발표하는 과정에서 “믿기지 않는다”. “잘못되었다”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연구가 노벨상을 받게된 키타가와 교수님 연구의 핵심입니다.

“아이디어가 참신하지만 두들겨 맞았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면 끝입니다. 나는 그것이 개선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취업을 생각하고 있던 키타가와 스스무에게 “건방진 연구자가 성장한다”고 밀어붙인 지도교수는-요미우리신문 10/8/2025

키타가와 교수님은 교토 중심부의 시조 가와라마치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지역 중학교에 다녔고 책을 읽으면서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배구에 전념하고 열심히 연습했고 주장을 맡아서 팀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회사 취업을 생각하던 키타가와에게 박사과정에 진학하도록 조언한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교수였고 현재 교토대학 명예교수인 모리시마 교수입니다.

키타가와 교수님의 학생이자 컴퓨터 그래픽(CG) 제작사 ‘사이언스 그래픽스’ 사장인 츠지노 타카시(43)는 교토 대학교 4학년생이던 2004년부터 3년간 키타가와 연구실에서 연구할 때 MOF는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실용성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츠지노 씨 등에게 키타가와 씨는 ‘쓸모가 없다’고 설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기에 유용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토 대학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선배’ 요시노 아키라씨는 “대단하다”고 말했다. 후쿠이 켄이치의 “손자”는 공통점이 있다.-요미우리신문 10/8/2025

리튬 이온 배터리를 개발하여 201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아사히화세이의 명예 연구원 요시노 아키라씨(77)는 키타가와 교수가 교토대학 석유화학과 요시노의 후배로, 일본인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쿠이 켄이치의 손자다. 자신과 키타가와 씨가 화학상 일본 수상자가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후쿠이 박사의 DNA를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깊은 감동을 담아 말했다.

후쿠이 씨는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기본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최첨단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후쿠이 교수의 가르침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도 답을 찾는 연구자에게는 중요한 출발점이며, 키타가와 교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키타가와 씨의 업적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과학이며, 대기에서 온실 가스를 분리하는 등 세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은 기술입니다.

키타가와 스스무 교수님이 학부시절에 후쿠이 켄이치 교수님은 교토대학교 교수이셨습니다. 그래서 손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오랜 연구 전통을 가진 대학에서 좋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참 부럽습니다. 일본 언론에서는 최근들어 일본의 연구동력이 떨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좋은 연구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시간이 문제이지 한국에서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할 날이 곧 오기를 바랍니다.

내가 쓰는 나의 삶 (72) 소소한 매순간의 행복 (feat 행복해 지는 법 by 김진혁공작소)

2025년 10월 6일 (월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2025년은 저와 저의 가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인데요 어느덧 10월에 접어 들었네요. 10월이 되고 저의 회사도 작은 바이오텍에서 대기업 글로벌 제약회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참 인생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도무지 무슨 계획대로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지경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뒤돌아 보면 기대와 상상 이상의 길로 가고 있는 제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인생이란 무아지경 (無我之境), 무아도취 ((無我陶醉)) 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렇듯 인생 자체가 계획과 전혀 별개로 전개되지 않고 마는 것이라면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데요.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내용은 다큐멘터리 전문 회사인 김진혁 공작소에서 제작해서 2011년 1월 30일에 KBS 1TV에서 방영한 ‘KBS 스페셜 – 행복해지는 법 2부 행복의 비밀코드’라는 다큐멘터리를 2025년 7월 29일에 Youtube에 재방영하면서 보게 된 작품을 보고 난 저의 감상 후기와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저녁 설겆이를 하면서 들었는데요 (저녁 설겆이는 제가 즐겨하는 제 취미생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Youtube를 듣고 있자니 우와 이 다큐멘터리를 쓴 작가가 누군지 너무나 궁금해 지는 거에요. 제가 듣기에도 너무나 잘 짜여진 극본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뿐만 아니라 한,두편의 논문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그래서 누가 만든 것인지 찾아봤죠. 역시 AI가 찾아주더군요. 이 작품을 만드신 분은 김진혁 PD셨습니다.

김진혁 PD님은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사회학과 석사를 받으신 후 SBS 교양국 PD를 거쳐 1998년부터 김진혁공작소를 설립해서 각 방송국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공급하는 분이셨습니다. 역시 글도 잘 쓰셔서 책도 세권을 내셨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말하려는 다큐멘터리와 그전에 제작한 1부 다큐멘터리를 엮어서 만드신 책 ‘행복해 지는 법’이라는 책입니다. Youtube에 친절하게도 잘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까? 라식 수술을 하면, 새 차를 사면, 고시에 붙으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까? 우리는 ‘무언가’를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비록 그것이 바라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곧 그것에 익숙해지며 (쾌락 적응 현상), 우리는 늘 사물의 한 면을 강조해서 보는 경향(초점의 오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비밀은 무엇일까? 우리가 행복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해와 진실을 다양한 실험과 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알아본다.

행복 공식들의 검증 행복의 공식중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얼마나 가졌는가?’이다. 우리는 가진 것을 늘림으로써 또는 원하는 것을 줄이고 이미 가진 것을 즐김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식은 행복의 일면만을 설명해 준다. 행복해지는 데는 수많은 우리의 편견, 오해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존재한다. 행복의 비밀코드는 무엇일까?

행복한 사람들의 비밀 서울지검 검사를 그만두고 귀농을 준비 중인 오원근 변호사, 아버지와의 오랜 갈등 끝에 아프리카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박자연 씨, 행복한 환경미화원이자 시인 금동건 씨. 이들은 왜 행복한가? 이들은 어떤 갈등을 겪고 어떤 시행착오 끝에 자신의 행복을 찾았는가?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다른 방식의 행복을 택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행복 공식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미하일 칙센트미하이 교수님의 말씀도 나오네요 “삶의 질은 평생 무슨 일을 하며 그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있다.” 일을 대하는 것에는 “(1) 생업을 위해 – 돈 때문에 일한다 (2) 출세를 위해 – 일을 즐길 때도 있다 (3) 소명을 위해 – 일을 사랑한다” 의 세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행복도가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결론처럼 만들어진 행복한 삶이란 결국 ‘자신에게 맞는 방식의 행복한 삶을 택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김진혁 PD가 스스로 찾으신 답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김진혁 PD가 ‘법대생의 삶’을 중심으로 이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사법고시 1차를 합격했지만 2차에 고배를 마신 어느 고시생의 이야기가 나왔고 서울지검 검사생활을 그만두고 귀농을 한 변호사와 법대를 졸업했지만 사시생이 되는 대신 아프리카 자원봉사자로 사는 사람의 삶을 대비시켰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환경미화원을 하시면서 시인이신 금동건님에 대한 이야기도 짤막하게 나왔지만 이 분을 사이에 두고 두명의 법대 출신의 인생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방송 다큐멘터리의 생리 때문에 이런 구성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금동건님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에 이 분에 대해 글을 적은 것이 있습니다. Google에서도 나오던데 그만 제가 금동건님의 성함을 잘못 쓴 걸 발견했네요 바로 고쳤습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65) 금동건님 – 시 쓰는 환경미화원

어찌 되었든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좀 생각하게 되었던 점은 허상과 같은 먼 미래의 막연한 행복을 향해 무한정 나를 맡기지 말고 그대신 오늘 맞는 ‘아주 소소한 행복 (Small Win)을 매순간 찾고 그 의미를 알고 즐길 수 있는 삶‘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오늘 찾은 소소한 행복을 열거한다면…

  • 집에서 재택근무하며 일하는 즐거움을 알고 열중했던 매순간의 하루와
  • 아내와 함께 저녁을 지어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던 것
  • 딸아이 내외가 들러서 음식을 가져가던 기쁜 만남들
  • 저녁 운동을 하면서 오늘도 꾸준히 나의 건강을 위해 애쓰던 삶의 열심
  • 블로그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제자신에 대한 것들입니다.

내일은 회사에 출근하는 날입니다.

요즈음은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고 회사 계단을 사무실이 있는 6층까지 오르락 내리락 걸으며 느끼는 즐거움으로 또다른 삶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게 되었고 10월부터 새로운 미팅을 시작하고 주도하게 되면서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게 생겼습니다. 매일 매일, 매순간 매순간이 행복한 것 같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BOSTONIAN (63) 대한민국 vs 미국 월드컵 친선경기 직관하며 응원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9월에 미국 동부에서 아주 좋은 빅 이벤트가 있었죠. 미국에 산지도 22년이 되었는데요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걸 경험했습니다. 2026년에 멕시코, 캐나다와 함께 미국에서 북중미월드컵이 열리게 되는데요 평가전 명목으로 미국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하기 위해 뉴저지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미국에서는 축구 경기가 그리 관심있는 경기가 아니어서 입장료가 비싸지 않은 게 정상인데요 한인들의 관심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입장료도 크게 뛰게 되었습니다.

뉴저지 해리슨의 Sports Illustrated Stadium에서 열린 토요일 오후 경기였는데요 하루 전인 금요일 오후에 보스턴을 출발해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열리는 경기에 온가족이 함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코넬대학교를 다니는 막내도 함께 오는 가족 추억 여행이었는데요 일찍 출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길이 많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차 운전자와 가족들을 보니 한인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가까스로 경기장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는데 모두 빨갛지 뭡니까?

걸어가면서 미국인 가족이 얘기하는 걸 잠깐 듣게 되었는데 입장료가 너무 크게 올라 버려서 많은 미국인들이 그런 큰돈을 지불하면서 올 수 없어서 미국인이 많지 않다는 얘기였어요.

경기장에 들어서니 경기장 전체가 붉은 물결이었고요. 이 정도면 그냥 홈구장이었습니다!!

선수들이 나오고 애국가는 떼창으로 불렀고 ‘대~한민국!!’을 계속 연호하면서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몇주전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본 터라 그랬는지 저도 열심히 응원을 했고요. 전반전부터 경기를 아주 잘해서 전반전에 2:0으로 마쳤고 후반전까지 잘 유지해서 2:0 완승을 했습니다. 전반전 후반 즈음에 공격의 핵심이었던 이재성 선수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나가고 후반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손흥민 선수를 교체했는데 그 이후부터 많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손흥민 선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아주 크게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조현우 선수가 아주 선방쇼를 펼쳤습니다. 사실 조현후 선수가 5세이브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5개까지는 아니더라도 2-3개 정도는 사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Man of the match는 조현우 선수가 되었습니다.

다시 봐도 참 그날의 흥분의 여운이 있습니다. 너무 소리를 질러서 2주 정도 목소리가 쉬어서 회사에서도 회의 때 허스키한 멋진 목소리를 선사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아주 즐거운 경험을 했고요 월드컵 경기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보스턴에서도 경기가 많아서 신청은 했는데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음 한켠에 있던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때의 생각이 다시 새록새록 나더라구요. 첫째는 당시에 저와 함께 응원을 했었기 때문에 당시 어렸어도 기억을 하던데 막내는 이런 경험을 처음 하는거라서 신기해 하더라구요. 제가 ‘대한민국’하면 모두 다 따라한다고요.

그게 아니라 모두 응원 경험이 있어서 그런 줄 모르는거죠. 여하튼 참 좋은 경험을 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오후 일찍 막내는 학교에 가는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머지는 함께 보스턴에 잘 돌어왔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기는 어렵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동본색 – 이희수 교수님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나라 미국에서 살면서 맛볼수 있는 장점 중의 하나는 전세계 거의 모든 민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공부를 한 저로서는 항상 유럽과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서양이 갑자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 데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있었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이 있었고 서쪽 끝에는 유럽이 있었는데 제가 배운 짧은 세계사 지식으로는 계속 동아시아가 승승장구를 하다가 갑자기 몇백년 사이에 패권이 확 유럽으로 쏠린 배경이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죠. 이러던 중에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중동의 역사에 대한 좋은 강의를 좋은 교수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희수 교수님은 터어키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시고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이신 중동 전문가이십니다. 7차에 걸쳐서 중동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 귀한 강의가 있는데 너무나 귀해서 너무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동 그리고 이슬람이 세계 역사와 문명에서 차지하는 것이 너무나 큰 데 그동안 서양사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다 보니 관점의 왜곡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희수 교수님의 중동본색 강의 시리즈를 찬찬히 따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중동본색 1강 – 아나톨리아

아나톨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이고 지금의 터어키 지방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수천년 전인 12000년전인 빙하기 이후 수렵시대에 이미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하류가 아닌 상류에 있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Göbekli Tepe (괴베클리 테페)라는 지역입니다. 1995년부터 20년간이나 발굴을 했는데도 아직 10% 정도밖에 발굴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놀랍게도 이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산 흔적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전이 있다고 합니다.

중동본색 2강 –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

아나톨리아에서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라는 문명에 대해 강의를 해 주십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학교 때 배운 내용보다 훨씬 광범위한 법전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법을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전체 282조나 됩니다. 이 전문을 올려 놓은 블로거 분이 계셔서 그 링크를 올립니다.

함무라비 법전 282조 전

히타이트는 세계 최초의 철기 민족이었습니다. 청동기의 주요 원소인 구리 (Copper)의 녹는점은 1085도인 반면 철기의 주요원소인 철 (Iron)의 녹는점은 1538도로서 무려 거의 500도가 더 높습니다. 히타이트 족이 어떻게 이렇게 높은 온도의 용광로를 만들었을지 아직도 의문이라고 합니다. 대단한 중동인들입니다. 히타이트에서는 철이 금보다 훨씬 비쌌다고 합니다.

중동본색 3강 – 프리기아 미다스왕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손만 닿아도 황금으로 변한다는 그 마이다스입니다. 신화가 아니라 실제라는군요 바로 번성했던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입니다. 얼마나 금이 많았으면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무역을 하는 상인이었는데 무역을 위한 서류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서 알파벳을 개발했고 이것이 모든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동본색 4강 – 인류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론 제국이 망한 후 리디아가 있었고 메디아가 있다가 페르시아가 제국을 이루게 되는데요 몇가지 중요한 내용을 메모해 두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레스왕은 바빌론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면서 밀린 임금 뿐만 아니라 여비까지 마련해서 보내준 왕으로 이스라엘에서도 좋아하는 왕이라고 하는군요. 실제 이름은 키로스1세이고 키로스의 교육이라는 뜻인 키로스에디아 (Cyropaedia)라는 책이 지금도 내려오고 한글 번역서도 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낙원궁전 (pairidaeza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은 너무 아름다워서 이것이 paradeisos (그리스어)로 되었다가 영어의 paradise (천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이 아름다웠던 Persepolis에 있던 다리우스1세의 페르시아 궁전 밖의 정원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보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플루나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마케도니아 왕 Alexandros가 이 유물을 약탈하기 위해 나귀 1만마리와 노새 5천마리를 동원했다고 한다는군요.

중동본색 5강 -격돌의 시대,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멸망한 페르시아 지역에 세워진 파르티아는 중국에서 안식국이라고 불렀던 나라입니다. 중국의 장건이 실크로드를 구축해서 교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이후 나온 국가입니다.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 (동로마제국)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중국 당나라가 있었죠. 사산조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와 정교합일된 제국이었는데 비잔틴 제국과 300년간 전쟁을 하고요 이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이슬람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 사산조 페르시아 멸망과 함께 조로아스터교도 약화되게 됩니다. 페르시아가 얼마나 강했는지 로마황제 발레아누스는 포로가 되어 페르시아왕 사푸르1세에게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벽화가 전해집니다.

중동본색 6강 –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 세계의 중심이 되다

동로마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 수중에 들어가고 압바스 시대에 바그다드에 바이툴 히크마 (Baytal-ikhma, 지혜의 집)라는 곳은 거대한 번역기관으로 이슬람 문화의 국제성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도서관을 알렉산드리아에 만들어서 그리스, 이집트 등 전세계의 책들 아랍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책을 번역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번역하고 의학, 천문학, 화학, 생물학, 문학 등이 모두 번성하는 시대가 됩니다.

중동본색 7강 – 이슬람세계의 확산과 전쟁

이슬람 제국, 오스만투르크는 사하라 사막 위의 북아프리카 지역과 유럽의 스페인/포르투갈 지역인 안달루시아,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국과 맞닿은 거대한 제국을 이룹니다. 그런 600백년간의 제국의 융성했던 문화적 유산은 안달루시아와 시칠리아의 아랍서적들이 번역되면서 유럽 르네상스의 기틀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유럽이 갑자기 철학, 과학 등 문화 전영역에서 급속한 르네상스 발전을 이룬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중동 역사를 빼고 서양과 동아시아만으로는 이 역사적 원동력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죠. 이슬람 세계는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발전되고 왕성했던 문화 강국이었습니다.

이희수 교수님은 중동, 이슬람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중심 학자이십니다. 참 좋은 강의를 듣고 배운 것 같아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하나 페르시아어와 아랍어가 완전히 다른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터어키어도 다르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는 사실 간단히 한 세계라고 하기에는 어불성설인 면이 있었습니다. 25개국의 중동국가가 있고 이 중 아랍국가는 22개이고 이란, 터어키, 이스라엘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죠 이를 MENA (Middle East North Africa) 지역이라고 부릅니다.

Bucket List (61) 동시 통번역사

8/22/2025 (금요일)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제가 ‘자유와 이유’ 메뉴에서 나름대로 제자신의 인생 2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런 생각도 써보고 저런 생각도 얘기해 보고 하면서 정리를 해 본 결과 결국 “Unretirement”로 잠정적으로나마 결론을 지은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제가 그동안 틈틈이 나름의 시도와 실험을 해 본 결과 일을 할 때에 비해 일을 하지 않고 완전히 쉴 때 저의 삶의 동력이 떨어지고 더불어 자신감과 활력이 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 사용에 대해서도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데 따른 것입니다. 이 경험은 좀 의외였는데요 일을 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어 책을 본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음악 감상을 한다는지 등등 다양한 취미생활과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그렇지 않고 일을 완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된 이유는 저의 게으름이 큰 영향을 준 것 같기는 합니다. 사실 매일의 삶에서 회사를 통해서 어떤 Structured life를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기본 골격에 더해서 추가로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제가 주3일 출퇴근 및 이틀은 재택근무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된 이후에 삶의 만족도와 워라벨이 좋아진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담처럼 제 가족에게 얘기했죠. 다음번에 얻는 일자리는 무조건 완전한 재택근무를 할 거라고요. 이런 형태는 현재의 AI 발전 추세와 자동화 그리고 기술발전 등을 통해서 더욱 공고해 지지 뒷걸음질 칠 것 같지 않다는 나름의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당에서도 아주 나이가 들었을 때 할 일과 지금과 같은 상대적으로 젊은 (?)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의 형태와 성격은 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아니면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Bucket List를 적어오고 있는 셈이죠.

제가 작년이죠. 좀 특별한 경험을 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갑자기 연락을 받았는데요 한국 식약청에서 실사를 나오는데 통역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아서 제가 급히 회사 내의 한인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통역할 사람을 모집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참여를 했는데 처음에는 인원이 꽤 있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수가 점차 줄어들더니 하루 지나고 나니까 저와 어떤 사원 한분만이 뽑혀서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 영어실력이 동시통역이나 연속통역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회사와 식약청 직원분의 피드백을 통해서 괜찮았다고 하더라는 전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첫날 정도만 하고 다른 분께 넘겨주고 다시 본래 업무로 복귀하려다가 일주일 내내 꼬박 잡혀서 통역사로 일을 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통역사가 특별히 재미있는 일은 아니더군요. 주의도 꽤 들었습니다. 특히 제 생각을 섞으면 안된다는 부분이 참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의미있는 일이고 제가 잘 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에게는 스스로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번역가나 통역사의 보수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미국은 좀 경우가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에는 통역사 단체가 있습니다. American Translators Association (ATA) 라고 하고요 이 곳에서는 인증 시험이나 다양한 컨퍼런스 등을 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니 LA에 영어-한국어 통역사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시고 이 시험을 위해 강의도 하시는 분이 계시더군요.

Korean Translator in Los Angeles

여기에 대표이신 주준희 박사라는 분이 운영하시는데 법원 통역과 의료 통역에서 중요한 일이 많이 있는 것 같고요 특허 관련한 번역 등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책 번역을 생각했는데 대략 찾아본 바로는 책 번역도 소설이나 인문학 책은 들인 시간 대비 소득이 별로라서 대부분 자기계발서 등 위주로 번역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 하기에도 이런 일은 의미도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좀 관심 있어 하는 도슨트 등에서도 통번역사의 성격을 띄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을 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물론 일을 실제로 해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지만요.

그래서 이번에는 통번역사에 대한 버킷리스트를 적어 보았습니다. 역시 이런 일을 잘 하려 해도 결국 국어를 잘해야 할 것 같아요. 자꾸 한국어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좀 있거든요. 내년에 꼭 국문과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67) Mark E Byington, PhD – 하버드의 부여 고대사 연구자

안녕하세요 보스턴 임박사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이 동북3성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도 오히려 우리의 고대사를 연구한 미국인이 있어서 오늘은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름은 Mark Edward Byington 박사님인데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Harvard 대학교에서 ‘부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충남부여가 아니라 고구려 위에 있던 그 부여말입니다.

저도 학교에서 부여에 대해 뭘 배웠다는 느낌이 없는데 지금 고등학교에서는 얼마나 가르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부여사를 거의 10년간 연구해서 이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는 아래에 링크를 걸었습니다. 제목은 “The Ancient State of Puyo in Northeast Asia (극동아시아 고대국가 부여)”입니다. 총 446페이지나 되는 대단한 분량이고요. 부여사에 대한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민국 대학교에서도 없다는 군요.

ISENEA (Initiative for the Study of Early Northeast Asia)라는 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Byington 박사님이 부여 연구를 하시면서 겪었던 경험을 경희대학교 부설 한국 고대사-고고학 연구소에 10차례에 걸쳐서 게재를 하셨는데요 이 글들을 좀 나누려고 합니다.

하버드 한국고대사연구실에 대한 회고 1 – 2/28/2017

1994년에서 2003년까지 나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지역의 고대사 및 고고학에 초점을 맞춘, 특히 부여, 고구려 및 발해의 정치 조직체들과 관련된 연구를 하며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교수직을 확보하고자 하는 한국고대사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어려움에 부딪혔는데, 즉, 미래가 불투명한 이 분야를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 수가 아주 적었고, 그 결과 서구 학계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의 미래는 아주 암울했다.

하버드 한국고대사연구실에 대한 회고 2 – 3/14/2017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청강한 강의에 영감을 받은 필자는 사업 접근법을 동원하면 한국고대사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한국고대사연구실(Early Korea Project)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한국고대사연구실을 독자적인 기관으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2006년 초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 연구소로부터 이 신생 프로젝트의 모체가 되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2006년 4월에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 연구소 옆에 사무실을 마련하였고, 5월과 6월에는 한국고대사연구실과 관련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협의하였으며, 자금 및 기타 지원을 요청하고자 한국을 방문했다.

2006년 11월에 한국고대사연구실(EKP)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 관대한 보조금을 받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시했는데, 그 중에는 한국 고고학 강의 시리즈도 있었다…2007년 2월 초에 한국고대사연구실은 한국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또 하나의 관대한 보조금을 지원받기 시작했는데, 이 보조금은 주로 운영비에 사용되었다. 프로그램 계획과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 한국고대사연구실은 2007년 초에 기본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하버드 한국 고대사연구실에 대한 회고 10 – 8/14/2017

한국의 과거에 대해 초국수주의적이고 사이비 역사학적 관점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이후 내용에서는 “사이비 역사 단체”라고 언급하겠다)라는 단체를 결성하였고, 그 중 일부는 수년 동안 동북아역사재단을 공격해왔다...한국고대사연구실은 하버드가 제공하는 지원을 통해 축소된 규모로 활동을 이어갔는데, 이 지원을 통해 고구려에 관한 비정기 시리즈(Occasional Series)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대 한국-일본 교류에 관한 마지막 출판물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남아있는 지원금도 2017년 1월 31일로 소진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사실상 한국고대사연구실은 본질적으로 죽은 프로그램이 되었다...필자는 한국고대사연구실이 정치적 근시안이나 사이비 역사학의 불합리성의 부식 작용으로도 파괴되지 않을 씨를 심는데 성공했기를 희망한다.

결국 요지는 국수적인 사이비 역사학자 (이 분의 주장에 의하면) 에 의해 제기된 식민사관 이슈 (예, 한사군 문제 등)로 인해 하버드에서의 한국고대사연구실이 중단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분이 지금도 계속 연구를 하시려는 의지가 있어 보이고 대한민국 역사의 고대사 연구가 좀더 포괄적으로 연구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9/13/2025 Update

단국대학교 사학과의 심재훈 교수님께서 Byington 박사님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한 평을 올리신 논문이 있어서 저의 공부를 위해 링크를 합니다.